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203
203
“서, 성녀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서, 성녀님이 이 시간에 무슨 일로…….”
“고, 고개 숙여! 허락 없이 성녀님의 존안을 훔쳐보면 어떻게 되는지 잊은 거야?”
“가, 가만! 성녀님이 피를 흘리신 것 같은데?”
날이 밝고 아침 예배 시간에 맞춰 신도들이 몰려들었다.
지난밤, 참극은 예배당에서 벌어지지 않았기에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조금 더러운 의복과 굳은 피가 묻은 얼굴을 한 성녀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평소와는 너무 다른 것이기에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클라리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하지만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복수의 완성을 기다리는 건지… 자신을 걱정하며 다가와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지.
그러나 단 한 명의 신자도 평소와 다른 피가 묻은 그녀를 걱정하며 다가오지 않았다.
성녀라고 받드는 소녀의 안위보다 허락 없이 성녀에게 다가가 벌을 받을 자신들의 안위가 더 중요한 것이다.
결국 예배당이 꽉 차도록 사람이 모였지만 그녀는 혼자였다.
턱.
그때, 그녀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더니 친근한 태도로 옆에 주저앉는다.
“이제 더 안 오는 것 같은데 슬슬 시작할까?”
찰랑거리는 금발 아래로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자리했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은 그를 외모보다 훨씬 어려 보이게 만든다.
애타게 기다린 구원의 모습치고는 너무 경박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클라리스는 씁쓸히 자신이 틀린 부분을 정정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갑작스레 나타난 이자는 구원자가 아니다.
이자는 분명히 목숨값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은 곧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가 목숨이거나 그에 준하는 비극이란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클라리스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없으니까.
방금 전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던 엄마의 얼굴이 피에 젖은 이후로는 보이질 않는다.
10년을 넘게 쌓여 응어리진 돌덩이는 삭아서 문드러졌고, 유일한 희망이라 여겼던 것은 애초에 부서져 있었다.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하는 신성한 힘도 조각나 버린 마음을 이어 붙이진 못하는 모양이다.
클라리스는 기분 나쁠 정도로 유려한 얼굴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금 정면을 응시했다.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인물에 당황해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눈과 입이 움직이는 광경은 하나의 거대한 괴물을 보는 듯해 구역질이 치밀었다.
클라리스는 역겨움을 몰아내기 위해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나치게 경쾌한 대답.
그러나 그 대답이 지닌 무게는 수많은 인간의 목숨이었다.
눈을 감은 클라리스의 귀로 비명 하나가 스며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비명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예배당은 순식간에 공포와 절규로 가득한 공간이 되고, 인세의 지옥으로 탈바꿈한다.
소녀는 눈을 감고 그들의 비명 하나하나를 새겨 넣었다.
* * *
클라리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학살은 지루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에 전소시켜 버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복수극의 마무리가 뱀 꼬리 같은 모양새가 될 것 같아서 나는 굳이 신도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죽을 수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옆을 보니 눈을 감은 클라리스가 보인다.
차라리 간헐적으로 어깨를 들썩이는 이쪽을 보는 게 더 재미있다.
사람이 죽는 것도, 자잘하게 쌓이는 네거티브 포인트도, 그들이 지른 비명이 글자로 바뀌어 표시되는 메시지도 이제는 너무 당연한 것이 된 탓에 자극이 되질 않는다.
많은 죽음은 그야말로 숫자일 뿐, 삶의 활력이 될 자극은 이런 관찰할 맛이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클라리스의 옆모습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차츰 비명이 잦아들고 예배당에 숨 쉬는 존재가 몇 남지 않을 때까지.
“서, 성녀님… 제, 제발… 기… 적…….”
마지막으로 죽는 만큼 가장 오래 살았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배가 꿰뚫려 고통스럽게 죽어 가고 있으니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헷갈리는 남자는 클라리스를 향해 연신 손을 뻗고 있었다.
사람이란 게 몸에 구멍이 생기면 살 수 있든 없든 간에 일단 구멍부터 막고 보는데, 도대체 얼마나 성녀에 대한 믿음이 투철하면 내장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손을 클라리스를 향해 뻗고 흔들 수 있을까.
인간의 본능마저 뒤바꾸는 믿음의 힘이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보다 배는 어린 여자에게 무언가를 구걸하던 자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예배당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고요함 속에 단아하게 인형처럼 앉아 있는 소녀는 그림 같아서, 끝났다는 말로 이 정적을 깨기 싫을 정도였다.
그래서 클라리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을 떴을 때는 살짝 아쉽기까지 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그녀의 수첩이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클라리스는 내가 알아듣지 못할까 그러는지, 신중하게 내 손바닥에 글을 적어 갔다.
-이제 저는 뭘 하면 되죠? 약속대로 뭐든 말하는 대로 할게요. 어차피 저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고, 살아야 할 이유도 모르겠으니까.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삭막한 눈빛으로 써 내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취향인지… 나는 멀쩡한 인간보다 이렇게 망가진 인간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아직도 뺨과 가슴을 빨갛게 물들이고 죽은 교주 위에서 나를 돌아보던 모습이 망막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곧 부숴야 할 것이란 거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털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여흥은 끝나고 진짜 고생을 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성녀 역할을 할 재료를 구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나태는 직접 한번 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나태가 선정한 지역에서 가장 가깝게 위치한 내 던전에서 마주하게 됐다.
“누추한 곳에 꿈에 나올까 무서운 가면이라니, 보기만 해도 재수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군.”
