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214
214
“궤변이군.”
“궤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놈이 무언가를 노린다고 가정해 볼까요? 저라면 그걸 방해하기 위해서 이득이 없는 걸 넘어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해도 기꺼이 최선을 다해서 방해할 겁니다.”
“감탄스러우면서 칭찬하고픈 인성이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경우이지 않나.”
“물론 마몬 님도 저처럼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이득을 추구해야 하는 상인의 본분을 잊지 않으실 테니까요. 하지만… 제 원을 들어주신다고 해서 마몬 님께 손해가 발생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득이 적을 뿐,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말이죠.”
마몬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지팡이 손잡이 부분을 두드렸다.
톡, 톡, 톡.
처음에는 길었던 간격이 갈수록 짧아진다.
톡!
리드미컬한 손가락의 움직임이 절도 있게 끊겼다.
“일단은 자네가 감수해야 할 책임과 의무의 범주를 정하는 것이겠군.”
‘좋아. 절반 이상은 됐다.’
마몬의 대답을 들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의 발을 거래에 끌어다 담그는 것까지는 왔다.
하지만 여전히 마몬의 얼굴은 무표정을 넘어 불쾌한 기색이 만연하다.
결국 거래란 것은 실제로 서로 주고받아야 할 것을 주고받은 후에야 끝나는 법.
그 말은 지금부터가 더 머리 터지는 순간이라는 뜻이었다.
서로 차지해야 할 것, 내주어도 될 것, 양보할 수밖에 없는 것과 양보해선 안 되는 것을 가늠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자네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는 대신 내게 의탁하는 건 어떤가. 내 영향력 아래에서 지금의 자네에게는 과분한 대우를 약속하겠네.”
먼저 조건을 꺼낸 건 마몬 쪽이었다.
그러나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지옥의 일원이 되되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지옥 군주를 상대로 이렇게 배짱을 부리게 될 줄이야.
내가 나를 인질로 잡고 벌이는 인질극은 작두 위를 걷는 것 같아 심장에 해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서 밀리면 결국 종착점은 루시퍼의 부하 신세다.
뭐,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노리면서 치고 올라가는 맛이 있을 수도 있지.
시작점이 다를 테니 나중에 지옥에서 자리를 잡을 때도 유리할 수 있겠고.
하지만 나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면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으며 눈치를 보느니, 차라리 적당히 배불리 먹으면서 혼자 유유자적하는 편이 좋다.
나라는 놈은 용의 꼬리보다는 뱀 머리가 어울리는 인간이다.
“아주 복잡하게 일을 진행하는군. 그렇게 그 부분을 양보할 수 없겠다고 하니, 자네가 애매모호하게 표현한 우호적인 관계 부분을 조금 구체적으로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겠어.”
“어려운 조건이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군주들과의 줄다리기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란 것도요. 그러니 다른 부분에서는 최대한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아무리 상인이란 게 조금의 이득이나마 놓치고 싶지 않아 하고, 미래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정도 위치에 서게 되면 체면이나 자존심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지는 법이니 말일세.”
날카로운 눈빛이 살을 저미는 것 같다.
적당히 하지 않고 계속 배 째라고 들면 정말 배를 째 버릴 기세였다.
괜히 상처도 없는 배가 아리는 기분이다.
이런 때는 내 쪽에서 굽히고 들어가 줘야지. 굽힐 수 없는 부분을 꼿꼿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한쪽은 열심히 굽어져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는다고 해서 제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진 않을 겁니다. 그게 무엇이 됐든 최대한 마몬 님께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마몬 님에게 폐가 되는 일이라면 제가 포기하도록 하죠. 누군가의 편을 들어야 한다면 마몬 님의 편을 들 것이고, 반드시 누군가와 척을 져야 한다면 마몬 님 반대편에 선 자와 척을 지겠습니다.”
“흡족하지는 않군. 그런데 또 그 이상을 요구하자면 자네가 양보할 수 없다고 했던 조건에 위배되는 것들뿐이니…….”
마몬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약간 풀린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목소리도 꽤나 유해진 느낌이었다.
