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209
209
잠시 신성력을 행사하기 위해 자신을 지키고 있는 공간 밖으로 나온 클라리스.
돌아가는 상황이 위험한 것을 깨닫고는 바로 원래 있던 안전구역으로 들어갔다.
그걸로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들킨 순간 이미 위험에 노출돼 버린 상황.
지금의 주디스라면 저 정도 격벽은 종잇장처럼 찢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 줄기 유성처럼 붉디붉은 꼬리를 남기며 돌진하는 주디스.
‘아직은 잃을 때가 아냐.’
클라이맥스쯤 가서는 몰라도 전투 초반인 지금 클라리스를 잃을 수는 없다.
그녀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 전혀 모르기에 더더욱 그렇다.
어차피 본능적으로 거슬리는 것을 찾아 부수는 중인 놈이니 다시 내게 관심을 끌어오기만 하면 될 터.
나는 돌진하는 주디스를 정면으로 막아 섰다.
“하아압!”
지척까지 다가온 놈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담은 참격을 날렸다.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빛을 먹어치우는 검은색이 덧칠된다.
콰앙!
흑과 적이 만나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놈과 내 오라가 힘을 잃기는커녕 날카롭게 쪼개져서는 사방을 유린한다.
세열 수류탄 수십 개가 동시에 터진 것 같은 모습.
그러나 그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검은 기운이나 붉은 기운이나 날카롭게 흩어지는 조각 하나하나가 지독한 저주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파편이 날아가는 방향이 표시됐지만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궁여지책으로 최대한 파편에 노출되는 면적을 줄이는 동시에 치명적인 급소를 팔과 다리로 막는 선택을 했다.
파파팟.
“크읍!”
억눌린 신음 소리가 절로 이 사이로 샌다.
가린다고 가렸는데 운 나쁘게도 갈비뼈 사이를 파편 하나가 뚫고 지나간 것이다.
순식간에 호흡이 불편해진다.
젠장, 횡격막도 같이 당한 건가.
그래도 다행히 주디스도 멀쩡하진 않았다.
좋아, 이대로 잠깐 거리를 벌려서…….
나는 충격파에 저항하지 않고 일단은 거리를 벌리는 추진력으로 사용하려 했다.
그리고 의도 대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밀려나는 데 성공은 했으나…….
촤악.
뒤쪽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큽.”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억눌린 신음 소리. 돌아볼 것도 없이 클라리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것을 신경 쓰는 것이 느껴지자 마리아는 후방의 상황을 전면에 띄워 줬다.
‘젠장!’
혼전 중에 날아간 커다란 파편이 클라리스를 베어 버렸다.
오른쪽 승모근 부근부터 수직으로 배꼽 부근까지 갈라진 것이 보였다.
갈라진 상처에서부터 거미줄처럼 혈관을 타고 퍼지는 검은 저주.
그건 혈관을 따라 퍼지는 맹독과 닮아 있었다.
하필 베여도 내 것에 베인 건가.
주디스가 자신의 힘으로 내 저주에 저항하듯 클라리스의 신성력도 막아 보려고는 하고는 있다. 속절없이 저주에 잡아먹히고 있어서 문제지.
“상처라도 치료해!”
일단 상처를 봉합하고 방주의 기능으로 격리된 공간의 시간을 동결하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떨어졌던 거리가 다시 좁혀졌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주디스.
쾅, 쾅, 쾅.
동작이 큰 공격이 연속으로 들어왔다.
빈틈이 보이는데 정작 찔러 넣기가 힘들다.
부상 때문에 호흡이 조금씩 모자라서 그렇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살짝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더니 가슴 아래쪽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방주 안에 있는 자들 중에서 남을 돕는 능력을 가진 건 클라리스뿐.
“멍청이가!”
역시 그녀는 나를 치료하는데 신성력을 집중한 대가로 아물던 상처가 터지고, 저주가 목 바로 아래까지 잠식한 상태였다.
“마리아! 일단 얼려!”
-확인.
마리아가 클라리스를 격리한 공간의 시간만 분리해서 흐름을 늦췄다.
그걸 확인하기도 전에 주디스의 공격을 피하느라 바닥을 한 바퀴 구르게 됐다.
