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80
80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다.
참 병신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을 하고 있는 내가 병신이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구제 불능의 쓰레기다.
전쟁으로 인해 일정이 변경된 것이 한몫을 했다 해도 어떻게 시험 당일까지 시험의 존재를 잊고 있을 수가 있는 걸까.
이렇게 자조를 하면서도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출석을 제대로 하지를 않으니 제대로 통보를 받을 수도, 통보를 받지 않았을 때 알려 줄 친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정말 성적이란 것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바닥을 치는 건 피하고 싶은 게 인간의 이기심이었다.
무엇보다 꼴찌를 했다는 소식을 에일라와 루시아가 알게 됐을 때 얼마나 민망할지…….
그리고 카이네는 이번에야말로 웃다가 죽으려 하겠지.
해서, 나는 눈앞의 시험지를 열심히, 정말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보기만 한다고 답이 나오면 누가 공부를 하겠는가.
당연하게도 시험지에 적혀 있는 문제의 답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던전, 그리고 정보 수집을 제외하면 지식을 익히는 데 열을 올리고는 있지만, 아카데미의 수업 수준은 그런 수박 겉핥기식으로 얻은 지식으로 커버가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일반 상식 책을 읽고 정치학 박사 과정 논문을 이해하려는 것과 비슷한 짓이었다.
그나마 비올카가 가르치는 마법 상급반은 내 전공인 만큼 출석도 가장 신경 썼고, 공부도 열심히 한 편이다.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나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의 절반 이상은 공통 학문이다.
그리고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과목은 천문학.
나는 20년을 넘게 살았던 지구 위에 떠 있는 별자리도 제대로 아는 게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메드세디아의 하늘에 뜬 별들의 이름을 묻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그냥 객관식은 한 번호로 찍고, 주관식은 아예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1번 문제의 답을 1번으로 찍으려는 순간.
-어? 마스터, 그거 2번이에요.
벨로제, 아니 여신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라고?
-그거 2번이라고요. 첼린 교수님이 시험에 나올 거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 문제잖아요.
-첼린 교수님……?
-네, 천문학 교수님이요. 모르세요?
-…….
그래, 솔직히 천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이름이 첼린이란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창피함보다도 벨로제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네가 그런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가끔 마스터가 출석할 때 같이 공부했거든요. 여기 있으면 할 게 없어서 심심하단 말이에요.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군.
내가 가~ 끔 출석해서 멍하니 던전 창을 바라보며 딴짓을 할 때, 벨로제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는 건가.
-흠흠, 혹시 다른 문제도 아는 게 있어?
이게 비겁한 짓이란 건 알지만, 하루에도 내 던전에서 죽어 나가는 모험가가 몇 명이던가.
이미 난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쓰레기였다.
이미 구제 불능의 악당인 내게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모든 학생들의 문제가 제각각인 현재, 내게 방법은 이것뿐이다.
-…….
그런데 정작 내 질문을 받은 벨로제에게서 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역시 아무리 나 대신 공부를 했다고 해도 워낙 가끔 들어왔던 수업.
아는 게 많을 수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려 했다.
그래, 혹시 카이네가 웃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말도 안 되는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하는데, 죽음을 각오한 장수 같은 비장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렸다.
-…보너스 지급,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외출 허락 및 간식 제공을 요구합니다.
몰라서 대답을 안 한 게 아니었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 밖으로 소리를 낼 뻔했다.
감히 나를 상대로 협상을 하려고 들다니, 많이 컸군, 모지리 악마.
하지만… 지금 당장 아쉬운 건 나였다.
-…좋아.
-야, 약속하신 거예요?
호기롭게 협상을 제안한 주제에 겁은 나는지 벨로제는 목소리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단, 보너스는 점수가 얼마나 나오느냐에 따라서 차등 지급한다. 간식의 질도 마찬가지야.
-2번 문제는 3번, 4번 문제는 1번이에요. 그리고 6번 문제는…….
내 확답이 떨어지자마자 벨로제는 답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중간에 문제를 건너뛰는 것은 아마도 내가 빼먹은 날 언급됐거나 벨로제도 기억을 못 하는 것들이겠지.
