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200
200
-태어나서 지금까지 몇 명이나 될 것 같아요? 저를 이용하려고 들었던 사람이.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게 누구인지 또 언제인지는 몰라도… 저는 누구에게나 탐나는 도구이니까요.
이번 메모는 유독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그만큼 손에 쥔 펜을 꾹 눌러 썼단 것이고, 담긴 감정이 강렬하다는 뜻일 거다.
하지만 내게는 메모에 담긴 감정보다는 적힌 내용이 더 중요하다.
‘혹시 상태창에 표시되지 않은 미래 예지 능력이라도 있나 해서 깜짝 놀랐는데… 그건 아닌 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클라리스가 입술을 깨문 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다시금 손을 뻗었다.
부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런 자잘한 것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클라리스의 신성력이 섬광처럼 뻗어 오는 적의에 반응했지만 저항 자체는 미약했다.
그녀의 능력은 이타적이기만 할 뿐 공격은커녕 방어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기절시키기 직전에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력 감응이 매우 불안정하게 바뀐 클라리스의 상태를 알려 줬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노려보는 나에게 결연한 시선으로 응수하는 클라리스.
그녀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신성력을 끌어모은 상태였다.
신성력도 결국 마력의 일종.
아무리 생명체를 치유하는 성질의 기운이라 해도 사용자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다.
어떤 성질의 마력이든 간에 과부하를 걸어 버리면 사용자의 육체는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기 마련.
하물며 클라리스 본인이 자신을 치유하기를 거부하면 폭주하는 신성력은 그저 그녀의 육체를 파괴하는 격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치유를 거부하지 않더라도 붕괴와 치유가 한계 이상으로 반복되면 결국 죽는 건 마찬가지고.
그녀는 지금 그것을 이용해서 나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은 진정을 시키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나며 말을 걸었다.
“죽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러면서 가능성을 검토한다.
이대로 기절을 시키면 연약한 육체는 해방된 힘을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그 신성력을 내가 컨트롤해서 억누르는 것도 무리다.
새어 나오지 못하게 찍어 누르는 것이야 가능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압축해 버리면 그릇인 클라리스의 내부는 결국 걸레짝이 될 것이다.
마리아가 그런 예상들을 긍정했다.
‘당장 상황이 급박한 게 아니라 다행이군.’
날고 기는 강자들이 도사린 곳에서 급하게 빼내려던 거였으면 얼마나 골치가 아팠을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의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일단 요구 사항부터 들어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는 알아야 할 것 아냐.”
약간의 기쁨 그리고 강렬한 의심. 두 가지 감정이 클라리스의 얼굴을 스쳤다.
그럼에도 그녀는 열정적으로 수첩을 뒤지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종이가 닳고 닳아서 너덜너덜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펼쳐서 확인하고, 또 읽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랑 동생을 구해 주세요.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신도들 앞에서는 방실방실 웃으며 협조하는 모습이 의아했었는데 인질을 잡고 있었던 건가.
뭐, 그래도 다행이다. 어렵지는 않은 일이니 말이다.
-신비, 혹시 교주까지 잡아 죽은 건 아니겠지?
-예? 형님께서 일단 방해되는 놈들만 싹 정리하라고 하셔서 1층을 점거하고, 내려오는 놈들만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놈들 울며불며 달려들어서 좀 무섭습니다. 빨리 와 주시면 안 됩니까? 좀비가 따로 없다니까요.
-…….
잡아 죽이는 입장에서 무섭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도대체 얼마나 미친놈들처럼 달려들면 신비가 저런 소리를 할까.
나는 신비의 시야를 빌려 확인을 할까 하다가 관뒀다.
좋지 못한 걸 굳이 미리 볼 필요는 없겠지.
-교주한테 볼일이 생겼어. 올라가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놈들은 살려 놓고, 달려드는 놈들은 싹 죽여 버려.
-예, 형님.
“뻔한 질문이지만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 하니까. 네 엄마랑 동생을 인질로 잡고 있는 게 네 옆에서 열심히 떠들던 노인네 맞지? 설마 10년 전에 헤어진 엄마를 찾아 주세요, 15년 전에 산적한테 잡혀간 동생을 구해 주세요, 같은 부탁이면 못 들어줘. 차라리 네가 죽든 말든 다른 대안을 찾고 말지.”
