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계속해서 들려오는 절규와 악다구니를 들으며 나는 귀를 후볐다.
“후.”
손가락을 불어 먼지를 날려 보냈다.
[야! 듣고는 있는 거냐?]“아직 더할 거야?”
[그게 지금 상황에 나올 대답이냐! 변명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무슨 변명이 필요해. 둘 다 살 네거티브 포인트는 없고 서로 하나씩 나눠서 사야 하는 상황인데, 네가 용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판단을 해 버리면 그것도 무산될 가능성이 있고, 만일 나눠서 사게 되더라도 내가 용사를, 네가 성녀 후보를 사게 될 확률이 높았을 거 아냐. 그렇지?”
[그, 그랬으려나……? 그래서 그게 내게 숨긴 거랑 무슨 상관이란 건데?]내가 너무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답을 해서인지, 잔뜩 화를 내던 놈이 오히려 더 당황해서 기세가 죽었다.
일단 내 긴 설명에 집중하려다 보니 올랐던 열이 일시적이나마 식은 모양이다.
그러나 내 마지막 말을 들은 놈은 처음보다도 더 크게 지랄을 시작했다.
내 마지막 발언은 ‘내가 더 비싼 걸 살 수는 없잖아.’였다.
흥분한 놈이 진정하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한참을 떠들다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놈.
나는 그 숨소리가 차분해질 때까지 여유를 가지고 기다렸다.
머리에 올랐던 열이 식고, 처음에 나눴던 대화로 돌아가서 호기심이 생길 때까지.
[…그런데 뜬금없이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왜 물어본 거냐? 설마…….]“그 설마 하고 생각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네 성별을 궁금해한 건 성녀 후보 세트를 입을 사람이 필요해서다.”
[개소리하지 마. 난 남자다. 남자야! 남자라고! 여기까지 했으면 정말 나는 해 줄 거 다 해 준 거잖아. 여기서 같이 싸우기까지 하라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면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그러면… 차라리 이렇게 하자.”
[또 무슨 개소리를 꺼내려는 거냐. 궤변이나 늘어놓을 거면 난 이대로 이 몸 녹여서 없애고 잠적할 거다. 주디스 그놈이랑 결혼을 하든 서로 잡아 죽이든 알아서 해.]“잠깐. 마지막으로 한번 정도는 더 듣고 가도 되잖아. 이대로 가면 궁금하지 않겠어? 더해 볼 수 있는 게 있는데 안 해서 실패했다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나와 놈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부스럭대던 소리가 사라졌다는 건 놈이 모든 동작을 멈췄다 건 분신을 처리하는 걸 보류했다는 뜻.
잠시 후 놈이 다시 자세를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헛소리를 하면 정말 이게 마지막 대면이 되는 거다. 넌 어차피 이제 나를 찾을 수 없어. 그걸 명심해.]“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녀 후보 역할을 할 가장 적임자가 너이긴 하지만… 그렇게 싫다면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니 다른 방법을 쓰자.”
[그러니까 그 다른 방법이 뭔지를 말하란 말이다. 말 돌리지 말고.]“쓸 만한 여자를 데려다가 입혀야지.”
[정말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 말대로 그런 걸 구해다 입혀 놨다고 치자. 그런다고 뭐가 되지? 입혀만 놓고 주디스 앞에 던져 놓으면 벌벌 떨다가 길거리에 뒹구는 고기 조각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지? 설마 살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너를 돕거나 주디스에게 대항할 거라고 낙관적인 가정만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인간의 정신은 압도적인 폭력을 눈앞에 뒀을 때 저항보다는 절망을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높은 확률로 네놈이 구해 온 건 쓸모없는 가죽 갑옷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거다.]“네 말을 들어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군…….”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조금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협박과 회유를 통해서 혹은 극한 상황에 몰아넣는 것으로 충분히 일회용 성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놈에게 적당한 여자를 찾아서 데려오라고 말하려던 것이었고.
분신을 깔아 놓을 수 있는 능력도 그렇고, 내 예상이 맞다면 암흑가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니 훨씬 더 빠르게 적절한 인물을 수배하고, 여러 방법을 동원해 협박, 회유, 세뇌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디스의 압도적인 힘 앞에 멘탈이 무너져서 바보라도 되는 순간, 내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지게 된다.
살고 싶은 욕망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고, 절망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도 인간이다.
모든 걸 잃어버린 탓에 눈빛이 먼저 죽어 있던 자들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승리가 고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긍정적인 부분만 보려고 한 건가…….’
그렇게도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며 움직이자고 생각했는데도 맹점은 드러나기 마련인가 보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내가 놓친 부분을 지적한 사람이 나의 대화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상정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문제를 발견한 자와 상의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번에는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내 실책이야. 나도 모르게 이번 일에 대한 압박이 심해서 그랬는지 긍정적인 부분만 검토하고 마냥 잘될 것 같은 쪽으로만 생각했다.”
[네놈답지 않은데……. 그렇게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다니.]“맞는 건 맞는 거고, 틀린 건 틀린 거니까. 그런 걸 인정 못 하고 고집부릴 놈 같았으면 지금 여기 서 있지도 못했어. 아마 처음 마주쳤던 적한테 죽어서 비료가 된 지 오래일걸? 그때 특채자는 나를 먹어 치우겠다고 했거든. 먹히고 소화되면 뭐… 결국에는 땅에 비료로 뿌려지는 거지.”
[…진지한 목소리로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똥 얘기였냐. 그래, 지금까지 네놈이 나한테 한 짓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네가 똥 찌꺼기가 돼서 비료로 뿌려지는 게 낫다 싶긴 하지만, 일단 꺼낸 이야기는 마무리를 지어야지.]“너는 어떤 방법이 좋다고 생각해? 솔직히…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성녀 역할을 할 배우를 최대한 괜찮은 걸로 구하는 방법밖에 떠오르질 않아.”