상당히 좁은 토굴에 들어와 가면 쓴 나를 본 놈의 첫마디였다.
“그것보다는 네 악취미가 더 대단한데. 어린 남자 몸을 하고 돌아다니는 게 취미일 줄이야. 나는 남의 취향을 존중하는 편이라서 역겹진 않은데 구역질은 나는군.”
나도 지지 않고 뼈 있는 말로 응수한다.
아닌 게 아니라, 나태는 어울리지 않게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 되는 곱상한 소년의 몸으로 찾아온 것이다.
아무리 초보 모험가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던전이라 해도 저만한 꼬마가 들어오니 위화감이 상당했다.
뒤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클라리스도 적응이 힘든지 표정이 흐려진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과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설명하긴 했지만 그중에 만나야 할 사람이 10살 조금 넘은 애새끼라는 건 없었다.
세계의 운명이니, 용사와 성녀니 하는 소리를 늘어놨는데 같이 협업을 하는 놈이 이런 모습이어서야…….
그러나 당사자는 신경 쓰지 않는지 콧방귀를 뀌며 대꾸한다.
“흥, 다른 것들은 전부 처분해서 어쩔 수 없었을 뿐이야. 나도 다리 짧은 몸으로 걸어 다니면 불편하다고. 어젯밤에 죽여야 했던 게 이 몸 주인 부모들이라 쓰던 거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며 툭툭 옷을 터는데 소매에 피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놈도 참 글러 먹었다.
하는 얘길 들어보면 거슬리는 자의 자식의 몸을 빼앗아 죽인 것 같은데… 단순한 취향이든 효율을 중시한 방법이든 간에 일단 글러 먹었다.
그런 놈이랑 마주 서 있는 나는 대량 학살을 밥 먹듯 하는 미친놈이니 조합 한번 끝내준다.
아무리 복잡한 사정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고는 해도, 이런 조합으로 메드세디아를 위협하는 재앙에 대항해서 세계를 구해야 한다니.
세상 사람은 물론이고 신이 보고 있다면 한숨도 매진될 것 같은 광경이었다.
“저게 네가 구해 왔다는 재료냐?”
부쩍 싸가지가 없어진 말투는 꼬마의 모습을 한 탓인가.
놈은 빼꼼 고개를 빼서 내 뒤에 선 클라리스를 관찰했다.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인상을 찌푸린다.
“재워 놓은 것도 아니고 멀쩡히 정신이 붙어 있는데 왜 저렇게 멍해? 약에 취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디서 또 저렇게 고장 난 걸 가져왔어? 완전 서 있는 시체군.”
나는 클라리스의 쓸모를 인식시키기 위해 그녀가 겪은 일들을 대충 설명했다.
“발리아루 지방에서 장사한다던 그 성녀인가? 차라리 협박하거나 강제로 뺏는 게 낫지… 난 저렇게 죽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들이 더 싫은데…….”
“알고 있나?”
“아, 그냥. 그쪽 지방 마약 판매율이 떨어진 이유니까 알고는 있었지. 인간이란 게 시간밖에 남는 게 없는 부자들도 약을 빨지만, 힘들어 뒤질 것 같은 놈들도 약을 빨거든. 근데 기댈 다른 곳이 생기면 약을 안 찾아. 말하자면 업계 경쟁자인 셈이지.”
“…….”
마약을 광범위하게 유통하는 범죄자가 종교를 상대로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 걸 보니 아무리 나 같은 놈이라도 어이가 없긴 했다.
“어찌 됐든, 이 정도면 성녀 역할을 맡을 육체로 적당한가?”
“아주 괜찮지. 능력만 비슷한 게 아니라 어쨌든 ‘성녀’라고 불린 세월이 쌓여 있는 사람이니까. 뭐, 성녀라 불리는 여자야 대륙을 뒤지다 보면 심심찮게 찾을 수 있지만 그거나 이거나 1등급인 건 매한가지지. 그리고 사기꾼은 죽은 놈들이고, 이 여자는 선천적으로 신성한 힘을 갖고 태어난 게 맞는 거잖아? 어차피 진짜는 네가 이미 죽여서 곱게 포장된 상태니까. 누굴 찾아도 가짜인 상황에서 가장 괜찮은 가짜를 찾은 셈이지.”
“다행이군. 고생해서 찾은 건 아니지만 금보다 귀한 시간을 소모해서 찾은 게 별로면 속이 쓰릴 뻔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우리가 준비하는 만큼 주디스에게도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놈은 지금도 재앙에 걸맞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폭주를 하는 중이었고, 제국은 황제가 황성을 버리고 도망을 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혼란했다.
운명의 거대한 흐름을 탄 주디스를 막을 방법이 사실상 메드세디아의 인간들에겐 없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은거한 강자들이 몰려들면 막을 수는 있겠지만, 주디스는 옛날이야기 속 용사와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약한 부하들부터 보내는 마왕의 호의에 힘입어 무럭무럭 자라는 용사 말이다.
심지어 제동을 걸 용사를 내가 새싹일 때 작살 냈으니 완전한 재앙이 될 때까지 주디스는 무럭무럭 자라기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주디스를 죽여 보겠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파악한 주디스의 위치와 상태를 떠올리니까 속이 쓰려 온다.
나는 위장 경련을 일으킬 것 같은 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묻고 싶던 용건을 꺼냈다.
“네가 성녀 역할을 하는 거랑 본인이 직접 하는 거랑 차이가 있나?”
새로 얻은 장난감의 운명을 결정지을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