질문이야 말 그대로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기 위함이고, 뒤에 붙인 사족은 네가 없어도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더한 것을 요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말 귀찮아지면 차라리 빠르게 다른 쪽을 납치할 생각을 하는 게 나은 것도 사실이고.
내 태도에서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클라리스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그녀의 코로 피가 한 줄기 내려오다가 끊겼다.
과부하에 의해 망가진 몸이 실시간으로 치유된 모양.
저런 상태라면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을 것 같았다.
“따라와.”
나는 내가 뚫고 온 길을 앞장서서 되짚어 갔다.
위에 도착할 때쯤에는 정리가 끝나고 교주가 잡혀 있을 것이다.
* * *
신전 위로 향하는 길은 피에 절어 있었다.
신비가 무섭다고 표현한 이유를 쌓인 시체의 숫자로 짐작이 가능할 정도였다.
하나같이 제대로 된 무장도 하지 않은 평신도 그리고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
사제들마저 제대로 된 신성 마법을 쓸 수 없는 일반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은 몬스터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다는 뜻이 된다.
나야 익숙한 광경이지만 자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이 이런 몰골로 죽어 있는 걸 보는 클라리스의 심정은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봤다.
내가 자신을 순식간에 제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꽤나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는 클라리스. 주변을 살피는 그녀의 눈빛에는 동정심은 온데간데없고 혐오감만 가득했다.
하긴, 받기만을 바라면서 주는 맹목적인 믿음만큼 쓸모없는 쓰레기는 드문 법이다.
그 믿음이 주는 부산물은 다른 놈들이 전부 챙기고, 클라리스는 그 믿음을 생산하는 기계로서 작동해 왔다면 저런 반응이 이해가 간다.
그녀에게는 신자들도 가해자로 보였을 테니.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가까워졌는지 전방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이 섞여 있다.
“엇, 형님! 오셨습니까? 들어가 보십시오.”
모든 계단을 오르자 복도 끝에서 실시간으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때려죽이던 신비가 헤벌쭉 웃으며 나를 반겼다.
교주님, 성녀님이란 단어와 온갖 욕설들을 내뱉으며 달려드는 신자들은 좀비 같은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지만, 신비와 몬스터들은 복도 중간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마치 그라인더로 갈아 버리듯이 오는 족족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고 있었다.
“수고해라.”
나는 간단한 치하의 말로 신비를 격려한 뒤에 가장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는 문으로 향했다.
그런 나를 경악과 궁금증으로 범벅이 된 표정을 한 클라리스가 따라왔다.
아마도 신비와 몬스터들을 보고 엄청나게 놀란 모양이다.
“어차피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란 건 알고 손을 내민 것 아닌가? 아니면 손을 잡아 준 게 악마나 악당이라 놓고 도망치고 싶어지기라도 했나?”
내 질문에도 클라리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놀란 것은 놀란 것일 뿐, 손을 잡아 준 것이 설령 사신이라 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야, 이……!”
그런 감상은 방으로 들어간 순간 날아갔다.
면상 전체가 퍼런 멍으로 뒤덮인 노인이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야, 이 미친놈아! 저런 꼴로 두면 어떻게 해!
나는 바로 신비를 향해 일갈했다.
그러자 신비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예?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형님이 그런 노인 안위를 걱정하실 분이 아니라서 그냥…….
-그게 아니라, 저런 꼬라지면 뭐라도 입히던가 아니면 최소한 뭐로 덮어 놓기라도 해야지. 눈 썩겠다, 이 자식아. 장님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당연하죠. 형님이 앞을 못 보시면 제가 형님 지팡이가 되고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개가 되겠습니다!
-…됐다. 하던 일 계속해…….
-옙! 열심히 때려잡겠습니다!
아무리 조각난 시체나 내장 조각보다 더 구역질 나는 광경을 선사했다 해도 저런 말을 하는데 화를 내긴 쉽지 않았다.
쯧, 하고 혀를 차는 것으로 불쾌함을 날린 나는 교주에게 다가갔다. 실제로 교주라고 불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이비 우두머리를 표현하는 단어에 그만큼 어울리는 것이 없으니 그렇게 부르자.
“야.”
