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86
86
날씨 좋은 날의 오전.
루시아는 비교적 활동적인 차림으로 거의 자신의 몸통만 한 공을 들고 뛰어다녔다.
혹시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려는 순간, 다행히 루시아가 들고 있던 공을 힘껏 내던진다.
“메리, 물어와!”
힘차게 외치는 기세만 봐서는 엄청나게 멀리 던진 것 같이 보이지만, 정작 루시아의 손을 떠난 공은 겨우 메리의 옆에 안착했을 뿐이다.
가볍게 만든다고 만든 물건이긴 해도, 루시아의 힘으로 멀리 던지기엔 공이 너무 컸다.
“끼잉…….”
뛰어나갈 준비를 잔뜩 한 채 기대에 차 있던 메리는 시무룩한 얼굴로 자기 옆에 떨어진 공을 물어서 루시아에게 가져다줬다.
“잘했어!”
그럼에도 루시아는 활짝 웃으며 메리의 콧잔등을 두드렸다.
이 정도면 루시아가 메리와 놀아 주는 게 아니라, 메리가 루시아의 기분을 맞춰 주는 모양새다.
“메리, 다시 물어와!”
다시금 공을 던지는 루시아를 본 나는 염동력을 이용해 공을 정원 멀찍이 보내 버렸다.
“와아!”
큰 포물선을 그리는 공을 보며 깜짝 놀라는 루시아와 엘라, 그리고 신나서 뛰어가는 메리까지. 하나같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광경이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하신 거 맞죠!”
“음? 네가 힘이 센 것 같은데?”
짐짓 모르는 척 웃으며 대답하는 나를 본 루시아가 꺄르륵 웃는다.
정말 몰라보게 명랑해진 루시아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밝게 비추는 아이가 됐다.
바로 저 밝은 모습이 내가 리엔과 함께 떠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였다.
다친 것을 숨기기 위해 아카데미 방학이 일찍 시작됐다는 말을 했을 때, 루시아가 기뻐하던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잘 다녀오라고, 아쉬운 마음과 섭섭한 마음을 억누르고 떼쓰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해서, 나는 리엔의 제안을 받은 날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매일 빼먹지 않고 시간을 투자하던 모든 일들을 뒤로한 채 루시아와 놀아 주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것을 위해 리엔에게도 양해를 구해 놓은 상태였다.
“네 동생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밝고 귀여운 아이군.”
어느새 우리가 놀고 있는 곳으로 다가온 리엔이 내게는 악담이 될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퍼부었다.
그녀는 매일 빼먹지 않는 수련을 하고 온 것인지,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어서 탄탄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내가 어때서?”
“물론 너도 훌륭하다. 하지만 밝고 귀엽지는 않지.”
“귀여워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어.”
나는 겉으로는 툴툴거렸지만,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진 않았다.
나도 루시아가 나를 닮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메리가 엘라에게 달려들어 애교를 가장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본 나는 큰 소리로 루시아를 불렀다.
“루시아, 이제 점심 먹을 시간이야!”
“네, 오라버니!”
“아, 아가씨! 저 구해 주셔야죠! 메리, 비키지… 꺄악!”
“메리, 장난 그만 치고 얌전히 있지 못해!”
엘라의 고통을 보다 못한 루시아가 어울리지 않는 엄한 표정과 목소리로 꾸짖었지만, 메리의 애교는 한동안 계속됐다.
루시아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긴 하지만… 메리의 제1통제권을 가진 것은 나였기 때문이다.
“음, 저 늑대는 널 조금 닮은 것 같다.”
“…….”
리엔의 말에 조금 찔린 나는 메리에게 엘라를 놓아주도록 명령했다.
* * *
점심을 먹은 뒤에는 마탑에서 나온 인부들이 마법 통신 장치를 설치하러 왔다.
마탑의 각 지부에서 걸어오는 마법 통신을 수신하기 위한 장치로, 에슬란테 영지에는 하나가 있지만, 수도에 있는 저택에는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더럽게 비싼 가격을 자랑하긴 했지만, 루시아가 저번처럼 내 안위를 걱정하며 말라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다만 마탑 지부가 있는 도시가 아니면 연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비올카와 카이네에게도 상담을 했었다.
마탑은 돈을 벌기 위해 그런다지만, 그녀들이라면 휴대할 수 있는 크기의 마법 통신 도구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내 물음을 가장한 요청에 대한 그녀들의 대답은 정말 재수 없었다.
