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87
87
예상하긴 했지만, 룸펜 해군의 움직임은 그 예상마저 웃돌 정도로 빨랐다.
체니코에 주둔하고 있던 군함 다섯 척이 침몰한 지 닷새째 되는 날에 체니코 항만 근처에 군함들이 도착한 것이다.
나와 리엔이 체니코에 도착한 후로부터 따지자면 겨우 이틀이 지난 시점.
나는 룸펜 함대가 체니코 근해에 들어서는 모습을 구구콘을 필두로 한 항공정찰 편대의 시야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군함만 열 척이 넘게 몰려온 룸펜 해군들은 항만으로 들어오지 않고, 넓은 바다에 퍼진 채 체니코 항만을 지키는 대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체니코 근해에 대한 장악력을 우선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바로 옆방에서 묵고 있는 리엔을 불러서 항구로 나갔다.
“해군이 도착했으니까 다시 배들이 움직일 수도 있어.”
“확실히 네 말대로 꽤 빠르게 움직였군.”
“그럴 수밖에. 당장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룸펜의 해군 제독은 머리가 몇 올 남지 않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해적들을 잡아다가 껍질을 벗기고 싶겠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루 동안 구구콘 편대를 이용해서 바다를 둘러본 나조차도 해적들의 근거지를 찾을 수 없었다.
배를 끌고 찾으려고 들면 더 힘들 것은 자명한 일.
일단 보여야 해적과 전면전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이기고 지고는 그다음 문제다.
잠시 후 도착한 항구는 해군들로 가득했다.
해군들은 벌써 해적을 소탕하기라도 한 듯 위풍당당하게 사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보여 주기 위한 사열은 이 사태가 일시적이며, 이미 함대가 도착한 순간 소요는 진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요식 행위에 가까웠다.
그게 아니라면 항만에 다른 군함은 접근하지도 않으면서, 사열을 위해 한 척의 군함만 상륙할 이유가 없었다.
“휴우, 이제야 빌어먹을 해적 놈들이 더 날뛰지 못하겠군.”
“젠장, 조금만 일찍들 올 것이지. 이미 거래 기한은 지나 버렸는데 말이야.”
“나는 가져다 팔아야 할 게 과일이라고. 도착하면 몽땅 썩어 있을 게 뻔한데, 완전 망했어.”
항구에 모인 상인들 사이에서 앓는 소리와 안도의 한숨이 뒤섞여 흐른다.
확실히 꽤 큰 규모의 함대가 나타나자 일단은 사태가 진정될 것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라메리안 왕국의 병사들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군.”
내 옆에서 까치발을 하고 해군들의 사열을 지켜보던 리엔의 감상이었다.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전혀 다른 모습이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감상이었다.
솔직히 어설프게나마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보기에, 라메리안 왕국의 군사 체계는 엉망 그 자체였다.
징집병, 정규병, 기사단이라는 각각 다른 집단.
게다가 각 영지의 영주들이 이끄는 집단들이 뒤섞이다 보니 지휘 체계나 계급이란 개념이 거의 없었다.
십인장, 백인장을 나누기는 하지만, 거의 공사판 작업반장 수준이라고 보는 게 나을 정도.
그에 비해 룸펜 해군은 척 보기에도 꽤나 제대로 체계가 잡힌 ‘군대’로 보였다.
곧 고급 장교로 보이는 남자가 병사들을 상대로 아주 쓸데없는 훈시를 시작할 때쯤, 내 관심은 군함으로 옮겨져 있었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군함에도 화약 병기가 없다니?
구구콘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아무리 살펴도 군함 옆구리에 배치되어 있어야 할 화포가 눈에 띄질 않는다.
그런 와중에 개량 한복처럼 간소화한 로브를 입은 자들이 배 위를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들이다.
…….
이 세계는 마법사를 대포 대용으로 알고 있는 건가?
확실히… 사정거리가 화포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유리하긴 하지.