“크, 클라리스! 어서 이 악당들을 몰아내다오!”
나는 무릎으로 빠르게 기어오는 교주를 발로 밀었다.
“어억!”
알몸으로 바닥을 구르는 영감의 모습은 참 보기 힘들었다.
이상하게 살도 없어서 굴리는 맛도 없었다.
장점이라고는 없는 오이지 같은 새끼다.
“네 잘난 성녀님은 널 구해 줄 생각도 없으시고, 구해 줄 능력도 없으시다. 할 줄 아는 건 자살뿐이라 지금 나한테 기대고 있으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내가 하는 말이나 똑바로 들어.”
“이놈! 감히 어린놈의 자식이 위대한 신의 어여쁨을 받는…….”
짝. 후두둑.
이런, 무심코 뺨을 쳐 버렸다.
무의식중에도 힘 조절을 해서 목이 완전히 돌아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이빨이 다섯 개쯤 바닥에 쏟아진 걸 보니 상당히 충격이 심할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동방예의지국에 뿌리를 두고 노인 공경을 삶의 교훈으로 삼는 나로서는 참을 수 없기는 개뿔, 속이 다 시원했다.
이 시간에서 여신도들이랑 뒹구느라 알몸으로 잡혀 있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봐주겠는가.
심지어 그 여신도들은 대부분 죽어 있었다. 아마 좀비 떼처럼 달려드는 다른 놈들처럼 신비에게 저항한 모양이다. 믿음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야, 네가 숨겨 놓고 있다는 쟤 엄마랑 동생 어디 있어? 빨리 말하고 편해지자. 뒤지고 싶으면 빨리 말해.”
“뒤, 뒤지……?”
교주의 반문은 중간에 끊겼다.
피 칠갑을 한 신비가 몬스터들과 함께 무언가를 주렁주렁 가져왔기 때문이다.
“어어억!”
신비가 그것들을 던지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사제복을 입은 놈들이다.
뭔가 알고 있을 만한 놈들은 모아두라고 했더니 이렇게 잡아서 가져온 모양.
숫자는 여섯이었다.
“잘됐네. 자, 곡소리 그만들 내고, 성녀님한테 그만 눈짓하고. 상황파악 빠른 놈만 덜 맞는다. 내가 교주가 숨겨 놓은 성녀님 모친과 동생의 행방을 안다, 거수.”
한 놈도 드는 놈이 없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지 정신이 없어서 뭐라고 하는지도 이해를 못 하는 건지.
나는 다시 한번 묻기로 했다. 주먹으로.
그래도 가장 나이가 적고 튼튼해 보이는 놈을 잡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요령 좋게 아픈 곳만 후려치니. 처음 곡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비명이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다음은 누가 맞을지 모른다. 먼저 말한 한 명만 안 맞는 거야. 잘 선택해.”
입에서 피거품을 게워 내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이야기를 하니, 다들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그 무식함에는 도와달라고 했던 클라리스마저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으니 당장 다음 타자가 될지도 모르는 노인네들은 오죽했을까.
아직 때릴 놈이 많이 남았다는 판단하에 첫 번째 놈이 기절하자마자 안면에 주먹질을 해서 두개골을 으깨 버렸다.
뻐억 하고 수박 깨트리듯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효과는 직방이었다.
“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교, 교주님이, 아니 교주 새끼가 진작에 정리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골치 아프게 군다면서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너, 너 이 자식!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진정 신이 두렵지 않느냐!”
“신은 개뿔! 전부 성녀님을 이용해서 신자들 모아 사기나 친 거지! 다른 놈들은 몰라도 우리는 전부 처음부터 같이했는데도 신 타령입니까! 언제부턴가 정말 신의 사자라도 된 양 굴더니! 그래, 그 잘난 신 좀 불러다가 우리 좀 구해 달라고 해 보시오!”
“신성 모독이다!”
나를 중간에 두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머저리가 둘.
그런 그들을 보며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가 하나.
나는 염동력으로 둘의 입을 닫아 버린 다음 클라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 쳤다. 마지막 희망마저 부정당한 소녀의 눈은 죽어 있었다.
“어떻게 할래?”
넘실거리는 신성력으로 자신의 심장을 조여 가며 나를 협박한 소녀에게, 나는 두 번째 소원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