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32
32
만투가 죽자, 놈의 견제로 부수지 못하던 부실한 성문이 얼마 안 가서 충차에 의해 부서졌다.
부서진 성문을 향해 돌격하는 병사들 뒤쪽, 최후방에서 돌격하는 기병들 사이에 부대장기가 흩날리는 모습이 보인다.
즉, 부대장인 스틸호크 자작이 직접 돌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뜻.
아무리 무력이 뛰어나더라도, 한 부대의 총지휘관을 맡은 인물은 절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그 개인의 활약이 전장에 미치는 영향보다 총지휘관이 쓰러졌을 때의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최후방에 있던 스틸호크 자작이 돌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지휘부가 이 공성전이 실질적으로 승리했다고, 점령 및 섬멸만이 남은 전투라고 판단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휘부의 판단일 뿐.
아직도 전장 한복판에 있는 나로서는 그 의견에 동조하기 어려웠다.
눈에 분노와 원망, 그리고 이글거리는 투지를 담고 밀려오는 야만족들.
전장에는 아직 숨이 막힐 정도의 열기가 가득했다.
쇠붙이와 흙먼지, 피가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찌르고, 내뱉는 숨에서는 단내가 풀풀 풍긴다.
이미 쌓였던 것과 실시간으로 쌓여 가는 네거티브 포인트로 생긴 능력치 포인트를 체력에 쭈욱 밀어 넣었다.
어차피 지금 내 염동력 수준으로는 있는 마력을 다 활용하지도 못하는 상황, 게다가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쓰러지지 않을 체력이었다.
“죽어라! 하얀 돼지!”
바로 앞에서 달려들던 야만족 하나의 목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나보다 머리 두 개는 커 보이는 새로운 놈이 달려든다.
“커억……!”
나는 새로운 무기를 꺼낼 것도 없이 달려들던 놈의 발아래에 있는 주인 잃은 날붙이를 들어 올려 찔러 버렸다.
그리고 죽음까지 확인하지도 못한 채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단 한순간도 쉴 수 없는 전투가 이어진다.
나는 그 와중에도 여유가 생기는 족족 눈에 띄는 부상자들, 특히 기사들을 주변의 시체로 덮어 버렸다.
이렇게 해 두면 다 살아남진 못해도, 전투가 끝나고 사제의 치료까지 받을 정도로 운이 따라 준다면 살아남는 놈들도 몇 명은 되겠지.
비교적 쉽게 충원이 가능한 일반 병사는 몰라도, 기사가 부상당한 상태로 방치돼서 죽는다면 전력 손실이 상당하다.
고쳐 쓸 수 있는 건 고쳐서 써야 다음 전투가 조금이라도 수월해지는 법.
짧지 않은 시간을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다 보니, 성벽은 거의 완전히 우리 차지가 됐다.
성문으로 진입한 병력도 상당히 거칠게 저항하는 야만족에게 고생은 좀 한 것 같았지만, 성이라는 방어 수단을 잃은 야만족은 압도적인 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사실상 공성전은 끝이 났고, 이어진 섬멸전은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전쟁터에서의 내 첫 전투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분명 만투를 죽이는 순간까지는 처음 겪는 전쟁터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냉정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로 이어진 전투는 어떻게 했는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얼마나 많은 적을 죽였는지, 도대체 내 온몸 곳곳에 난 상처들이 언제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고, 대충 시체로 덮어 놓았던 부상자는 중간부터 신경 쓰질 않아서 몇 명이었는지, 어디 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방금 전까지도 선명하던 숨 막히던 긴장감이 뿌연 안개에 가려진 느낌.
“우웨엑……!”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리엔은 완전히 탈진했는지, 속에 있는 것을 게워 냈다.
털썩.
나도 아군과 적군의 피로 흥건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졌다.
* * *
게펜성을 점령하고, 나와 리엔, 그리고 다른 부상자들은 회관에 급조된 의료 캠프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나도 꽤나 많은 자상으로 적지 않은 실혈을 겪고 있었지만, 실려 들어오는 병사들을 보니, 이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인 부상자들이 대부분이다.
손목이나 팔이 잘린 병사, 뭐에 맞았는지 얼굴 한쪽이 함몰된 병사, 그리고 가슴이 벌어진 채 실려 들어오다 죽어 버리는 병사까지.
마치 손가락 골절됐다며 온갖 비명을 지르며 응급실에 들어가니, 때마침 교통사고 환자가 실려 온 것을 보는 기분이다.
