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204
204
“차이야 당연히 있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거름망에 한 번 거른 것과 두 번 거른 것. 둘 다 처음 상태와 같을 순 없지만 전자가 훨씬 더 가까운 건 어쩔 수 없지.”
빠르게 대답한 놈은 슬쩍 곁눈질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 온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설마 저 여자한테 성녀 역할을 그냥 시키려고? 하긴 삶에 미련도 없어 보이는데 의미 있는 일에 목숨 한번 거는 것도 괜찮긴 하겠네. 그쪽이 훨씬 더 운명을 빌린 효과도 클 테고. 그럼 내가 할 일은 이제 끝인가? 아, 궁금한 게 있으면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친절한 목소리가 역겹다.
혓바닥이 길어지고 부드러워지는 걸 보니 빠져나갈 구멍이라고 판단한 모양인데, 어림없는 망상이다.
나는 놈의 행복한 망상을 부수는 걸 잠시 미루고 클라리스를 마주했다.
“내가 했던 말들은 기억하겠지?”
무미건조한 얼굴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어느 쪽을 골라도… 네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진 않을 거야. 반대로 말하면 낮은 확률이지만 양쪽 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는 말이지.”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이어 가려는데, 작은 손이 내 손에 포개졌다.
미약한 힘으로 내 손을 끌어서 자신의 가슴 앞으로 가져간 클라리스가 손가락을 들어 글을 적는다.
의사소통을 위해 분명히 수첩과 펜을 줬는데도 그녀는 굳이 내 손을 사용하고 있었다.
-목숨에 미련은 없어요. 살고 싶은 이유는 다 사라졌으니까요. 그렇다고 죽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저를 구해 주고 원한을 갚아 준 분과 약속한 것은 지켜야겠죠. 그래도… 죽는 순간에는 저이고 싶어요. 그쪽이 당신에게도 더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걱정 마세요. 아무리 무섭고 대단한 것이라도 삶에 미련이 없는 자를 두려움에 빠뜨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사람의 팔을 들고 원수를 향해 내리찍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유한 얼굴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강단이었지.
기껏 힘들게 구한 진짜 성녀였던 것과 가짜 성녀다.
조금이라도 효과가 좋은 쪽을 시도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보험은 들어 놔야겠지.
나는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숨기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하는 나태한 놈에게 통보했다.
“일단 성녀 역할은 클라리스가 직접 맡는 걸로 한다. 하지만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까 전투 현장에는 너도 있어야 해. 만약 역할을 제대로 못 한다 싶으면 바로 대체할 수 있도록.”
내 말을 들은 놈의 면상이 구겨진 똥휴지처럼 뭉개졌다.
“젠장, 그럴 줄 알았지. 네놈이 곱게 넘어갈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어차피 숨어 버리면 지금 당장 찾아내지도 못할 상황인데도 툴툴거리기만 하지 계속 협력하는 걸 보면, 이놈도 의외로 마음이 약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자식의 몸으로 부모를 죽이고 온 놈이다. 그냥 주디스를 처치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고 싶은 마음의 발로라고 하는 게 맞겠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으니 이틀 안에 주디스와 결판을 낸다. 그러니까 너는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도움 될 만한 새 껍질이나 구해 와.”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귀에 접근했지만, 나는 툭 하고 발로 걷어찼다.
주디스를 직접 마주해야 하는 입장에서 본체는 드러내지도 않는 놈의 엄살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후우…….”
나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심호흡을 했다.
멋대로 고개를 들려고 드는 불안을 억누르기 위해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영웅 놀음. 피하려고만 하다 곪아 터지는 것을 원치 않아 나서기는 하지만 절대 비극으로 마무리 지을 생각은 없었다.
* * *
황성에 거의 도달하기 직전인 주디스를 향해 가는 길.
앞으로도 싸울 일이야 흐르고 넘칠 테니 마지막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겪은 어떤 전장보다 치열할 것이 확실한 전투를 앞둔 상황.
이동하는 데 걸리는 짧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각자가 전부 달랐다.