공교롭게도 몸을 일으켰을 때 정면에 얼음 인형처럼 굳어 있는 클라리스가 있었다.
두근.
그것을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처럼 크게 뛰었다.
머리는 더없이 냉정한데, 몸은 믿기 싫은 현실을 마주한 것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주디스의 눈, 코, 입이 뭉개졌다.
실제로 뭉개진 게 아니라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탓이다.
‘설마, 나 우나?’
정말이었다. 내 눈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이것만이면 나는 쌍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접전 속에서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집중력이 흐트러질 정도로 심장이 뛰고, 손발이 덜덜 떨리다니.
당장 용사의 껍데기인지 뭔지를 벗어던져야 할지를 고민했겠지.
하지만 몸은 슬픔에 절어서 절규를 하는데, 내 감정과 이성은 동시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온몸에 힘이 넘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를 감싼 오라가 한눈에 봐도 정의롭게 비치는 푸른색으로 변했다.
“끄으으!”
심지어 색만 변했을 뿐인데도 주디스의 기운과 호각을 이루던 내 오라들이 기세등등하게 놈을 밀어내는 게 아닌가.
나는 의기양양하게 검을 휘둘러 주변에 나부끼는 붉은 찌꺼기들을 쳐냈다.
“용사 각성이다, 이 씨발 새끼야.”
시종일관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은 전투가 스트레스는 스트레스였나 보다.
잔뜩 움츠리면서 물러나는 주디스를 보고 이렇게 속이 시원한 것을 보니.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입으로는 비웃음을 흘리다니.
내가 봐도 미친 새끼가 따로 없다.
그런데 미치면 좀 어때. 이길 수만 있다면 미치는 것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정신머리 하나 붙잡지 못해서 사람 말도 못 하는 놈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크아아앙!”
공간이 빨갛고 파란 오라로 물들었다.
놈이 휘두르는 것은 손이고, 내가 휘두르는 것은 검.
그러나 실질적인 무기는 그게 아니라 거기서 방출되는 오라였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것 같지만 나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유리하다.
소꿉친구의 희생에 분노하여 각성한 용사는 당연히 마왕을 무찔러야 한다.
“이게 용사다! 같잖은 재앙 새끼야!”
단단하게 나를 막아서고 있던 붉은 벽을 베어 내는 동시에 한 바퀴 회전하면서 깔끔한 발차기를 놈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컥!”
어딜 날아가려고.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놈이 날아가지 못하게 던전 함정을 세 개나 발동시켰다.
마법진이 생겨나고 마법의 사슬들이 놈을 묶는다.
“합!”
앞으로 있을 무산소 운동을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고.
쾅쾅쾅쾅쾅.
정신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푸른 조각과 붉은 조각이 용접할 때 튀는 불똥처럼 튄다.
더럽게 튼튼하군. 하지만 상관없다. 이대로 부수자.
한 호흡의 끝자락. 나는 기수식을 취하듯 검을 등뒤로 돌렸다가 온몸의 회전을 실어서 휘둘렀다.
방금 전 놈의 방어를 베어 냈던 것과 비슷한 위력의 일격.
나는 확신했다. 치명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놈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확신이란 건 전투에 있어서 가장 쓸모없는 것.
텁.
나에게 공격과 방어의 호흡을 모두 빼앗겨서 샌드백 신세가 됐던 주디스.
놈이 타오르는 것처럼 힘이 집중된 손을 들어 내 검을 움켜쥔 것이다.
꽈악.
‘무슨 힘이……!’
바위에 박힌 엑스칼리버를 뽑으려고 해도 이것보다는 더 움직여 주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강력한 힘이다.
번쩍.
주디스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이는 것을 본 나는 미련 없이 검을 놓고 몸을 뒤로 뺐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반격할 것 같더니 검을 잡은 채로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네가 뭔데… 네가 뭐길래 나를 이렇게 방해하는 거냐.”
주디스가 다시 말을 했다.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봄날 산들바람 같던 목소리가 지금은 지옥 밑바닥에서 사는 짐승이 그르릉대는 소리처럼 들린다.
분위기를 봐서는 매우 위험한 상태인 것 같은데…….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겠군.
