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48
48
잠시 숨을 돌린 나는 겨우 주변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카나야를 제외한 모든 것이 회색으로 물들고, 흩날리던 먼지마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 불길한 기운을 한껏 뽐내는 검은 문이 생겨났다.
나는 그 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카나야가 지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만큼 결판을 내면 무언가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반응이 즉각적으로 올 줄은 몰랐다.
지옥에서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건가.
일단은 내가 한 일이 달가운 일은 아닐 테지만, 루시퍼가 나와 한 계약도 있으니 나를 직접 해코지하진 못하리라.
내게 자유를 보장하고,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상황이 우스워서 웃음이 나온다.
기껏 기댈 것이 악마들의 대장과 한 약속이라니.
자조도 잠시, 검은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입가의 자조적인 미소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긴장감이 차지했다.
이윽고 열린 문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저건 또 뭐야?”
무엇이 나와도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다짐한 내 마음은 정확히 3초 만에 무너졌다.
문에서 걸어 나온 것은 우스꽝스러운 날개를 등에 붙인 여자였다.
어둠의 대마법사도, 지옥의 군주도, 대악마도, 하다못해 끔찍한 대괴수도 아닌 얼빵한 얼굴에 앙증맞은 뿔까지 달렸으면서 조잡하게 만들어진 천사 날개를 등에 붙인 여자라니.
“어, 어떻게 얻은 직장인데…….”
거기에 여자는 한술 더 떠서 쓰러져 있는 카나야를 보고 큰 눈망울에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
나는 훌쩍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여자를 향해 황당함을 가득 담은 눈빛을 보냈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죄, 죄송합니다. 아직 그쪽 판매원은 안 온 건가요? 이런 긴급한 상황에도 팔자가 좋네요. 역시 특채자가 살아 있으면 철밥통이라는 건가요. 저는 그 밥통을 잃게 생겼는데 말이에요…….”
“판매원이라고?”
나는 말을 하는 중간에도 훌쩍거리며 알아듣지 못할 넋두리를 이어가는 여자의 말을 끊고 물었다.
“어? 저는 음, 저기… 에 쓰러져 계시는 특채자님을 전담하고 있던 지옥 상점 방문 판매원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일단 매뉴얼에 적힌 대로 처리를 해야…….”
여자는 말끝을 흐리며 뭔가 책자를 꺼내서 훑어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적혀 있어요. 특채자들 간의 경쟁 발생 시 상품 판매 이외의 판매원들의 개입을 금한다. 이후, 결과가 나오는 대로 서로의 판매원은 협의를 거친 후 각각의 군주님들께 보고를 올리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다만,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으니 상황에 따라 대응하도록 한다, 라고…….”
매뉴얼을 읽어 내린 여자는 불안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군주님들이 보고 계시겠지만, 이게 절차라는 게 중요한 거라 어쩔 수가 없어요.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긴 하시겠지만, 일단은 판매원을 호출해 주시겠어요?”
“나는 판매원인지 뭔지는 얼굴도 본 적 없는데?”
“…….”
내 대답을 들은 자칭 방문 판매원이라는 여자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두 번 깜빡거렸다.
아직 뇌에 접수가 안 된 것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예에에에?”
고함을 질렀다.
“아, 아무리 이 자리가 철밥통이라도 그렇지. 그럼 지금까지 지옥 상점은 이용 못 하신 거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나는 다시 매뉴얼을 뒤적이는 여자를 그냥 보고 있었다.
내가 뭐 상황을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하지.
저 여자의 말대로면 나한테도 담당 판매원이라는 직책을 가진 잡부가 하나 따라붙는 게 정상인가 본데, 그 잡부가 여태 직무 유기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아니면 내가 매뉴얼에 적힌 ‘예외’이거나.
나는 자력으로 지옥 상점을 활성화하고 물품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별다른 제약 없이 이용해 왔지만, 카나야는 그게 불가능했나 보다.
역시 이 게임 화면 같은 것을 보는 능력은 나에게만 주어진 특성 같은 건가.
“아, 안 되겠어요. 이런 상황은 매뉴얼에도 없는 것 같아요. 일단은 돌아가서 보고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전에 일단은 특채자님의 동의가 필요하거든요.”
“무슨 동의?”
“특채자님께서 군주님들과 접촉을 해도 좋다는 동의가 필요해요.”
무슨 절차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아니, 그 이전에 내가 왜 그런 놈들을 다시 만나야 하는 건데?
아직도 루시퍼가 내 가슴을 꿰뚫은 것만 생각하면 진저리가 나는데 말이야.
확실히 루시퍼를 마주한다면 정보야 얻겠지만, 악마들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와 접촉하려는 시도를 하는 게 수상쩍다.
“내 동의가 없으면 만나는 것도 불가능한 건가? 그럼 내가 동의하기 싫다면?”
“그, 그런 경우는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요…….”
내가 당연히 동의를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걸까.
판매원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흐렸다.
“보고를 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나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놔. 난 분명히 내 멋대로 해도 된다고 너희들 대장 나리랑 얘기 끝났다고.”