“어차피 저희 수준의 신성 마법으로는 큰 부상을 입은 자를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병사들을 바라보는 것을 봤는지, 나를 치료하던 수습 사제가 말했다.
아마 내가 죄책감 혹은 연민을 느낀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네 표정이 더 안 좋은 것 같구나.”
내 말에 수습 사제의 표정이 흐려진다.
이제 겨우 14살이나 됐을까 싶은 나이 어린 성직자는 표정을 감추는 것에 서툴렀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린 성직자는 나한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겨우 여섯 명밖에 되지 않는 사제, 그것도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수습 사제인 인력으로 모든 부상자를 돌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정된 자원인 신성 마법은 부상의 경중이 아니라 신분의 고하, 아니면 전력으로서의 가치에 따라 돌아가기 마련이다.
치료를 다 받아서 혼자가 된 내게 험악한 표정의 레온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도 전투 중에 부상을 당했는지, 옆구리에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루크, 너 이 자식,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크윽……!”
레온은 소리를 지르려다 옆구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어지간히도 흥분한 모양이다.
“여기저기 다치긴 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해 줘도 돼.”
“뭐……?”
레온은 내 대답을 듣더니, 이해를 못 한 채 벙 찐 표정을 지었다.
“내가 걱정돼서 이렇게 달려온 거 아니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레온이 당신의 말장난에 아주 크게 분노합니다. 900 네거티브 포인트를 획득합니다.]와우, 자판기가 한 번에 뱉은 포인트 최고치를 갱신했다.
“개 같은 말장난은 집어치워! 내가 묻는 건 만년 꼴찌나 하는 네놈이 어떻게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냐는 거다. 설마… 일부러 숨기고 있던 거냐?”
“숨기다니, 내가 뭐 때문에 도대체 뭘 숨겼다는 거야?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꼴찌를 하는 건 마법뿐이야. 다른 성적은 평범하다고.”
내 유들유들한 태도에 결국 레온이 폭발했다.
“그 마법에서 꼴찌인 새끼가 마법으로 적장을 죽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니, 애초에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다 거짓말인 것은 아니냐?”
내 형이지만, 더럽게 시끄럽고 멍청한 새끼군.
겨우 에슬란테 남작가의 후계자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것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소인배.
나는 자신이 안중에도 없는 것도 모르고, 혼자서 온갖 망상을 해 가며 쉐도우 복싱을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울 지경이다.
짜증은 났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다.
레온의 태도를 볼 때 심리적으로 완전히 궁지에 몰린 상황.
내 혼수상태를 야기했을지도 모를 용의자 중 하나는 완전히 검증하고 넘어갈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악다구니를 쏟아 내고 있는 레온의 어깨를 누군가가 잡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물론이고 대화 상대 또한 부상을 당해 누워 있는 상태입니다. 가정사에 개입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그로 인해 전투력 유지에 문제가 생긴다면 부대장님께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쯤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갑작스런 개입에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본 레온은 그 상대가 리엔임을 확인하자 기세가 팍 죽었다.
어느새 그녀도 치료를 다 받았는지, 내가 있는 곳에 찾아온 것이다.
엄연히 신분상 자신보다 위인 데다, 부대장인 스틸호크 자작의 딸인 리엔은 프로 소인배인 레온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상대일 것이다.
“그,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리엔 경.”
방금 전까지 미친개처럼 헐떡대던 레온이 바로 꼬리를 내리는 모습은 나뿐만 아니라 리엔에게도 상당히 인상 깊은 모습인지, 그녀의 눈빛에 옅은 경멸이 묻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레온도 그것을 느꼈는지, 애꿎은 나를 한번 째려보더니 급히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레온의 등이 한없이 처량해 보인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루크 경이 부끄러워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말을 들은 리엔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부끄러워해야 할 놈은 동생이 공을 세웠다고 독이 바짝 올라서 떽떽거리는 소인배, 머저리, 등신 새끼죠.’라는 말이 뒤에 생략된 대답일 것이다.
그래도 내 형제라는 것 때문에 배려한 것이겠지.
“나가기 전에 감사를 전하러 왔습니다. 루크 경이 아니었다면 제 첫 전장이 마지막 전장이 될 뻔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 리엔 경이 아니었으면 성벽 위에서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만투와 싸우면서 주변을 신경 쓰기 힘들었을 때, 리엔이 막아 준 공격들이 상당했다.
