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79
79
루클랜드 공작 가문의 봉신이라는 것은, 결국 1왕자인 메이슨을 지지하는 귀족들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캐시 하이어는 나와 비슷한 또래에 같은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이유로 선택된 일종의 메신저였다.
1왕자 진영에서 내게 보내는 ‘예쁜 편지’인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꼬장꼬장한 늙은 귀족 입에서 나오는 걸 듣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아무리 예쁜 여자와 마주 앉아 있다고 해도 딱딱한 이야기를 마냥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대충 이해했습니다. 빠르게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확실히 이런 얘기는 돌려서 말하는 게 더 실례가 되겠군요.”
캐시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중립을 지켜 주세요.”
캐시는 언젠가 제이스 왕자에게 들었던 것과 닮은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만족과의 전쟁으로 아가일 변경백께서 무너진 이상 왕좌를 놓고 벌어질 미래의 싸움은 끝났습니다. 저들은 힘의 구심점을 잃었고, 이대로 세월이 흘러 누군가 왕관을 물려받아야 할 때쯤이면 좁힐 수 없는 격차가 나 있을 거예요.”
“구심점이라…….”
힘의 구심점.
캐시는 지금, 2왕자 진영의 힘의 구심점은 제이스 왕자가 아니라 아가일 변경백이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맞는 얘기였다.
지금이야 2왕자 진영에 몸을 담았던 귀족들이 완전히 흩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눈치싸움을 하고 있을 뿐, 서서히 이탈자가 생겨날 것이다.
배당률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이미 물이 차오르는 배에 계속해서 남아 있고 싶어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제이스 왕자는 새로운 변경백을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로 앉히면 된다고 했지만, 글쎄… 그리 희망적인 관측은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빈자리를 차지한 새 변경백이 과연 제이스 왕자의 편에 설까?
당장 자신의 목이 덜렁거리는 와중에 말이다.
이렇듯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야만족과의 전쟁으로 제이스 왕자가 얼마나 큰 걸 잃었고, 반대로 막바지에 거하게 병신 짓을 한 1왕자 메이슨이 얼마나 큰 걸 가져갔는지 알 수 있었다.
변수만 없다면 끝난 싸움이다.
그리고 이 얘기를 내게 하는 이유는… 그 혹시 모를 변수 중 하나로 나를 지목했다는 뜻이 된다.
아니, 정확히는 ‘루크 에슬란테’가 아니라 ‘비올카 이리오스의 제자’겠지만 말이지.
역시나 내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타이밍 좋게도 캐시의 입에서 내 추측을 긍정하는 말이 나왔다.
“당신이 2왕자 진영에 선다고 해서 비올카 님이 움직일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자들이 아주 많은 게 현실이죠. 그들은 당신에게서 비올카 이리오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알마이어의 허상을 볼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공백이 되어 버린 힘의 구심점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이 말입니까?”
캐시는 고개를 끄덕여 내 말을 긍정했다.
하지만, 그 말대로라면 1왕자 측에서는 전혀 손해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대로라면 차라리 허상에 몰려들어서 모조리 타 죽는 게 그쪽 입장에서는 깔끔할 것 같은데요. 잠재적인 정적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기회 아닙니까?”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었나?
캐시의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겠죠. 알마이어의 허상에 속아 넘어갈 멍청이가 2왕자 쪽에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
동요 하나 없는 표정은 합격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짧지 않은 침묵은 불합격이지.
이들은 물론이고, 왜 라메리안의 귀족들이 알마이어를 두려워하는지는 아주 유명한 일화를 통해 대충 알 수 있다.
대략 12년 전, 아직 어린아이였던 카이네는 카마로와 함께 하녀 한 명을 따라 바깥 구경을 나왔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잠시 카이네와 카마로를 놓친 하녀가 우왕좌왕하며 두 아이를 찾는 중에 마차에서 내리던 귀족 도련님과 부딪힌 것이다.