그래도 벨로제는 내 끔찍한 출석 일수에 비하면 꽤나 많은 문제의 답을 알려 줬다.
* * *
“으흠, 흐흐흥.”
벨로제는 콧노래를 부르며 내가 준 빵과 과자를 꾸역꾸역 입에 넣고 있었다.
아주 얼굴 근육이 전부 사라진 것처럼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보기 나쁘지는 않았다.
“마스터, 다른 시험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마스터를 대신해서 제가 전부 풀어 드릴 테니까요!”
“…….”
거만하게 콧대를 세우며 잘난 척하는 벨로제를 마음껏 구박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나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벨로제보다 머리가 나쁜 쓰레기였으니까.
벨로제보다 아는 게 적다는 건 다른 말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하라는 뜻이다.
“후후후, 이제야 제가 마스터의 참모라는 게 드러나는군요. 하긴, 마스터는 싸울 줄만 아시지, 지략이란 건 저 같은 엘리트 악마한테 어울리는 말이니까요.”
“벨로제.”
“네?”
나는 여전히 방실방실 웃는 벨로제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선이라는 게 뭔지 알아?”
“선이요? 나쁜 거잖아요. 저는 악독한 악마니까요.”
내가 말한 선을 선과 악으로 잘못 이해한 벨로제는 나름 험악해 보이기 위해 인상을 쓰며 자신이 악마라는 걸 강조했다.
하지만… 벨로제, 넌 틀렸어.
내가 말한 선은 그게 아니야.
“아니야. 선이란 아주 중요한 거야. 네가 뒤지지 않도록 안전 구역을 표시해 주는 게 선이거든. 너는 지금 그 선을 넘으려고 하는 중이고.”
“…….”
벨로제는 이제야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는지 슬슬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늘 있었던 시험은 천문학 한 과목. 네가 푼 문제가 전부 맞는다고 해도 겨우 반타작……. 이해해. 내가 가뭄에 콩 나듯 출석할 때만 귀동냥으로 듣고 그 정도 성과면 대단한 거지.”
나는 말을 하는 동시에 더욱 진하게 웃으며 염동력을 사용해서 벨로제 옆에 책을 잔뜩 쌓았다.
그리고 그 책 더미를 가리키며 말한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8할 이상 맞출 수 있겠지? ‘참모’이고 ‘지략가’니까.”
내 말이 끝나자, 벨로제는 주섬주섬 먹던 빵과 과자, 그리고 책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하하…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네요. 주, 준비 열심히 해서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뒤뚱거리며 작은 구멍 안으로 책을 욱여넣고 자신의 몸도 욱여넣는 벨로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사실은 포기한 시험을 반타작이나마 하게 해 준 벨로제에게 고마웠지만, 이상하게 벨로제를 보고 있으면 괴롭히고 싶어진다.
뭔가 타격감이 찰지다고 해야 하나.
내 성향이 아주 조금 그런 것을 즐기긴 하지만, 벨로제는 특히 더 찰지다.
* * *
“죄, 죄송해요…….”
벨로제는 내가 건네준 과자 상자를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8할 이상을 맞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 때문에 겁을 먹은 것 같다.
뭐, 천문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들은 오히려 30~40점 수준에 그쳤으니 망했다면 망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딱히 벨로제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점수를 더 받자고 발악을 했으면 더 더러운 수는 얼마든지 있었고, 그걸 쓰지 않은 건 내 선택이었다.
물론 이 정도 점수로도 꼴찌에 가까운 석차를 받게 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필기에 한해서 생각할 때이고, 이어질 실기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석차는 비벼지게 돼 있다.
나는 계속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벨로제의 이마에 강력한 딱밤을 먹였다.
“꺄악!”
한 대 맞은 벨로제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내 눈치를 살핀다.
음, 정말 그만 구박할 때가 온 건가.
애가 너무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까 조금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그만하면 잘했어. 애초에 너한테 크게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눈치 그만 보고 준 거나 먹으면서 놀다 가.”
“저, 정말요?”
“정말, 진짜 화 안 났으니까 눈치 그만 봐. 내가 이런 걸로 화낼 만큼 쪼잔한 사람으로 보여?”