“도대체 얼마 만에 양보라는 걸 해 보는지 모르겠군. 이번에는 내가 물러나도록 함세. 자네 원대로 군주에게 속한 소유물이 아닌 독립된 지옥의 객체로서 인정하겠네. 아예 나와 자네 사이에 상호 불가침 조약도 맺어 주지.”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순순히, 그것도 내게 좋은 조건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마몬.
나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왜 이렇게 쉽게 물어나 주지?’
이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는가? 지옥에 있는 돌조각 하나까지 주인 없는 것은 없네. 일곱 군주들이 지옥을 찢어서 서로서로 가지고 있단 말일세. 그건 비단 서로에 대한 견제 때문만은 아니야. 그들은 여덟 번째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여덟 번째라 하면…….”
그러고 보니 아까 마몬은 내게 여덟 번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었지.
실낱같은, 이라고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그 여덟 번째가 내가 생각하는 것이라면 너무나 파격적인 소리다.
“무얼 모르는 척하는가. 일곱 다음이 여덟이지 않나.”
“저는 겨우 인간입니다.”
“곧, 이었던 게 될 예정이지.”
“아무리 그래도…….”
“레비아탄은 어느 세계의 작고 볼품없는 괴물이었지. 너무 못생겨서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 것에 절망한 레비아탄은 작은 것부터 삼켜 대기 시작했다더군. 세상 무엇이든 자신보다 아름다워 보이니 꽃이고 돌이고 닥치는 대로 삼켰고, 몸은 커지고, 삼킬 수 있는 것도 커지고……. 결국에는 그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삼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네. 그런 후에 공허를 떠돌다가 지옥해에 정착하게 된 것이고. 질투의 군주가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일단 시작은 작고 볼품없는 괴물이었어. 그에 비하면 자네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셈 아니겠나.”
“…삼키는 대로 덩치가 커지는 쪽이 훨씬 더 태생적으로 사기에 가까운 거 아닙니까?”
세계의 모든 것을 삼켰다는 건 자신이 태어난 행성은 물론이고, 종국에는 항성마저 삼켰다는 소리인데……. 그딴 게 가능한 놈이랑 비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마몬도 그런 것을 자각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낮게 웃었다.
“하긴, 지옥해를 강제 점거해서는 멋대로 영역을 확장한 괴물 놈이랑 비교하는 건 좀 그렇긴 하군.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레비아탄이 주인 없는 몸이었다는 게 중요하지. 딱 자네가 원하는 위치를 힘으로 가진 놈이 레비아탄일세. 주인 없는 지옥의 주민. 여덟 번째로 가기 위한 실낱같은 가능성의 시작.”
“그런 의미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진짜다.
그러나 마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가 얌전히 루시퍼의 아래로 들어갔다면 자네가 이루는 모든 것이 루시퍼의 것이 되었겠지. 그의 영향력은 훨씬 더 커졌을 게야. 자네는 지옥 내에서 다투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고 있는 악마이니까. 그러나 자네 조건이 수용된다면 자네가 정복해서 지옥으로 바꾸는 세계는 전부 자네 것이 되네. 이 정도 되면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지?”
“…왕의 명령을 받는 일개 장수가 아니라 개척자 혹은 정복자가 되겠군요.”
적당한 비유라는 듯 마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 자네가 말한 조건이 얼마나 위험한 바람인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나도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자유 의지를 보장받고자 했던 것이 이런 의미까지 있을 줄이야.
그럼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새로운 군주가 생겨나는 걸 막고 싶어 한다고 했는데, 그럼 마몬은 왜 내 조건을 들어주는 걸까?
그 의문은 떠오르자마자 해결됐다.
‘다른 세계를 지옥으로 만든다고 했었지. 그 전부를 다른 군주 한 명이 전부 갖게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건가.’
이런 생각을 확인하려고 들진 않았다.
상대의 마음을 전부 까 보려고 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알려 줄 만큼 알려 줬고, 양보할 만큼 양보했어. 그러니 자네도 약속을 지켜야 해.”
“물론입니다.”