신사답게 하녀를 일으켜 주고 웃으며 넘어갔으면 참 좋았으련만… 그 머저리는 머리끝까지 귀족의식이 꽉 들어찬 놈이었고, 그 자리에서 하녀를 때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굉장한 대사가 나오는데, 뺨을 맞고 쓰러진 하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위험합니다, 그만 때리세요, 위험해요.’라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당연히 상대는 어이가 없으니 화가 더 났을 테고, 분노에 찬 발길질을 시작했고, 세 번째 발길질을 하던 중에 ‘가루’가 돼 버렸다.
말이 가루지, 길거리 한복판에서 사람 하나가 핏물이 걸쭉한 육고기 비빔 소스가 되어 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범인은 자신이 아끼는 하녀가 맞는 모습을 보고 눈이 돌아간 카이네였다.
그렇게 갈려 나간 머저리는 소니어 백작 가문의 장자였고, 소니어 백작은 당연히 또 눈이 돌아가서 알마이어에 격하게 항의했다.
적당히 사과만 요구했으면 또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아들을 잃은 아비는 이성을 잃고 하녀의 목과 카이네의 오른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아마 하녀의 목은 별 가치가 없으니 내어 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손 정도는 잘려도 바로 수복이 가능하니까, 하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흘 뒤, 소니어라는 성을 공유하는 자들은 목과 오른손이 잘린 상태로 자신들의 저택 앞마당에 전시되는 신세가 됐다.
흥미로운 괴담 전집이라는 책에 실린 이야기다.
문제는 다른 에피소드는 전부 괴담이지만, 이것만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상기한 나는 앞으로는 카이네에게 조금만 까불자고 다짐했다.
“그쪽에 가담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중립을 지켜 달라고 하는 건 결국 그 허상을 진영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뜻 아닙니까? 진영 내에서 루클랜드 공작님의 독보적인 카리스마와 영향력에 금이 가면 안 되니까요.”
“확실히 상황을 보는 눈이 날카롭다는 건 알겠네요. 하지만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정치를 하려면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을 할 줄 알아야 하니까.”
“정치를 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사실 지금 이 대화는 아주 무용한 대화입니다. 저는 누가 왕위에 앉든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나는 캐시의 지적을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내 진심이 담긴 인정에도 캐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다.
해서, 나는 다분히 정치적인 그녀에게 신뢰를 줄 만한 정치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로 했다.
내가 권력이나 정치판에 별로 흥미가 없다는 확신을 줄 만한 것으로.
“저에 대해서 뒷조사를 했을 테니 에슬란테 남작가의 후계 구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파악을 했겠죠?”
역시 뒷조사는 껄끄러운 주제여서인지 캐시는 침묵했다.
안 했다고 하는 건 너무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고, 했다고 인정하기에는 뻔뻔함이 부족한 거겠지.
하지만 나도 그냥 물었을 뿐, 했을 게 뻔한 것으로 그녀를 압박하려는 게 아니었다.
“가주 자리는 양보할 겁니다.”
“네?”
이번에는 캐시도 침묵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미 반 이상, 아니 사실상 거의 다 넘어온 상태에서 왜…….”
확실히 최근까지는 에슬란테 남작이라는 직위를 다른 이에게 넘길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암살 사건을 겪고 나서부터 조금씩 고민하던 것이었고, 지금은 반 이상 결론을 내린 상태다.
첫 번째 이유는 남작이라는 자리가 내게는 별 가치가 없다는 것.
그나마 가치가 있는 건 루비 광산인데… 그것도 광산의 지분을 나누면 될 일.
작위를 포기하는 대신 광산 지분을 더 많이 가져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이자 가장 큰 이유는 루시아다.
암살 사건을 겪으면서 이미 큰 상처를 입은 루시아에게 또 하나의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레온이 내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해도,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다 보면 결국 내 손으로 레온을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궁지에 몰린 레온이 선을 넘는 순간, 살려 둔다는 선택지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루시아에게 보여 주느니 ‘남작’이라는 타이틀은 레온에게 넘겨주는 게 낫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진정한 권력이 ‘작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래, 극단적인 예로서 비올카는 라메리안 왕립 아카데미 종신 교수라는 직위를 제외하면 작위조차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귀족도 아닌 것이다.
또 알마이어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공작’이라는 작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건 모래성 위에 쌓아 올린 허울뿐인 권력이 아니라, 그런 본질적인 힘이다.