“그때는 제가 적장을 상대할 실력이 되지 않아 그렇게라도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먼 거리를 가로질러 일부러 저를 구해 주신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이 여자,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세다.
감사를 받는 입장에서 겸손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직진밖에 모르는 완고한 감사 표현이었다.
“그렇다고 치죠.”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런 겁니다.”
“…….”
지금 감사를 받고 있는 게 맞는 거지?
리엔의 태도가 워낙 완고해서 추궁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마치 강제로 입이 벌려져서 감사를 목구멍에 쑤셔지는 느낌.
“안나는 잘 지내고 있나요?”
나는 말을 돌리기 위해, 리엔과 처음 만났을 때 구해 줬던 소녀의 이름을 기억 저편에서 끌어와 물었다.
“아,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여기까지 따라오겠다고 하는 걸 말리느라 진땀을 뺐었죠.”
나는 겨우 감사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 *
전투가 끝났음에도 성안은 쉴 틈이 없었다.
부상자들에 대한 처치가 대충 끝나자마자 살아남은 야만족과 게펜성 주민들을 포박해서 분류하는 일을 했다.
야만족은 고문을 통해 정보를 캐내고 나서 노예로 팔릴 것이고, 강제성이 있었다고는 해도 왕국군을 공격하는 데 동참한 주민들은 엄격하게 따지면 반역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병사들은 포박된 주민들 중에 알몸으로 묶인 여자들을 욕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약탈이 금지된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얼마 전에는 자신들도 평범한 영지민이었던 징집병들이 같은 처지, 아니 더욱 비참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고 마음껏 강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는 모습은 참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부대들은 병사들에게 동기 부여와 사기 유지를 위해 승리 후에는 약탈을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스틸호크 자작은 같은 왕국민을 약탈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좋지만은 않군.”
스틸호크 자작의 판단은 인간적으로나 기사도적인 측면에서는 훌륭한 일이지만, 결과는 어떨까 싶었다.
약탈이라는 쾌락이 없으니 탈영병이 늘어날 것은 뻔했다.
불만이 많은 병사로 이뤄진 부대가 얼마나 잘 돌아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병사들이 포로들 사이에서 아주 어리지 않은 남자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스틸호크 자작이 주민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징병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 것이다.
약탈도 없고, 반역죄를 물어 노예로 팔려 가지도 않으니 분명 자비로운 처분임에 틀림없었지만, 기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시선을 돌리고, 당초 밖에 나온 목적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병장기의 산이 눈에 들어온다.
“구? 구구구!”
그리고 그 병장기를 뒤적이던 칼날이빨 비둘기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날개를 퍼덕인다.
그리고 그 옆에서 골라낸 무기들을 지키고 있는 그림자 마수까지.
내가 사용했던 무기들을 찾아 놓으라고 시키긴 했지만, 역시 수거한 건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뭐, 분실할 것을 각오했었기 때문에 잃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무기들을 사용하고 있으니, 별로 상관은 없었다.
지옥 주머니가 사출한 무기들을 자동으로 회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편리하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겠지.
“아, 공자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공터를 지키던 병사들은 비둘기의 반응으로 나를 발견하고는 부동자세로 경례를 올리며 용건을 물었다.
“내 무기랑 저놈들을 찾으러 왔네. 내 소환수들이라 말이야.”
병사들은 내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약간은 꺼림칙한 공포를 담아 그림자 마수를 쳐다봤다.
“구, 구, 구, 구.”
그런 병사들 사이를 지나 칠면조만큼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비둘기가 내게 다가왔다.
“…구?”
그러더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날카로운 이빨이 난 험상궂은 모습과는 다르게 귀여운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그럼 이놈들이랑 내 무기들을 가져가도 될까?”
“예, 물론입니다.”
병사들은 아주 반가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소환수라고 전달을 받았다고 해도, 자기들로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마수가 등 뒤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언제 발작해서 자신들을 찢어발길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 모습이 역력했다.
뭐, 내가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이들의 감정을 읽은 것은 아니다.
그저 네거티브 포인트가 알려 줬을 뿐.
나는 그림자 마수와 비둘기가 미리 찾아 놓은 무기를 지옥 주머니를 열어서 집어넣고, 그림자 마수를 내 그림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무기가 둥실거리며 떠올라서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고, 거대한 마수가 물에 녹는 것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병사들이 홀린 듯 바라본다.
비둘기는… 마음 같아서는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한번 소환된 몬스터는 던전으로 돌려보낼 수 없어서 일단은 데리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