더럽게 무거운 동체, 거기다 더 무겁고 많은 부피를 차지하는 탄환의 존재는 적재량의 한계가 명확한 선박에 있어서는 큰 약점이다.
배가 가벼워질수록 선박의 속도가 빨라지기도 할 테고.
물론 내 생각에는 양쪽 모두를 활용하는 게 훨씬 더 전술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 같지만.
“언제쯤 해적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
나는 아직도 까치발을 드느라 고생하고 있는 리엔에게 물었다.
그러자 까치발을 들어도 트이지 않는 시야에 답답해하고 있던 리엔이 구경을 포기하고 대답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단순히 산적이나 도적 떼라면 군이 동원되는 순간 줄행랑부터 생각하겠지만,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가늠을 못 하겠어. 더 작은 규모의 부대라고는 해도, 일단 해군이 패배한 전투도 있고.”
“그렇지…….”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역시나 리엔의 견해는 내 것과 일치했다.
저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병사들과 좌중에게 승리의 확실함을 연설하는 장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우리는 순수하지 못하다.
나와 리엔은 아직 20대에도 접어들지 못한 나이지만, 전쟁의 불확실성을 뼈저리게 느낀 전쟁 경험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승리는 이미 결정된 것이란 것을 명심해라!”
“예!”
내가 전쟁의 불확실성에 대해 생각할 때 룸펜 해군은 여전히 승리를 다짐하는 것도 아니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 불길함이 느껴진다면 과민한 반응일까.
“저, 저게 무슨!”
그런데 그때, 구경꾼들 사이에서 경악 어린 외침이 튀어나왔다.
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 구경꾼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확인한 장면은 ‘저게 무슨’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군함 한 척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 지, 지, 진정해라! 빠, 빠, 빠, 빨리 보, 복귀를……!”
방금 전까지 온갖 강인한 척은 다 하던 장교도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진정하라는 놈이 가장 벌벌 떨면서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역시 ‘확실’이라는 단어를 쓰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은 없는 것 같다.
“루크!”
리엔이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나와 같은 전장을 누빈 리엔은 내가 비행 몬스터를 다뤄서 정찰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즉,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알고 있어! 지금 확인하는 중이야.”
나는 리엔에게 대답함과 동시에, 군함 상공을 날아다니는 비행 몬스터들의 시야를 동시에 주르륵 띄웠다.
뭐지?
하늘 위에서 바라본 바다 위에는 해적선이 없었다.
그저 거대한 물거품을 만들며 침몰하는 해군함만이 있을 뿐이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해군들도 마찬가지인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다른 군함들도 우왕좌왕하며 당황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젠장! 정말 유령선이라도 나타난 거야, 뭐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해적선은 안 보여. 아무것도 없다고.”
“그럼 저기 침몰하고 있는 배는 뭐란 말이야?”
그걸 나도 모르겠다.
아니, 이곳에 모인 자들 전부가 모른다.
애초에 상선과 군함을 박살 낸 놈들이 해적이라는 증거가 있던가?
나는 아예 대전제부터 잘못됐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두의 당황이 진정되기도 전에 또 한 번 경악스런 장면이 연출된다.
너무 먼 거리 탓에 들릴 리 없는 콰드드득, 하는 효과음이 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호쾌하게 군함이 두 동강 난 것이다.
그 장면을 상공에서 내려다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배를 침몰시키고 있는 범인은 바다 밑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중에서 수직으로 살피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한 놈이다.
깊은 바다에서 수직으로 배를 공격하고, 침몰하면서 생기는 물거품에 거대한 동체를 숨긴 채 다시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
거대한 그림자로만 파악해서 정체가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해적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더러운 룸펜 놈들, 전부, 전부, 나와 같이 바닷속으로 가자!
“크윽!”
나는 갑작스레 몰려오는 강력한 사념의 폭풍에 피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강력한 존재가 발산하는 짙은 사념은 그것만으로도 내 정신을 오염시킨다.
하지만 정작 이 처절한 사념을 느끼고 휘청거리는 것은 나뿐이었다.