“정말로 동의하지 않으실 건가요? 음… 일단 매뉴얼에는 없지만, 동의를 구하려고 한다는 건, 거절할 수도 있다는 거겠죠?”
처음에는 상황을 정리하는 것 같던 말투가 마지막에 가서는 내게 하는 질문이 되어 있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 그건 그러네요.”
음, 그래도 이 얼빵한 판매원이 빠르게 납득을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럼 이제 돌아가서 상황을 정리하기만 하면…….
“뭐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내 옆에 판매원이 쭈그리고 앉았다.
“예?”
“아니, 뭐하냐고. 왜 여기 쭈그리고 앉아? 나 돌려보내고, 너는 저 문으로 다시 들어가고. 그럼 이 상황은 마무리되는 거잖아.”
“저 이거 풀 줄 모르는데요? 그리고 그쪽 담당자도 못 만나고, 동의도 못 구했는데 어떻게 돌아가요. 최소한 이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그래도 최소한의 정상 참작을 기대할 텐데. 이러면 가중 처벌이라고요.”
“…….”
아니, 그걸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 거야?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이게 무슨 동의를 구하는 거야, 협박이지. 내가 동의 안 해 준다고 이러나 본데, 그렇게 되면 너도 여기 갇히는 거야.”
“예, 저는 상관없어요.”
“……?”
도대체 왜 은근히 반기는 것 같지?
나는 정신없어서 흘려들은 게 있나 싶어서 지금까지의 대화를 쭈욱 다시 생각해 봤다.
띨빵이가 여기에 있는 걸 반기는 이유.
그러고 보니 이 여자가 처음부터 울먹이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정상 참작, 정상 참작이라.
그리고 가중 처벌?
“혹시 이번 일로 벌이라도 받는 건가?”
내 말이 맞았는지, 판매원의 어깨가 흠칫, 들썩였다.
“…정확히는 벌을 받는 건 아니고요. 담당하던 특채자가 탈락했으니, 제 자리가 사라지는 거죠. 저희 같은 판매원이나 인간계를 들락거리는 하급 악마들은 원래는 다 인간 출신이거든요. 지옥에서 태어난 순혈들은 인간계로 오는데 제약이 커서 이런 편법을 쓰는 거예요. 그런데 워낙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요즘 취업난이 심해요. 다른 자리는 다 차 있고, 직장 잃으면 뭐, 다시 자리가 날 때까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죠.”
이건 뭐 주크박스가 따로 없네.
무슨 정보가 이렇게 술술 나와?
나는 지옥과 악마들의 생리에 대해 쏟아지는 정보들을 머리에 주워 담았다.
“원래 있던 곳?”
“하급 악마가 아니라 지옥에 떨어진 인간 신분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것도 동의를 해 주셔야 하지만요. 이대로 돌아가면 원래 있던 곳보다 훨씬 끔찍한 곳으로 갈지도 몰라요. 예를 들면 아스모데우스 님 영역이라던가…….”
판매원은 말하면서도 소름이 끼치는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 좋아. 그런 딱한 사정이 있다고 하니, 내가 묻는 질문에 성실히 대답한다면 동의하는 걸 고려해 보도록 할게.”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절 무슨 호구로 아시는 거예요? 저도 유황불 짬밥이 150년이에요. 고려해 보겠다는 말은 단물 쏙 빼먹고 내치겠다는 말이잖아요.”
음, 솔직히 띨띨한 호구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똘똘해서 놀랐다.
“질문 세 개만 받을게요. 대신 제가 대답해 드리면 확실히 동의해 주셔야 해요. 사실 저는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더 편하거든요? 후환이 두렵지만 않으면 여기 천년만년 있고 싶단 말이에요.”
이게 꼴에 악마라고 배짱까지 부리네?
나는 아예 배 째라는 태도로 나오는 판매원을 노려봤지만, 지금 당장 내게 뾰족한 수가 없는 게 현실이었다.
“좋아, 거래 성립이다. 그럼 질문하지. 네가 말하는 특채자라는 거, 나랑 저 여자 말고 다른 자들은 몇 명이나 되지?”
“죄송하지만 그런 정보는 제가 접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럼 당연히 이 짓거리의 목적도 모르겠네?”
“…네.”
“나한테만 접수원인지, 판매원인지 하는 잡부가 없는 건?”
“자, 잡부라니요! 으음, 그것도 저로서는 잘 모르겠는… 데요. 매뉴얼에도 예외라고만 적혀 있어서…….”
“…….”
우리 둘 사이에 짧지만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너도 어이없지?”
“죄송합니다…….”
판매원의 목소리는 거의 기어 들어가는 것처럼 작았다.
이거 완전 깡통 아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르면 나오는 주크박스 같은 입을 달고 있으면 뭐 하나.
머리에 들어 있는 정보가 없는 것을.
확인을 하려고 했을 뿐이지, 나를 제외한 특채자가 카나야 한 명일 가능성보다는 더 있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군주들이 왜 특채자를 여기, 메드세디아에 풀어놓았는지 짚이는 것은 몇 가지 있었지만, 그건 결국 내 추측일 뿐이고…….
