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02
101
헬무트
101화
모든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헬무트는 시안과 입구에서 마주쳤다.
“아스카, 헬무트, 너네 오늘 대련했다며. 그 얘기로 다들 떠들썩하던데?”
먼저 돌아온 검술 학부 녀석들에게서 이미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다.
“나도 구경했으면 좋았을 텐데.”
시안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되게 수준 높은 대련이었다고 하더라? 여태 내내 붙을 생각을 안 하더니 웬일이야.”
“난 들어가 본다.”
시안의 말을 툭 잘라 끊은 아스카가 기숙사 쪽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척 보기에도 기분이 저조한 그였다.
오전에 세 번 연속 대련해서 세 번 연속 져 버렸다. 틱틱대거나 성질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아예 시무룩해져서 말수가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래. 저 단순한 녀석이. 네가 좀 많이 때렸나 봐?”
“별로, 때리진 않았는데.”
거의 제압하는 식으로 대련이 끝났으니까. 목검으로 맞았으니 아플 수는 있겠지만, 그나마도 후에 다 치료했다.
그건 다시 말해, 상처를 입히지 않아도 될 만큼 헬무트와 아스카 사이에 실력 차가 있었다는 뜻이다.
“살다 보면 이기고 질 수도 있지.”
시안이 중얼거렸다. 승패를 중시하는 검사와 개개인의 성취를 중시하는 마법사는 생각이 좀 달랐다.
마법으로도 전투에서의 우열은 갈릴 수 있지만, 그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었으니까.
“네가 맨날 아레아한테 지는 것처럼?”
“아레아를 제외한 다른 녀석들은 모두 이기니까 내가 2등인 거 아니야.”
“관점을 바꿔 보면 그렇군.”
새로웠다. 하지만 헬무트는 지고 싶지 않았다. 누구한테든. 2등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
파헤의 숲에는 강력한 마물이 많았고 인간인 헬무트는 약하디약한 존재였다. 인간 세상에서까지 그렇게 되긴 싫었다.
인간 세상에선 강자이고싶다. 누구도 얕보지 못할 만큼의 강자.
그는 이미, 누군가의 그늘을 벗어났으니까.
“뭐 좀 삐친 것 같은데 오래가진 않겠지?”
중얼거리는 시안을 두고 헬무트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다. 곧 아레아의 수업이 있을 터였다.
*
“그 녀석은 오늘 안 오나 보네?”
시안이 꼼꼼히 문을 잠그는 걸 본 아레아가 턱을 괴고 물었다.
얼마 전 아레아의 추종자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가까스로 그들을 밀어내고 문을 닫은 이후로 모두가 문단속을 철저히 하던 터였다.
“아스카는 수련장에 가 있어. 오늘 안 온대. 단단히 독이 올랐나 봐.”
“잘된 일이네.”
분위기를 흐리던 두 명 중 한 명이 사라지니 바람직해졌다.
아스카가 필기 공부를 안 하고 수련에만 집중하면, 헬무트가 수석이 될 확률도 올라간다.
“방심하지 말라고. 필기는 다 공부해 둬서 이제 시험 전날 잠깐 보기만 하면 된다고 그랬어.”
“방심하든 안 하든 네가 운동장 100바퀴를 돌아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자신 좀 있나 봐? 헬무트 답안지가 많이 좋아졌나?”
시안이 손을 뻗어 헬무트가 들여다보고 있던 답안지를 잡아챘다. 막 아레아의 첨삭을 살펴보던 헬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뭐야. 사람이 어떻게 단기간에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시안이 중얼거렸다. 그도 마법 학부 차석. 잘 쓴 답지와 못 쓴 답지를 구분할 줄 안다. 표현이 투박하긴 하지만 나무랄 데가 없었다. 무난하게 상위권에 들 만한 답지다.
“너도 좀 사기적인 녀석이란 말이지.”
아레아만 사기인 줄 알았더니, 한 명 더 생겼다. 시안은 자신이 급속도로 평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천재 소리는 꽤 듣고 살았는데, 여기선 명함도 못 내밀겠다. 왠지 씁쓸해졌다.
아레아는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시작할 테니, 입 닫아.”
“네, 네.”
학습실 안에서 수업이 시작되었다. 중간고사를 앞둔 밤이었다.
*
검술 학부 2학년생들은 아침부터 유독 떠들썩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1학년과의 대결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오늘이 1학년과 맞붙잖아.”
“크으, 긴장된다. 이거 이기면 본전이고 지면 쪽박 아니야?”