나는 지옥 주머니를 열어서 새로운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런 나를 보고 있으면서도 주디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너희들은 모른다. 내 불행을 아무도 몰라. 내가 슬퍼할 때, 세상은 웃었다. 내가 힘들 때, 다른 이들은 즐거웠지. 내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누군가는 소중한 것이 생겨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내가 피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에도…….”
중얼거리는 놈의 몸에서 증기가 뿜어진다. 피가 증발하는 것 같았던 예전의 그 증기다. 그 증기는 갑각처럼 굳으며 놈의 육체를 감싸고 있었다.
콰앙!
입을 여는 순간을 노려 날린 회심의 일격. 그러나 푸른 오라는 놈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운에 먹혀 흩어진다.
상성이 다시 뒤집어진 것이다.
등골을 타고 한기가 흘렀다.
그러나 느끼는 것이 한발 늦었다. 아니, 검을 휘두르는 선택을 했을 때 이미 이 공격을 피할 기회를 상실했다고 하는 게 맞겠지.
파악.
번쩍이는 안광과 함께 빛살처럼 날아든 가시. 나는 그것에 오른쪽 어깨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몸을 비틀지 않았다면 조금 더 아래, 심장이 뚫렸을 공격.
“네놈도! 행복에 겨워 살았겠지!”
이미 인간의 흔적이 남지 않은 목소리. 폭사되는 재앙, 아니 분노의 사념이 나를 유린했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것들은 분노의 근원이 되는 기억들.
모친을 잃고, 어린 마음에 의지하고 사랑하던 하녀가 자신이 먹었어야 할 독을 대신 먹고 죽고… 조금이라도 정을 준 자들이 모두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모친이 죽었을 때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귀족들이 보였다.
하녀가 얼굴이 검게 변해 죽었다. 그러나 그녀의 동료들은 사흘이 지나지 않아서 웃으며 돌아다녔다.
나는 주디스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본다.
주디스는 자신이 불행했던 것보다 자신의 불행에 공감해 주는 이가 없는 것에 분노했다.
어설픈 위로는 더 큰 불행이 되어 자신을 괴롭히고, 죽고 싶을 만큼 슬픈 자신과는 달리 주변은 웃고 떠드는 이들로 가득했다.
왜 나는 이리도 슬픈데 저들은 저렇게 행복한가. 질투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주디스는 질투보다 분노를 택했다.
그런데 겨우 이런 이유로 저 정도로 분노하고, 저렇게 될 수 있는 건가.
하긴, 개 한 마리 죽은 걸로 조직 폭력배들 싹 죽이고, 킬러 조직이랑 싸우고, 종국에는 전 세계 킬러를 상대로 총질을 해 대던 놈도 있었지.
아니지, 지금 내가 납득을 하면 안 되지!
젠장.
저항하려는 용사, 침범하는 분노, 주디스의 분노에 공감해서 함께 분노하려는 자아, 그것을 뿌리치려는 나.
이런 것들이 범벅이 되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밖에서 쿵쿵거리면서 벽을 두드리는 놈들도 이런 식으로 지배를 당한 건가. 세상에 대한 분노에 미쳐서? 이런 미친 새끼한테 공감을 하는 바람에?
으득.
나는 혀끝을 깨물었다.
고통이 잠시 내 정신을 불러왔을 때, 어깨에 박힌 붉은 가시를 잡아 힘을 줬다.
“공감… 좋은 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얼굴 반반한 사내새끼한테는 공감이란 걸 해 본 역사가 없는 사람이다.
잡은 가시를 뽑는 게 아니라 더욱 깊숙이 꽂아 넣으며 휘저었다.
까드득 하며 뼈와 마찰하는 통증이 잡생각을 싹 몰아낸다.
어깨 쪽에 덧입었던 용사의 껍데기가 너덜너덜하다.
어설픈 용사의 운명. 그래, 다른 놈 운명에 기대어 결착을 내려고 했던 게 잘못이다.
백지장. 내 운명이 백지장이라고 했었지.
이제부터 그 백지장에 제대로 된 글자를 새겨 넣을 때다.
화악.
희미하게 흐르던 푸름이 완전한 심연에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