“저한테는 남작이라는 작위가 별로 필요가 없으니까요.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인지라.”
“솔직히 그렇게 욕심이 없는 분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믿기 힘드네요.”
“욕심은 흘러넘칩니다. 다른 사람들과 가치를 두는 곳이 조금 다를 뿐이지.”
캐시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어설프게나마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누군가에게 전달받아 달달 외웠을 나에 대한 자료를 상기한 거겠지.
내가 가치를 둘 만한 다른 무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캐시가 납득한 지점이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평소에 던전을 들쑤시고 다니는 부분에서 납득하지 않았을까?
모험가 흉내를 내는 도련님은 흔치 않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마법이라는 답을 도출했을 수도 있고.
그게 무엇이든 앞으로 나를 귀찮게만 하지 않으면 된다.
내 일만으로도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괜히 나를 견제할 집단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된 것 같은데요.”
“…충분해요. 하신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면 말이죠.”
“사실입니다, 지금은.”
“지금은……?”
뒤를 흐리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확고합니다. 선악은 중요하지 않아요. 잘해 주면 좋은 사람, 거지같이 굴면 적. 그쪽에서 거지같이 굴지만 않으면 적이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조금은 무례할 수 있는 말이었음에도 캐시는 활짝 웃어 보였다.
“여기 요리 참 맛있죠? 예약 한번 하려면 한 달이 넘게 걸린다니까요? 하지만 루크 님은 특별히 언제 오셔도 식사하실 수 있도록 얘기해 놓겠습니다. 이 정도면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캐시의 말을 들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 얘기를 듣고 보니 루시아가 좋아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충분합니다.”
차갑지 않은 웃음과 함께 대답한 나는 내려놨던 스푼을 들었다.
한 입도 안 먹고 일어나기엔 아까운 디저트였다.
* * *
아카데미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크리스의 강도 높은 심문을 겪고서야 겨우 혼자가 될 수 있었다.
FBI 취조실을 넘어 CIA 지하 고문실을 방불케 하는 강도 높은 심문이었고, 수사관인 크리스의 열정은 영화 속 정보 요원의 그것을 뛰어넘었기에 나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나는 의자에 몸을 던져서 반쯤 누운 상태가 돼서야 땅속에 묻어 두고 온 신비가 떠올랐다.
캐시를 만나러 가려는데 계속 시끄럽게 종알거려서 홧김에 묻어는 뒀는데…….
뭐, 하루 정도 땅속에서 잔다고 죽지는 않겠지.
귀찮음에 굴복한 나는 신비를 구조하는 일을 내일로 미뤘다.
“으으윽……!”
너무 늘어져서 의자에서 주르륵 미끄러진 나는 책상을 부여잡고 기어올랐다.
그러자 책상에 쌓인 자료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아, 오늘이 모험가 조합과 상인 조합에서 보고서를 올리는 날이었구나.
이미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살펴본다고 해서 지옥 특채자의 흔적을 추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긴 했지만, 자료는 계속해서 받아 보고 있었다.
조금 비싼 신문을 구독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이제는 반쯤 취미 생활이 되어 버려서 주기적으로 안 읽으면 아쉬울 정도가 돼 버리기도 했고.
나는 가장 위에 있는 한 장을 들어서 의자도 아닌 바닥에 드러누워 읽기 시작했다.
상인 조합에서 올린 자료는 시작부터 스펙타클했다.
첫 소식은 음경 확대 시술을 해 준다며 피험자를 모집한 마법사에 대한 소식이었다.
모집에 응한 피험자가 무려 귀족 남성, 그것도 10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일단 ‘확대’에는 성공을 했다.
하지만 음경이 허벅지보다 두꺼워졌다는 건 ‘확대’라기보다 사실상 고자가 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역시나 피험자인 귀족 남성 10명이 피눈물을 흘리며, 도주한 마법사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한다.
마지막에 첨부된 잔혹한 마법사의 몽타주로 훈훈한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음, 정말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군.
이 맛에 구독을 끊을 수가 없다니까.
그렇게 한참을 뒹굴거리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이 바로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시험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