여울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숫돌을 들고 물에 적신 검을 갈고 있었다.
유령검이 날이 상하는 일이 있을 리 없으니 날을 세우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검에 숫돌이 갈리는데 날이 설 리가 있겠는가.
그녀가 세우는 것은 날이 아니라, 본인의 감각, 집중력, 결의 같은 거겠지.
그 증거로 숫돌이 한 번 밀릴 때마다 예기가 더해지는 것은 그녀의 눈빛이었다.
전투를 준비하는 무인으로서 저보다 더 어울리는 모습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런 여울의 모습을 보고 덩달아 차분함을 얻은 나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머문 곳은 작은 벨로제와 지나치게 커져 버린 신비가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특별히 주는 거니까 많이 먹어 둬.”
“누, 누님? 정말 이걸 다 먹어도 됩니까……? 혹시 머리가 아프시거나 치매가 온 건 아니시지요……?”
“뭐라고? 이게 기껏 챙겨줬더니 한다는 소리고 고작 그거야?”
짝!
나름 매섭게 울린 소리.
하지만 정작 때린 쪽이 더 아픈지 벨로제는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손을 부여잡았다.
“군소리 말고 빨리 먹어! 그리고 절대 죽지 마! 알았지?”
“…절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네가 제일 칠칠치 못하니까. 봐, 여기서 네가 제일 맞을 곳이 많잖아. 쓸데없이 덩치만 커서는…….”
“누, 누님… 저는 누님이 먹을 것만 밝히는 악마라고 생각했는데…….”
짝!
…….
한심한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훈훈하고 짠하기도 하면서 머리가 아파 오는 광경이었다.
매일 먹을 것으로 티격태격하더니 오늘은 벨로제가 아껴 놨던 과자나 먹거리들을 꺼내 와서 신비에게 주고 있는 모양이다.
신비에게 준 것들이 지나치게 고가의 군것질거리인 게 의아했는데, 잠시 생각해 보니까 에스더에게서 뜯어 낸 것인 모양이다.
뭐, 뜯어 냈다기보다는 자발적인 뇌물에 가까웠겠지만.
다음은…….
“X발.”
고개를 돌리던 나는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 일단 욕부터 내뱉었다.
“사람을 보자마자 욕부터 내뱉다니, 역시 밑도 끝도 없는 쓰레기군.”
이동하는 부유성에 타고 있는 자들 중에서 나에게 이런 소리를 할 만큼 막 나가는 놈은 한 마리뿐이다.
나태의 특채자.
문제는 이번에 가져온 껍질이 너무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직의 배신자인지 뭔지는 몰라도 터질 것 같은 근육을 아슬아슬한 면적의 가죽 소재 의류로 가리고 군데군데 리본 모양의 벨트를 찬 모습은… 끔찍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지나치게 찐하고 느끼한 쌍꺼풀도 이런 거부감에 큰 몫을 하고 있었다.
‘후우… 참자. 어차피 유사시를 대비한 중계기 정도로 쓸 거고, 클라리스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큰 의미 없는 놈이니까. 쓸모없을 것 같으면 중간에 저 X 같은 면상부터 갈아 버려야지.’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 했던가.
나는 참을 인을 두 개 반 정도 새겼다.
살인을 면하고 싶은 게 아니라 조금만 미루면 되는 것이니.
빠르든 늦든 저건 꼭 죽이고 만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마지막 인물을 바라봤다.
어떻게 보면 곧 있을 전투에서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를 맡을 예정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변수를 가진 자.
클라리스는 부유성 벽에 붙어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작은 틈이고. 그것을 막고 있는 유리도 완전히 투명하지 않아서 뿌옇게 흐려진 시야밖에 제공하지 않음에도 그녀는 하염없이 바깥을 본다.
구름 위를 날고 있는 거대한 구조물에 탄 것이 신기한 걸까.
표정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어깨가 살짝 굳어 있는 것을 보면 긴장을 한 것은 분명했다.