‘그런 건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냐?’
‘왜 숨을 어떻게 쉬는지를 물어보는 거죠?’와 같은 수준의 순진무구한 두 괴물의 얼굴을 본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한 건 마력만 쑤욱, 하고 주입하면 편하게 지정된 곳으로 연결되는 그런 장비였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 봐도 그들에게는 그런 장비는 필요도 없고,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 내려는 노력을 하는 자들이 아니란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괜히 뭔가 얻어 보려다, 재밌어 보인다며 따라나서려던 카이네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양팔을 날려 먹은 것을 들먹인 것이 먹혀서 다행이지, 카이네에게 그 정도의 양심조차 없었다면 나는 야반 도주를 하거나 아니면 이 여행 자체를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빨리 카마로가 부질없는 연애를 끝내고 카이네의 노예로 복귀를 해야 조금 얌전해질 텐데…….
나는 카마로의 연애가 빠른 파국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이것 말고도 나는 몇 가지 필요한 조치들을 해 뒀다.
내가 없는 사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몬스터들을 배치하고, 수도 근처에 던전을 확보해 뒀다.
몬스터도 없는 음침한 폐건물에 불과해서 누구도 찾지 않는 곳이지만, 유사시에는 내가 몬스터를 동원할 수 있는 거점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전에 봤던 오페라 공연에서 비운의 악역 가젯을 연기했던 배우에게 정기적인 후원금을 보내기로 했다.
정기적으로 저택에 방문해서 루시아와 에일라의 말벗 혹은 원한다면 음악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을 조건으로 말이다.
연락할 수단도 구축했고, 루시아가 좋아할 만한 일도 한 가지 했으니 이제는 리엔과의 약속을 지킬 때다.
* * *
루시아는 꽤 오랫동안 나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쉬워하긴 했으나 슬퍼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처음 며칠간 루시아의 얼굴이 시무룩한 모습에 입맛이 씁쓸했지만, 사흘이 지나 나와 리엔이 룸펜에 도착할 때쯤에는 많이 괜찮아져 있었다.
루시아가 메리를 만나기 위해 정원으로 나올 때마다 메리의 시야를 통해 루시아를 바라봤기에 알 수 있었다.
그것보다는 문제는 루시아보다 나와 리엔에게 발생했다.
배를 타기 위해 라메리안 왕국 남쪽, 룸펜 공국까지 오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 흔하다는 산적 이벤트도 없었고, 위기에 처한 미녀를 구하고 사랑에 빠지는 전개도 없었다.
그저 비 오는 날 무리하게 말을 달리는 바람에 리엔이 탄 말이 웅덩이에 빠져 발목이 부러지고, 내 말이 버둥대는 리엔의 말에 걸려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진 정도가 전부다.
물론 그것도 사건이라면 사건이겠지만, 별로 골치가 아픈 종류는 아니었다.
가까운 마을에서 웃돈을 주고 말을 구하면 그만인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 당면한 상황은 확실히 골치가 아프다.
“배가 뜨질 못한다고?”
“네. 저희 배만이 아닙니다. 지금은 아무 배도 바다로 나가려고 하질 않을 겁니다.”
내가 룸펜 공국까지 온 이유는 간단하다.
배를 타기 위해서.
라메리안 왕국은 바다와 접하지 않은 탓에 항구가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배를 타는 방법은 룸펜의 항구 도시, 체니코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껏 사흘을 미친 듯이 달려서 왔더니 배가 뜨질 못한다니?
“도대체 왜지? 날씨가 궂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화창한데.”
내 물음에 선원은 자신도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이 됐다.
“날씨가 문제가 아닙니다요. 해적 놈들이 날뛰는 바람에 항구가 완전 포화 상태가 됐지 뭡니까.”
“해적이라고? 겨우 그런 것들 때문에 배가 뜨질 못한다고 말하는 건가?”
“겨우라니요. 벌써 놈들이 가라앉힌 상선만 열 척이 넘습니다. 괜히 나갔다가 침몰하는 배가 자기 배가 될지도 모르는데 어떤 멍청이가 바다로 나가겠습니까?”
뭐라고?
나는 배가 열 척이나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말보다 그런 해적을 여태 방치하고 있는 룸펜 공국에 놀랐다.
룸펜 공국에서 해상 무역을 빼면 그건 장기를 적출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해적이 날뛰는 것을 관망하기만 한다?