“올해 1학년 녀석들이 실력이 좋아서 우릴 얕본다던데.”
“본때를 한 번 보여 줘야지!”
“근데 사실 우리도 작년에 2학년을 얕봤어. 깨지고 나서 정신 차린 거지.”
“일단 우리가 걔들을 깨트려야 하는 거 아니냐.”
“설마, 자신 없는 건 아니겠지?”
“난 자신 있는데 네가 문제지.”
“뭐, 임마? 너 나랑 대련 전적에서 뒤질 텐데 장난하냐?”
“4승 5패나 5승 4패나 거기서 거기지.”
“난 니들 둘 다 걱정이다. 이기지 못할 거면 사람 구실이라도 좀 해라.”
“지더라도 5분은 버텨 봐!”
“지는 놈은 기숙사 들어올 자격도 없으니, 운동장에서 자라!”
왁자지껄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는 제법 좋았다. 적절한 긴장감. 적당한 활기.
확실히 타 학년과의 대련을 앞두고 단합이 되어가는 모습이다.
“그 1학년 여자애랑은 누가 붙을까? 1학년에 사촌이 있어서 슬쩍 물어보니까 실력이 꽤 좋은 모양이던데.”
“난 걔가 1학년 수석으로 유력하다고 들었는데?”
“설마, 여자잖아. 검술 학부는 타 학부와는 다르다고.”
일단 비스를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면 성별의 차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처럼.
물론 그 수준에 이르기까지가 무척 어렵다. 신체를 단련하며 비스의 그릇을 만드는 과정에서 견뎌 내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여잔데 하필 우리 아카데미 검술 학부에 들어올 정도면 여간내기가 아닐걸. 우리 학부엔 여자가 손으로 꼽을 만큼밖에 없잖아?”
“아예 각박한 환경에서 줄창 검만 수련하려고?”
“그렇겠지.”
“그 1학년 여자애, 이름 높은 가문 출신인 것 같다더군.”
“원래 아카데미에 아는 사람이 있나? 그런 걸 다 알게.”
“말투나 행동, 검술. 그 정도면 충분히 알 수 있지.”
“누가 그녀와 맞붙을지 기대되는데.”
“난 좀 아니고 싶다.”
“나도.”
호기심을 드러내면서도, 혹시나 질까 봐 꺼려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예쁜 여자애한테 져서 망신을 당하는 꼴은 누구라도 사양할 테니까.
“그보다 아스카 녀석이 아주 칼을 갈고 수련장에서 살았다는데?”
“난 그 녀석이 대련에 그렇게 진지한 건 처음 봤어.”
정확히는, 누군가를 괴롭힐 목적이 아닌 이기기 위한 대련. 그리고 자신의 발전에 집중하는 대련을 하는 걸 처음 봤다.
교관들이 대련 상대를 바꿔가면서 하라고 지시했기에, 아스카와 헬무트는 그날 이후로 맞붙지 못했다.
급속도로 말수가 적어진 아스카는 헬무트에게도 낯설었다. 휴일에도 종일 수련장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들었다.
“져서 어지간히 분했나 보지?”
“아스카가 진 적이, 여태까지 없었지 아마도.”
아스카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녀석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마침 그 아스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이 다 되어서야 아침 일찍부터 틀어박혀 있던 수련장을 벗어난 그였다.
주변을 쭉 돌아본 아스카가 휘적거리며 헬무트에게 다가왔다.
“여어, 좋은 아침!”
오늘은 좀 말을 할 기분이 되었는지 전보단 활기차 보인다.
“시안이 네게 필기 공부를 좀 하라고 전해달라던데.”
“알게 뭐야. 그딴 거. 어차피 운동장 돌건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인데.”
내기고 뭐고 상관없다는 말투였다. 시안이 들으면 뒷목 잡을 소리를 비뚜름하게 내뱉은 아스카가 쭉 기지개를 켰다.
“아아, 좀 괜찮은 상대가 걸렸으면 좋겠다. 1학년 중에서 그런 녀석이 있을까?”
“1학년에서 몇 명 괜찮은 녀석이 있다는데.”
“괜찮으면 뭐해. 어차피 웬만한 녀석들은 시시할 뿐인걸.”
자신만만한 걸 보니 연습한 성과가 꽤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헬무트도 성과가 있긴 했다. 논술 쪽으로라는 게 문제였지만.
시간이 되어 나타난 알란 교관이 줄을 세우고 출석을 불렀다.
“모두 출석했군. 바로 이동한다.”