저 긴장이 생전 처음 겪을 전투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높은 곳에 오른 생물의 본능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목표 지점 도착까지 5분 12초가량이 남았음을 알립니다.
다른 이들을 살피며 긴장을 누그러뜨리기를 한참.
드디어 결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마리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굳이 나에게만이 아니라 부유성을 경유해 말한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기내 방송처럼 부유성 전체에 퍼졌다.
이곳에 모인 인원들은 물론이고 아래쪽 격납고에 해당하는 곳에 실린 알렉산더와 불가사리, 그 외의 수많은 몬스터들까지 소리가 닿았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나태의 특채자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까…….’
나는 이제야 아직도 저놈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태창을 열람해도 저놈이 빼앗아서 움직이는 육체 정보만 뜰 뿐이기 때문이다.
서로 통성명을 할 사이가 아니기도 했고.
물어볼까? 잠시 고민한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묻는 건 싫다.
괜히 위기를 앞두고 감상적인 분위기가 될 것 같으니까.
잠재적 적인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사내놈이랑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죽어도 싫다.
“할 수 있겠냐?”
유독 꼭지가 강조되는 복장을 앞세운 놈의 질문.
나는 눈이 따가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대답한다.
“해야지. 못 하면 안 되는 일이니까.”
“걱정 마라. 나는 이미 무인도로 도망갈 채비를 전부 해 뒀으니까.”
그거참 안심이 되는 소식이다.
실패했는데 살아남는다면 꼭 섬이란 섬에는 전부 부유성을 하나씩 박아 줘야지.
그렇게 다짐한 나는 내 식솔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작전에 대한 건 사전에 모두 전달해 놓은 상태다.
지금부터 할 말들은 하고 싶어서 하는 말들일 뿐이니 내 것이 아닌 자들에게는 할 필요가 없었다.
걱정 때문인지 물기가 어린 벨로제의 눈빛.
큼지막한 순한 소의 눈 같은 신비의 눈빛.
결의로 가득 찬 여울의 눈빛.
악마이고, 괴물이고, 유령이었지만 결국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다.
시스템이니, 던전이니, 능력이니 하는 것들에 묶여서 그렇다고는 해도, 나의 모든 것을 알고도 맹목적인 충성을 보내는 부하들.
죽으라 하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죽음을 받아들일 정도의 부하들을… 나는 너무 쉽게 손에 넣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니까.
“벨로제는 어차피 여기에 있을 거고… 신비, 여울.”
“예, 형님.”
“하명하십시오, 주군.”
“이미 얘기했듯이 이번 전투는 내가 주디스를 마무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전투다. 나와 클라리스, 용사와 성녀가 재앙을 물리치는 그림을 그려 나가는 거야. 너희는 그 배경이 될 거고.”
“알고 있습니다.”
신비와 여울의 대답이 정확하게 겹쳤다.
“전투가 시작되면 마리아의 모든 능력은 나를 보조하는 데 사용될 거고, 그렇게 되면 몬스터를 충원하는 건 벨로제의 역할이 되고, 투입된 몬스터들을 통솔하는 건 신비, 여울, 너희 둘의 역할이다. 지금 주디스 통제하에 있는 놈들은 주인이 강해진 탓인지 저번처럼 한 번에 쓸어 버릴 수가 없어. 그쪽을 잘 부탁한다.”
이미 브리핑에서 했던 것의 반복.
그럼에도 셋은 명령을 하나라도 놓칠까 간단한 내용을 새기고 또 새긴다.
“이번 일을 마무리한다고 모든 게 끝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야 했던 이유 하나는 해결된다. 피비린내가 싫은 건 아니지만, 기껏 사는 인생인데 다른 냄새도 맡아 봐야지. 그래서 나는 죽을 생각 따위 없다. 그리고 잃을 생각도 없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 전부 죽이면 남는 것은 우리뿐일 테니까. 알겠지?”
-현 시각을 기점으로 목표 지점에 도달했음을 알립니다.
다른 대답보다 빠르게 들린 것은 마리아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