“루크! 무슨 일이냐!”
리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설명할 틈이 없었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는지조차 가물가물한 벨로제를 불렀다.
-벨로제!
-네! 마스터.
평소라면 오랜 기간 방치한 것에 툴툴거렸을 벨로제도, 지금은 한껏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지금 이 사념, 내가 지옥에 처음 갔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해. 루시퍼가 말을 걸었을 때… 아니, 진체인지 뭔지를 느꼈을 때랑 비슷하다.
-저도 들었어요. 다른 인간들 반응을 봐서는 저와 마스터만 들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는 건…….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 기억과 느낌이 맞다면 지옥의 생물들이 뿜어 대던 절규와 비슷합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옥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어이가 없군.
그렇게 정보를 모아 보려 할 때는 찾을 수 없던 게,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카나야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무언가 운명의 장난질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저걸 특채자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무지막지하잖아?
역시 벨로제의 말대로 지옥 생물의 일종이라면, 특채자가 소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도 몬스터를 다룰 수 있으니, 비슷한 능력을 가진 놈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지.
하지만 지금 이 사념은 단순히 정신을 공격하는 파장이 아니다.
짙은 원한과 절규가 담겨 있고, 내용까지 있는 사념파.
즉, 저 바닷속의 존재는 이성은 이미 잃었다고 해도, 지성은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세네라!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다시 휘몰아치는 사념의 폭풍.
이번에는 사념파의 영향으로 침몰하는 배를 중심으로 파도까지 출렁인다.
물리력을 가질 정도의 정신 에너지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큰 타격을 입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리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무슨 소리냐! 루크, 루크!”
내 갑작스런 통보에 리엔이 나를 부르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구경꾼들의 어깨와 머리를 가차 없이 밟으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이대로는 기껏 몰려온 룸펜 해군이 전멸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
앞으로 써먹을 전력을 보존시켜 보고, 그게 안 된다면 놈들이 싹 쓸리기 전에 정보라도 캐야 한다.
“빨리, 빨리 승선해라! 아군과 합류해야 한다!”
나는 한참 목청이 터져라 병사들에게 명령하는 장교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지옥 주머니를 열었다.
그리고 점프와 동시에 방패에 올라타, 염동력을 사용해 가장 가까운 범선 위로 올라섰다.
순간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인 탓에 아래쪽에서 해군들이 시끄러워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상황에 배에 올라타고 바다로 나가려는 집단 자살 희망자들과 어울릴 시간은 없다.
[더러운 웅덩이의 정령을 소환하시겠습니까? …….]나는 얼마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물의 정령을 소환했다.
풍덩, 풍덩, 풍덩.
연속해서 정령들이 바닷속으로 빠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화면은 구구콘 편대의 시야 대신 어두컴컴한 바닷속을 비추기 시작했다.
멀다고는 하나 겨우 50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
정령들은 무서운 속도로 군함들이 공격당하는 해역에 도달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군함 바로 아래에서 수직으로 상승하는 거대한 동체가 화면에 잡혔다.
엄청난 속도임에도 거대한 크기 때문에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보이는 움직임.
바닷속 존재는 인어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 커다란 머리, 마찬가지로 기이하게 기다란 팔, 그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한 몸체와 꼬리는 동화 속에서 묘사되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콰드드득!
거대한 군함도 바로 배 밑바닥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거대한 괴수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세계의 배들은 이런 식으로 배를 공격하는 몬스터에 대비해서 철저한 방비를 해 두는 편이지만, 그것도 공격하는 쪽의 덩치가 배보다 커서야 아무 소용이 없는 헛짓에 불과했다.
쿠오오오.
이후에 이어진 장면은 왜 생존자가 없었는지 보여 줬다.
인어 괴수가 거대한 입을 벌리고, 부서진 배 밑쪽에서 물을 빨아들이면서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먼지처럼 인간들이 삼켜진다.
어두컴컴한 바다는 인간들에게 비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벨로제.
-…네?
-혹시 기권은 없냐?
-…….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