충분히 이상했다.
그런 내 의문은 이어진 선원의 푸념에 의해 해결됐다.
“해군이 나서서 소탕하려고 했지만, 군함 다섯 척이 싹 다 침몰했습니다. 그래서 높으신 분들도 전전긍긍하는 중입죠. 당한 배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없어서 나포가 된 건지, 아니면 해적이 아니라 해신이 노하기라도 하신 건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어이가 없군.”
그 정도면 해적선이 아니라 유령선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겠는데.
해신이라는 소리야 미신에 유독 잘 빠지는 뱃사람들의 헛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크라켄이 실존하는 세계이니 몬스터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다.
나는 조금 더 정보를 얻기 위해 선원에게 이것저것 더 물었지만, 선원은 입이 가볍다는 장점 대신 알고 있는 정보의 깊이는 아주 얕았다.
더 이상 뽑아낼 정보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술이나 한잔하라는 말과 함께 은화 몇 닢을 건네고 돌아왔다.
사정은 다른 배편을 알아보러 갔던 리엔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지만, 출항한다는 배는 하나도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늦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돌아온 여관에서 마주 앉은 나와 리엔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배를 타는 게 가장 빠를 것 같아서 얘기한 건데.”
배를 타고 이동하자고 한 건 나였기에, 나는 리엔에게 사과했다.
그런 내 말을 들은 리엔의 눈썹이 쓱, 하고 올라간다.
“무슨 소리. 계획 없이 무작정 움직이려던 나 대신 계획을 수립해 준 건 내가 감사를 해야지.”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더 늦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으니까.”
“이런 특수한 상황까지 고려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 배를 타고 이동한다는 계획은 아주 훌륭했다. 신경 쓰지 마.”
나는 예상했던 반응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상황까지 예측해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지.
모험가 조합과 상인 조합에서 보내오는 자료에도 이 일은 언급되질 않았고.
선원의 말대로라면 체니코 근해가 이런 상태가 된 지는 겨우 일주일 남짓.
내 손에 정보가 쥐어지기에는 지나치게 최근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잠시 대화가 끊어진 침묵 속에서 음식을 먹던 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발이 묶인 것보다는 곤란에 처한 이들을 도울 방법을 모색한다.
그녀답다면 그녀다운 반응.
하지만 나는 긍정적인 답변을 돌려줄 수 없었다.
“없다고 단언하긴 좀 그렇지만, 문제가 생긴 곳은 바다야. 땅에서라면 너나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해상에서는 이야기가 달라.”
“으음…….”
뭐, 리엔은 몰라도, 나라면 해상 전투에서도 활약할 여지가 있긴 하다.
바다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몬스터를 소환하는 방법도 있겠고.
그러나 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적에게 유리한 곳으로 뛰어들 필요는 없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전력인 6단계 몬스터도, 공중이나 수중 같은 특수 지형에서 활동할 수 있는 몬스터들은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하기도 하고.
나도 내 계획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놈들을 당장에라도 가죽을 벗겨 천연 소금물에 절이고 싶은 심정이긴 하나, 그렇다고 도박을 할 수는 없다.
화가 날수록 냉정해질 것. 내가 인생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들 중 하나다.
“그렇다고 이렇게 떠나기엔 마음에 걸려. 기사 수행이란 무릇 나 자신을 단련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자들을 돕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감이야. 하지만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는 게 어때? 룸펜은 해상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야.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타개하려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선 해군이 다시 움직이겠지.”
“그러면 좋겠지만…….”
리엔은 완전히 납득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일단 지금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는 상태는 벗어난 것 같다.
신이 실수를 했는지 정의감이 지나치게 첨가된 리엔이지만, 판단력을 흐릴 정도까지는 아닌 게 다행이다.
일단 지르고 보는 정의는 멋진 게 아니라, 전장에 굴러다니는 시체만 한 구 늘리는 병신 같은 행동일 뿐이다.
식사를 마친 나와 리엔은 따로 숙소를 구하기도 귀찮아서, 식사를 한 여관에 방을 잡았다.
호화로운 숙소를 구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가까운 침대가 세상 무엇보다 귀하고 호화로운 물건일 정도로 피곤하다.
사흘을 말을 달렸고, 그중 하루는 빗속이었다.
아무리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체력을 보유하게 됐다 해도, 이쯤 되면 눕고 싶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