“그, 그렇죠? 이만하면 잘한 거죠? 그럼 일주일 동안 외출 허락해 주시는 거죠? 보너스도 주시는 거고, 올 때마다 간식도 주시는 거죠?”
“…….”
벨로제는 내가 별로 화를 내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은근슬쩍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전부 통과시키려 했다.
그래도 뭐, 어려운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겨우 바라는 게 저 정도라는 게 짠할 정도이니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벨로제가 언제 풀이 죽었었냐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과자 상자를 들고 구석으로 갔다.
“형님, 저도 본체로 돌아가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땅에 묻혔던 이후로 급격히 말수가 준 신비도 자유를 허락받은 벨로제가 부러운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잠시 고민한 나는 신비에게도 본체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사실 크리스한테 들키면 더 곤란한 건 벨로제지, 신비가 아니니까.
나는 벨로제보다 4~5배는 더 덩치가 큰 신비가 과자 하나를 얻어먹어 보려다가 얻어맞는 광경을 보며, 앞으로 있을 실기 시험을 어떻게 치를지 궁리했다.
제대로 된 마법을 거의 사용할 수 없었던 나는 마법 상급반의 이단아였다.
비올카의 제자라는 소문만으로도 눈에 띄는데, 그런 놈이 작살 난 실습 결과를 보였으니까 당연했다.
하지만 이번 시험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1년간 배운 모든 것을 동원한 마법 대결.
그것이 필기시험에 이은 실기 시험의 정체였다.
사소한 문제라면 마법을 보조하는 장비인 오브나 지팡이류가 아닌 다른 무기의 사용이 금지된다는 것.
염동력을 이용해서 무기를 사출하는 형태로 전투하는 내게는 불리한 조건이다.
하지만 겨우 아카데미 1학년 수준의 상대는 마법 무기들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해도 충분히 대처가 가능하다.
내 주 전력인 냉병기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만회할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야! 그거 내 거잖아!”
“하, 한 개 정도는 주셔도 되잖아요, 누님!”
“웃기지 마!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얻어 낸 건데!”
빠직.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점점 시끄러워지는 소리에 이성의 벽이 1차적으로 무너졌다.
거기에 더해 벨로제가 웅크린 신비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뱉어! 뱉으라고!”
“이미 삼켰습니다, 포기하세요!”
“이, 이 돼지 같은 도깨비가!”
싹둑.
“시끄러워!”
이성의 끈이 끊어진 나는 짜증을 한껏 담아 일갈했다.
“…….”
“…….”
한창 옥신각신하던 두 멍청이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후우… 왜 그러고 있었는지 설명해 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이 동시에 고자질을 시작했다.
“이 돼지 도깨비가 제 과자를 뺏어 먹잖아요!”
“누님이 이렇게 많은 걸 하나도 안 주시잖습니까!”
“…애냐?”
벨로제 너는 왜 울먹거리면서 말을 해?
그리고 신비, 너는 수백 살 먹은 도깨비가 왜 벨로제한테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서 줘 터지고 있고?
나는 총체적 난국을 눈앞에 두고 몰려오는 두통에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쯧.”
일단 짜증은 냈지만, 다른 건 몰라도 벨로제가 먹을 것에 집착하는 모습에는 화를 내기가 애매했다.
벨로제가 식탐을 부릴 때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동생과 동반 자살을 했던 그녀의 과거가 떠올라서 동정심이 먼저 생기기 때문이다.
젠장, 이렇게 되면 내가 진 거지, 뭐.
나는 말없이 크리스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과자들을 몽땅 꺼내서 벨로제 앞으로 보내 줬다.
“나는 잘 먹지도 않으니까 알아서 나눠 먹어.”
그래, 길거리에서 주운 고양이도 굶던 기억 때문에 끝없이 먹이를 먹는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걸 고치는 방법은 정말 원 없이 먹이를 줘서 ‘아, 이제는 배고프면 얼마든지 먹이를 먹을 수 있구나.’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그냥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거라 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양이 한 마리 주웠다는 생각으로 이제부터라도 먹을 건 좀 많이 줘야겠다.
겨우 주변을 조용하게 만든 나는 벨로제가 돌아가는 순간까지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전투 방법에 대해 궁리하고,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