어느 쪽이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나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일이 진행될지 모른다는 게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제기랄, 결국은 이번에도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나.
“그 등에 달린 조잡한 날개는 뭐야?”
“그것도 질문으로 치는 건가요?”
“너 진짜 양심 없냐?”
내 어이없는 표정에도 판매원은 뭐가 자랑스러운지 콧대를 세웠다.
“악마에게 양심이 있냐고 물으시다니, 어리석으시군요.”
“어, 그래. 없네, 없어. 양심도 없고, 정보도 없고, 눈치도 없고, 미드까지 없네.”
“미, 미드가 뭐죠?”
“알 거 없고, 질문에 대답이나 해. 그 웃기지도 않는 날개는 도대체 뭐냐?”
판매원은 자신도 그게 부끄러운 모양새라는 걸 아는지, 날개를 주섬주섬 떼어 내서 어딘론가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저, 저도 이런 거 달고 싶지 않았어요. 근데 저희 특채자님이 자신이 계약한 존재가 신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애초에 군주님들이 속여서 계약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건데, 제가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게 이래 봬도 잘 꾸미면 진짜 속아 넘어갈 만하거든요? 급하게 나오느라 제대로 준비를 못 해서 그런 거예요.”
“왜 내가 이길 수 있었는지 알 것 같다. 그런 거지 같은 변장에 속는 머저리한테 내가 지는 게 더 이상하지.”
“진짜 너무하시네요.”
너무한 건 네 변장 도구겠지.
그래도 조잡한 날개 이야기를 한 것치고는 쓸 만한 정보가 하나 굴러왔다.
악마 군주들이 특채자로 적합한 사람을 꾀어내기 위해서 신을 자처하기도 한다는 것.
내가 카나야에게 지옥을 언급했을 때 신을 운운하며 보인 반응들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건가.
이번에는 뭐를 물어야 하나.
중요하거나 민감한 정보를 알고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설령 순진한 척하면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내가 강제로 정보를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남은 두 개의 질문을 소비할 질문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는 싫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정말 궁금해지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원래 인간이었다면 이 여자는 왜 지옥에 갔을까?
“넌 무슨 짓을 했길래 지옥에 떨어진 거야?”
“살인이요.”
대답은 질문이라는 동전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돌아왔다.
“이제 하나 남으셨어요.”
쿡 하고 찌르면 묻지 않은 부분까지도 줄줄이 나오던 대답이, 이번만큼은 짧고 간결했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지만, 나는 원래 남의 사정에 관심을 잘 두지 않는 타입이다.
“이름.”
“네?”
“네 이름. 이게 마지막 질문이다.”
판매원은 내 질문이 의외였는지, 또 얼빵한 표정을 지었다.
“베, 벨로제예요. 성은 없고요. 그런데 이런 건 그냥 물어보셔도 대답해 드릴 수 있는데요.”
악마라서 양심이 없다고 자랑스레 말하더니, 이런 부분에서 그러면 설득력이 떨어지잖아.
“실속 있는 질문은 하나도 대답 못 하잖아? 나도 이러고 있는 거 지겨워. 동의인지 뭔지 해 줄 테니까, 날 돌려보낼 수 있는 놈한테 빨리 보고하고 상황 마무리해.”
“아, 알겠습니다. 분명 동의하신 거예요? 그럼 저 갔다 옵니다? 정말로요?”
벨로제는 내 입에서 떨어진 동의라는 단어를 박제라도 할 것처럼 몇 번이나 뒤돌아 확인을 거듭하면서 검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벨로제가 문에 다가간 순간.
퍼억.
“꺄아악.”
벨로제가 갑자기 열린 문에 코를 얻어맞고 뒤로 나자빠졌다.
아무리 멍청하고 띨빵하다고 해도 그녀가 자신이 연 문에 맞고 날아간 것은 아니었다.
“역시 오만하기 짝이 없는 루시퍼가 고른 놈답군! 하찮은 벌레나 다름없는 것이 지옥의 대군주를 이렇게 기다리게 만들다니.”
벨로제를 날려 버린 자는 깡마른 몸을 가진 노인이었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이 왜소한 몸을 하고 있는 노인에게서는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 그가 분노와 짜증을 토해 내자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간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벨로제는 코를 거하게 얻어맞은 통증도 잊었는지, 바짝 엎드린 채 벌벌 떨기 바빴다.
그 반응만으로도 이 노인이 벨로제보다 훨씬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짜증을 내고 그래? 이렇게 신중하니까 네가 선택한 후보를 이긴 거고, 그러니까 내가 뽑은 거야. 자신의 안목이 형편없었을 뿐인데 엄한데 짜증을 내면 안 되지. 안 그래, 바알?”
깡마른 체구로 주변에 분노를 토해 놓던 노인과는 상반되는 능글맞은 목소리가 검은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매력적이고, 위험하며, 한없이 검은 목소리.
저런 목소리로 유혹을 했으니 선악과를 안 먹고 배길 수 없었겠구나, 하고 납득하게 만들었던, 평생을 살아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목소리기에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멋들어진 파란색 정장으로 몸을 감싼 미남자, 루시퍼가 내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