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44
44
아가일 방벽은 지금까지 겪은 성들과는 아예 성질이 다른 요새였다.
거대한 산을 연상케 하는 높고 두꺼운 그 장벽은 장벽 자체가 하나의 성이었고, 건물이었다.
애초에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마저도 위에서 내려주는 도르래 없이는 올라갈 수 없는 진정한 철벽.
지상에도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통로는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양쪽을 잇는 통로일 뿐이다.
요새 안으로 들어가는 진짜 성문은 일반적인 성벽의 꼭대기 높이에 있는 미친 요새.
그것이 아가일 방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형적인 구조는 1왕자군이 보급로와 퇴로가 끊긴 상태에서도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되어 줬다.
포위를 당했지만, 합류해서 공격을 해야 할 아가일 방벽의 야만족들이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러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들어가기 어려운 만큼 나오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1왕자군이 포위망을 뚫기 위해 뒤를 보면 아가일 방벽에 있는 야만족들이 튀어나올 시간을 주게 되고, 뒤쪽의 야만족들은 1왕자군을 포위하고는 있지만, 아가일 방벽에 있는 야만족의 지원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눈치 싸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면, 한창 치열한 눈치 싸움을 하고 있는 세 개 세력을 멀찍이 떨어져서 관망하는 중이었다.
‘다른 지원군이 올 때까지 여유도 좀 있고, 형님도 버틸 만하신 것 같으니 조금 더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좀 쉬는 게 좋겠군.’
상황을 파악한 제이스 왕자는 저렇게 말하며 임시 주둔지를 꾸리게 했다.
이후로는 마법사들이 사역마를 통해 정찰을 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구구콘을 통해 바라본 전장은 그야말로 코미디 그 자체였다.
1왕자군이 슬쩍 포위망을 뚫어보려고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귀신같이 아가일 방벽에서 수십 개의 거대한 도르래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그러면 1왕자군은 화들짝 놀라서 도르래를 파괴하기 위해 아가일 방벽으로 다가간다.
물론 1왕자군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면 도르래는 귀신같이 안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다.
서로 화살조차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이런 촌극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 한심함에 한숨을 절로 나올 것 같았다.
나로서는 갑자기 생긴 많은 양의 포인트를 신중하게 소모할 수 있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게 고맙긴 하지만…….
즉,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이 묘하고도 한심한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제이스 왕자가 바라는 최고의 상황은 아가일 방벽에서 야만족들이 무사히 나와서 1왕자군과 야만족이 회전을 벌이는 것이겠지.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1왕자군을 아슬아슬하게 구하고, 주력이 나와서 전멸한 아가일 방벽을 비교적 손쉽게 차지하는 것이 이 비열한 계획의 전체적인 개요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계획과는 별개로 야만족의 움직임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불리해지는 것은 야만족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말고도 지원군이 도착할 테니까.
이미 이 전쟁은 사실상 야만족의 패배나 다름없는 상태.
저들은 1왕자군이 고립된 지금 어떻게 해서라도 결판을 내고 아가일 방벽만이라도 사수하던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살던 황무지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내 눈에는 시간이 끌리면 불리해질 야만족들이 오히려 시간을 지체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가만히 있기 심심했는지, 1왕자군은 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구구콘을 통해 본 아가일 방벽은 정말 특이하긴 했다.
나오는 것마저도 어려운 요새를 지을 생각을 하다니…….
덕분에 야만족에게 첫 번째 패배를 했을 때는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은 상상도 해 본 적 없을 것이다.
자신들을 지켜 주던 철옹성이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들을 가둔 우리이자 관이 될 것이라고는.
* * *
해가 저물자마자 달빛마저 등진 아가일 방벽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피이이잉.
1왕자 군영에서 쏘아 올린 조명 마법이 아가일 방벽을 잠시 밝혔다가 힘을 잃고 사라진다.
어둠을 틈타서 야만족들이 내려올까 겁을 먹었는지, 주기적으로 방벽에 빛을 비추며 확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아가일 방벽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림자 마수의 시야로.
이제 요새 안으로 들어가서 정찰을 하겠지만, 방벽 위에 올라선 것만으로도 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방벽 위에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것을 증명하듯 부러진 병장기와 까맣게 굳어 버린 핏자국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정작 시체는 한 구도 보이질 않았다.
시체들이 부패해서 생겨날 역병을 걱정해서 처리했다고 해도, 주변을 굴러다녀야 할 잘려 나간 사지나 손가락, 뜯겨진 머리카락조차 없었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현장에 오직 인간의 시체만이 보이질 않는 모습은… 묘한 이상함으로 다가왔다.
설마 그 많았을 시체를 깔끔하게 먹어 치우진 않았을 텐데…….
나는 찜찜한 의구심을 느끼며 내부로 진입했다.
그러나 묘한 위화감은 내부로 진입하고 나서 더 크게 다가왔다.
어느 곳엘 가나 처절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어디에도 시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아가일 변경백의 병사도, 야만족도.
심지어 그림자 마수의 시야가 아니었다면 사물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사위는 어둠 그 자체였다.
조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은 마치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야만족들이 지금 당장 생활하는 공간이 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그렇다면 도르래가 있는 곳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도르래를 꺼내고 집어넣던 야만족들이 그곳에는 있을 테니까.
나는 각 층을 천천히 훑으면서 목적지를 향해 내려갔다.
한 층, 한 층 내려갔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질 않는다.