최초 고려했던 협박, 고문 같은 멘탈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만한 것은 배제해야겠지.
시작하기도 전에 정신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으니.
다각도로 접근을 해 보기 위해 생각을 하려던 나는 절망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전부 납치, 감금, 고문, 협박 같은 방법뿐이다.
배제를 하려고 하니 괜히 더 그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최근에 너무 편한 방법만 고집해서 그런지 무식해진 것 같은데.’
그런 반성을 하면서 한숨을 내쉬던 나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굳이 네가 입을 필요가 있나?”
[한참 조용하다 싶어서 무슨 해결책을 꺼내 놓을까 했더니 겨우 한다는 소리가 그건가. 굳이가 아니라 애초에 나는 성녀 역할을 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마치 내가 입기로 한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아니, 내 말은… 네 본체가 입을 필요가 있냐는 말이지. 넌 한 번도 본체로 나와 대화한 적이 없잖아. 안 그래?”
[…….]놈의 말을 듣고 내가 말문이 막혔듯이, 이번에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다른 인간을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다고 속 편하게 생각한 것과 비슷하게, 이놈은 무조건 자신은 빠져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사고가 좁아진 것이다.
“네 능력이 뒤에 숨어서 안전하게 다른 사람 몸에 기생하는 거잖아. 죽어도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너는 네가 쓰던 몸을 주인 허락도 없이 폐기 처분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 왜냐하면 일회용 몸뚱이가 녹아 없어지든, 가루가 되든, 뇌가 녹아내려서 침을 질질 흘리든, 본체인 너에게만 피해가 없다면 얼마든지 쓰다 버릴 수 있는 쓰레기가 너니까.”
[쯧, 비아냥거리지 마라. 쓴 몸을 그대로 살려 두는 게 더 잔인한 일이라 폐기 처분하는 것뿐이니.]“뭐, 합리화를 해서 굳이 더 추해지는 거야 네 선택이니 나와는 상관없고… 어때? 나는 네 능력을 정확히 모르니 가능 여부는 네가 판단해야 할 것 같은데.”
내 질문을 들은 놈이 숙고에 들어갔다.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이 침묵이 꽤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정하지 않고 검토를 한다는 건 일단 가능하다는 뜻일 확률이 높으니 말이다.
[너에게 내 능력에 관한 걸 전부 알리고 싶지는 않지만… 이게 내 밑천의 전부는 아니니까 큰마음 먹고 알려 주지. 일단 네가 말한 방법이 가능은 해. 다만 하나의 강력한 숙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뿌려 놓은 것들을 전부 폐기 처분해야 한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이건 시간이 좀 걸려.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질 거다.]즉, 약한 분신 여러 개를 동시에 움직일지 그 역량을 하나에 몰방해서 강한 개체 하나를 조종할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군.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는 건… 아마도 놈이 관리하는 조직의 중간 관리자들이 전부 저놈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생각이 맞다면 저놈은 이미 하나의 개인이라기보다는 자아를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 대신 일해 줄 분신이 있었으면, 나 대신 등교해 줄 분신이 있었으면. 아침에 일어나 많이들 하는 생각 아니던가.
그런 맥락에서 나태의 특채자치고는 너무 부지런하면서도 어울리기도 하는 놈이었다.
“그 말은… 일단 성녀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지?”
[네 말대로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는 게 나에게도 좋은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내가 위험할 일이 없는 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이 이상은 없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실패한다면 많은 걸 포기하더라도 나는 살길을 찾아 숨어들 거다. 이미 무인도에 여자를 잔뜩 실어다 놨어. 유예된 파멸을 기다리며 즐기는 삶이 당장 뒤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말이야.]이 와중에 그런 준비까지 해 두다니. 자기 살길 찾는 데 있어서는 쓸데없을 정도로 부지런한 놈이다.
하긴, 가진 것에 대한 미련이 강하니까 이렇게까지 하는 거겠지.
“좋아. 네가 사용할 몸뚱이는 내가 구해다 주지. 혹시 요구 사항이 있나? 숙주로 사용하기에 제한되는 것이 있다거나… 다른 무엇이라도. 네가 써야 할 몸뚱이니까 최대한 맞춰 줄게.”
[과하게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돼. 지나치게 강하면 지배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어. 그리고 최대한 성녀 후보의 살아생전 모습과 흡사할수록 좋다. 용사 역할이야 네가 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지만 맞출 수만 있으면 최대한 비슷한 사람을 구하는 게 좋아. 나이, 외모, 능력이 운명의 주인과 비슷할수록 운명을 빌려 오는 효율이 올라가니까.]“참고하지.”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라는 당부와 함께 놈은 평소처럼 분신을 폐기했다.
자, 이제 성녀와 비슷한 여자를 어떻게 구할지 궁리해야 한다.
돈으로 살 수 있을지 아니면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될지…….
아니지, 이건 너무 이른 고민이다.
일단은 후보군을 좁히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벨로제를 불러 하수인에게 전달해야 할 사항들을 불러 줬다.
받아 적는 벨로제의 표정이 싱글거리는 게 꽤 들뜬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에스더에게 찾아갈 때마다 슈퍼 갑의 역할을 하다 보니 애가 버릇이 조금 안 좋아진 것 같다.
그래서 뭐… 벨로제는 내 부하니까 다른 곳에서는 슈퍼 갑질을 해도 된다.
“다녀오겠습니다!”
우렁찬 벨로제의 인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뻐근한 눈가의 감각이 내가 겪고 있는 압박감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