그가 손짓하며 앞장섰다. 아마 1학년 쪽으로 합류하여 대련을 진행할 모양이었다.
검술 학부 2학년생들은 기대를 안고 알란 교관을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1학년들의 수업이 진행되는 또 다른 교정이었다.
그레타 아카데미는 규모가 큰 아카데미다. 검술 학부는 본관을 포함하여 각 학년별 건물이 총 7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쯤 되는 규모이니 교양 수업 아니면 다른 학부 학생을 마주칠 일이 없다.
다른 학부의 학생은커녕 한 학부 내에서 다른 학년과 교류하는 일도 많지 않았다.
오며 가며 마주치긴 하지만, 수업 공간이 분리되어 있고 기숙사도 따로 쓰니까.
자연스레 같은 학부, 같은 학년 내 결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시안처럼 다른 학부 학생들과 대놓고 어울리는 경우가 흔하진 않았다.
“저기, 1학년들이 있다.”
페트리샤 교관과 그녀 앞에 줄지어 모인 1학년들이 보였다.
이쪽이나 그쪽이나 검술 학부. 대체로 한 덩치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나이 차가 난다고 1학년들이 조금 앳되어 보였다.
1학년들은 약간의 술렁임을 안고 도착한 2학년들을 쳐다봤다. 분위기가 썩 좋다고 하긴 어려웠다.
헬무트와 아스카는 유독 자신들을 향한 시선을 느꼈다.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호기심과 멸시가 섞인 눈빛.
“저게, 그 평민들인가.”
“말조심해, 평민 ‘선배’들이지.”
“미친, 평민 따위에게 선배 소릴 붙여 줘야 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익숙한 분위기다. 아스카가 목검을 힘주어 잡았다. 그가 씩 웃었다.
“아까 그 말 취소할게. 이번 대련, 시시하진 않을 거야. 재미있어질 테니까.”
그건 꼭 재미있게 만들어 주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2학년생들의 분위기도 자연스레 묘해졌다.
자기들도 평민이라고 무시했던 적이 있지만, 헬무트는 인정받는 분위기였고 아스카도 실력 면에서는 그랬다.
원래 자기들이 욕하는 건 괜찮아도 남이 욕하면 기분 나쁜 법이다. 기분 나쁜 것과는 별개로 좀 안쓰러움도 들었다.
“야, 아스카 표정 봐.”
“또 사고 하나 치겠군.”
“상대하는 녀석한테 애도를.”
2학년들은 동정심을 품으며 동시에 전의를 다졌다. 1학년에 지면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들 주목! 오늘부터 1학년과 2학년의 대련이 이루어진다는 건 알고 있겠지? 대련 방식에 대해서 설명한다!”
알란 교관과 인사를 나눈 페트리샤 교관이 평소처럼 브리핑했다. 대련 전에 약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대련에 앞서 30분 동안 가볍게 몸을 풀고 기본 동작을 연습하도록!”
아스카는 체조하듯 팔다리를 쭉쭉 늘였다. 그는 당장에라도 대련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학년 학생들은 살짝 떨어진 자리에 서서 새로 도착한 2학년들을 힐끗거렸다.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다.
잠깐 잦아들었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별로 소리를 죽이지도 않고 저들끼리 보란 듯이 거만하게도 지껄인다.
“2학년 선배들 별거 없어 보이는데?”
“전체적인 수준이 낮으니까 평민들이 학년에서 제일 실력이 좋다고 소문이 나지. 말이 돼?”
“평민한테 지다니, 한심스럽기도 하지.”
“검술 학부의 미친개는 무슨! 미친개는 패야 말을 듣지.”
“우리 평민 선배님들, 얼굴 하난 계집애들 몰이하긴 딱이네.”
“얼굴로 실력순 정한 거 아니야?”
듣자 하니까 도가 지나치다. 2학년생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각 학년이 떨어져 수업한다지만, 보통 선후배 관계는 존중되었다. 이런 상황은 흔치 않다.
교관들이 1학년들의 실력이 예년에 비해 좋다고 말한 게 소문나면서부터가 시작이었다.
거기다가 2학년의 실력자로 평민인 헬무트와 아스카가 부각되면서 기류는 한층 더 묘해졌다.
타 학년을 넘어 타 학부에도 소문이 자자한 두 명의 존재.
고학년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막 평민을 종처럼 부리다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1학년들은 평민이 귀족보다 어떤 의미로건 윗줄에 놓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연히 2학년 전체를 통으로 얕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