“물론이어야지. 아니면 자네가 주인 없는 몸이란 게 밝혀질 테니까. 내 충직한 부하 노릇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다른 놈들이 의심을 하지 않지. 나야 이런 비밀 계약이 밝혀지더라도 감당할 수 있겠지만, 자네는 힘들걸?”
확실히 그래 보인다.
마몬이 말한 것들이 사실이라면 이 계약이 밝혀지는 순간 나를 공중분해 하려고 들 테니까.
잠깐, 그러면 이걸로 협박을 당할 수도 있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급히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보며 먼저 말을 한 건 마몬이었다.
“걱정 말게. 모든 계약의 기본 조건은 비밀 유지 서약이야. 내가 먼저 이 계약 내용을 유출하는 일은 절대 없을걸세. 감당을 할 수 있다고는 하나, 밝혀져서 좋을 게 없는 일이니. 다만 이야기했듯이 겉으로나마 충직한 부하 노릇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말인데…….”
말끝을 흐리는 마몬의 의뭉스러운 미소.
나는 그가 뒤에 말을 잇기도 전에 대충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랬듯이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정복할 세계에 빨대를 꽂으시겠다는 말씀이군요.”
“허허, 표현이 좀 거칠군. 빨대라니. 어디까지나 연막작전의 일환 아니겠나. 정복지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8대2 정도로 나눈다면 다른 군주들이 의심하지는 않을걸세.”
역시. 괜히 순순히 뒤로 쭉쭉 물러나 주던 게 아니었다.
이렇게 안 하면 루시퍼가 몽땅 가졌을 것을 기약도 없는 세월 동안 빨대를 꼽고 쭉쭉 뽑아 먹을 궁리를 하고 있었던 건가.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들은 이걸 위한 포석일 뿐, 마몬의 목적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눈빛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뭐… 어차피 다른 세계를 지옥화 하는 역할을 맡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기도 했고, 상상을 넘는 스케일의 일이라 어리둥절하긴 하다.
내가 얻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란 뜻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날치기당해도 좋다는 건 절대 아니지.
“역시 통이 크시군요. 겨우 5분의 1만 가져가시겠다니.”
“허허허허, 농담이 지나치군. 더 적게 가져가는 주인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네만.”
“저는 주인 없는 몸이 아니었던가요?”
“그건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어야 하는 사항 아닌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해야 하네.”
나와 마몬의 눈빛이 부딪쳤다.
역시 모든 계약의 마지막 고비는 비율을 정하는 건가 보다.
우리는 웃는 낯으로 검무를 펼쳤다.
하하호호, 하는 소리 뒤로 혓바닥이 칼을 휘두른다.
그 싸움의 대략적인 결론은 이랬다.
“좋네. 비율은 영토를 제외한 재화 부분에서만 6대4로 하는 걸로 하지.”
“부하인 척하는 대신 마몬 님의 후광을 빌려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할 겁니다.”
“그러도록 하게. 종국에는 아예 내 왼팔쯤으로 인식할 만큼 밀어주지. 하지만 그러려면 다른 이들도 납득할 만한 성과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 성과를 내는데 필요한 지원을 아낌없이 주신다면 얼마든지요.”
“걱정 말게. 100을 가져가서 101로 만들 수 있다면 내 전 재산을 가져다 써도 좋으니.”
6대4의 비율이 아쉽긴 하지만, 영토는 제외하고 나머지를 분배하는 것이니, 투자를 크게 받아서 지분을 나눴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루시퍼 밑으로 들어갔다면 그놈이 전부 삼켰을 것들 아닌가.
마몬이라는 연막도 얻고, 그의 후광과 지원도 얻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이런 결과까지 오는데 체감 시간으로 사흘은 떠든 기분이 들었다.
정신적으로든 체력으로든 한계란 뜻이다.
그래도 어찌 됐든 거의 마무리가 된 것 같으니까…….
“그럼 지금까지 나온 내용을 서면으로 정리하고, 제대로 강제력이 발휘될 계약을 진행하는 것만 남았군.”
씨발.
하마터면 육성으로 마몬의 면전에 욕을 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