이런,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워낙 아무도 없어서 방심하고 계단을 내려왔을 때 바로 앞에서 세 명의 야만족이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젠장, 사람이 안 보여서 위화감을 느꼈는데, 사람을 봤는데도 그 위화감은 더 커질 뿐 줄어들지를 않았다.
야만족 세 놈은 마치 탈색을 한 것처럼 머리카락부터 몸, 눈동자에 이르기까지 전부 회색빛이었다.
도대체 야만족이란 놈들은 외모가 평범한 놈이 없었다.
나는 세 놈이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금 움직여서 수십 개의 도르래가 있는 장소까지 도달했다.
거기에는 도르래가 설치된 창문마다 우두커니 서서 허공을 응시하는 야만족들이 있었다.
대략 합치면 50~60명은 될 것 같은 숫자.
아가일 방벽을 점령한 숫자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혹시 아가일 방벽에는 이 정도 숫자만 남아 있는 건가?
그렇다면 1왕자군은 완벽한 쉐도우 복싱을 선보이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만족이 시간을 끌기 위해서 저러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고.
그래도 아직 뒤지지 않은 곳에 야만족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나는 더 아래층을 향해 내려갔다.
미리 숙지한 바에 의하면 이 아래층부터는 병영과 창고가 주를 이루는 공간이다.
역시, 아래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빛이 흘러나오는 방이 하나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농담 하나 안 보태고, 이 답답한 요새에 잠입하고 처음 접하는 빛이었다.
나는 그 빛이 흘러나오는 방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림자 마수를 접근시켰다.
서걱.
순간 거대한 날붙이가 돌로 만들어진 벽을 뚫고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기가 무섭게 벽에 붙어 있던 그림자 마수가 아래위로 갈라진다.
나는 그림자 마수에게서 전송되던 화면이 사라진 허공을 응시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너무 놀라서 말을 잃는다는 게 이런 걸까 싶은 심정이다.
“파하……!”
무심코 멈췄던 호흡을 내뱉고 나서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뇌에서 접수를 시작했다.
적어도 밤, 그리고 어둠 속에 녹아든 상태일 때는 한 번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그림자 마수를 벽 뒤에서 거대한 칼로 돌로 만든 벽과 함께 양단해 버린 것이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고, 등에는 소름이 쫘악 훑고 지나간 느낌이다.
지금까지 노예처럼 충실하게 내 수족 노릇을 한 그림자 마수가 이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하다니.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만이라도 확인했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본 것이라고는 눈앞에 튀어나왔던 칼날뿐이다.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보기도 전에 이미 두 동강이 나 버렸지만.
헤테란 사원을 5단계로 업그레이드한 상태라서 잃은 그림자 마수를 보충하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번 정찰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찜찜했다.
이번에는 더 조심스럽게 숨어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림자 마수를 눈치챈 시점부터 야만족들의 경계가 더 삼엄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적어도 지금 당장 다시 시도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나는 밖으로 나와 멀리 보이는 아가일 방벽을 바라봤다.
방금 있었던 일 때문일까, 검고 거대한 벽이 한층 더 불길하게 보였다.
* * *
다음 날이 됐을 때도 내가 느낀 불길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나 말고도 정찰을 지도한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실패를 알렸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나는 안쪽으로 들어가서 훑어보기라도 했지만, 그들은 아가일 방벽 안으로 사역마를 집어넣는 것조차 실패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아가일 방벽에 접근한 사역마가 전부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심지어 공중을 날 수 있는 사역마들이나 소환수들을 보냈지만, 그것들도 아가일 방벽에 가까이 다가가는 족족 통제를 벗어나서 도망가거나 역소환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다시 밤이 되면 추가로 그림자 마수를 보내 봐야 할 것 같다.
그림자 마수의 가격이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정보 부족으로 된통 당하느니 이런 때에 과감히 투자를 하는 것이 최종적으로는 손해를 줄이는 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날이 저물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고, 그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던 나는 원활한 몬스터 수급을 위해 임시 주둔지 근처의 동굴을 찾아 던전을 만들었다.
소환을 하는 것보다 가까운 위치의 던전에서 직접 이동을 시키는 게 훨씬 포인트가 절약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업을 마친 나는 동굴의 원래 주인이었던 곰을 바라봤다.
이것도 가져가면 먹을 수 있을까?
고기라고는 나뭇조각이 아닌가 싶은 육포뿐인 생활이 지속돼서인지, 이젠 곰까지 먹을 것으로 보인다.
빨리 전쟁을 끝내고 돌아가던가 해야지.
이러다가 길바닥에서 이상한 것 주워 먹고 식중독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나는 곰의 유혹을 뿌리치고 임시 주둔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면 부드러운 빵에 햄을 넣고 꿀을 발라서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지.
길을 걸으며 돌아가자마자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리고 있는데, 앞쪽에서 요란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비상 상황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설마, 아직 대낮인데?
1왕자군이 견디다 못해 돌격이라도 감행한 것일까?
아니면 야만족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나?
어느 쪽이든 내가 충분한 정보를 모으기 전에 상황이 진행된 것 자체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나는 급히 구구콘의 시야를 확인했다.
“이런 미친!”
구구콘을 통해 확인한 아가일 방벽에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1왕자군도, 1왕자군을 뒤에서 노리는 야만족들도 아가일 방벽도 서로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그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휑해야 할 아가일 방벽 아래에 도열한 수천이 족히 넘는 군대는 그 합의 안에 없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저런 대규모 인원이 무사히 내려오도록 1왕자군이 방치했을 리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달리는 와중에도 끝없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고, 결국 내가 복귀하기도 전에 회색 파도는 1왕자군을 향해 거센 기세로 다가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