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09
108
헬무트
108화
페트리샤 교관은 걱정했다.
‘크게 실의에 빠지진 말아야 할 텐데.’
샤를로트는 교관들이 아끼는 우수하고 착실한 학생이었다.
이 눈앞의 비인간적인 천재 헬무트나 미친개 아스카에 비하자면 그녀는 무척 귀엽고 정감이 갔다.
‘역시 헬무트에게 붙이기는 무리였나.’
어쩔 수 없었다. 샤를로트 정도는 되어야 헬무트에게 붙이니까.
편입 시험 때에 지원자들에 비하자면 샤를로트는 저항을 좀 한 편이다.
“저도 가 봐도 될까요?”
떠나려는 헬무트를 페트리샤 교관이 붙잡았다.
“제군은 잠시 이리와 봐.”
헬무트가 무심히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빨리 용건을 끝내길 바라는 마음이 반이었다. 헬무트는 필기시험을 준비하러 가야 했다.
검술 실기야 확실히 자신이 있지만, 그쪽은 확실까진 아니다.
아레아가 합격점을 주긴 했어도 막상 시험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까.
그때 페트리샤 교관이 꺼낸 말은, 헬무트의 신경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제군은 나날이 잘생겨지는군.”
농담이라기엔 진지한 어조였다. 표정도 진지했다. 헬무트는 당혹스러워졌다. 그는 거울을 봐도 제 얼굴에 이물질이 묻어 있지 않은가만 봤다.
페트리샤 교관이 말을 이었다.
“실력도 얼굴과 비례하고, 성실함까지 갖췄어. 제군은 정말 좋은 학생이야. 교관으로서 뿌듯함을 느낄 정도로.”
‘뭐지, 이 갑작스러운 칭찬은?’
“나는 제군이 얼마나 출중한 실력을 지녔는지 알아. 하지만 다른 학년 교관들은 모르지. 그 점이 늘 안타까웠어. 그러다가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
페트리샤 교관이 안타까운 듯이 손뼉을 마주쳤다.
“제군은 정말 성격이 급해. 이 교관들을 앞에 두고 본격적으로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나?”
“왜 그래야 하죠?”
“……그 뭐랄까, 1학기의 반 동안 열심히 노력해 왔잖나. 다들 소문난 자네의 검술을 제대로 보고 싶어 한다고. 저 아쉬운 표정들을 봐.”
그녀가 제 뒤의 교관들을 지목했다. 교관들은 아쉬워한다기보다는 ‘뭐 이렇게 빨리 끝났지?’ 내지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지?’라며 고심하는 표정이다.
페트리샤는 2학년 중간고사를 대련으로 치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적어도 2학년과 3학년이 대련을 치르기를 원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학과 일정상 전체 회의에서 정해진 사안이었다.
그들을 힐끔 본 헬무트가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러니까 약한 상대를 앞에 두고 제 검술을 자랑하기 위해서 시간을 질질 끌란 뜻입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니란다.”
‘이 녀석은 너무 직설적이야.’
“내가 아쉬워서 그렇지. 우리 훌륭한 제군의 실력을 다른 교관들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게.”
그렇게 말하자면 페트리샤 교관도 제대로 본 적은 드물었다. 그녀가 볼 때마다 항상 헬무트는 압도적으로 대련을 종결지었으니까.
“뭐 대충 비슷한 뜻이겠군요. 알아들었습니다.”
인간은 하고 싶은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페트리샤 교관이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떻게 하건 헬무트의 점수는 만점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는 건 결국 상대에 대한 배려. 그의 대련 상대. 제대로 갈고닦은 검술을 보일 기회도 없이 패배를 맞이하여야 할 가련한 후배들 말이다. 결국 편입 시험 때와 비슷한 의도다.
헬무트는 그녀의 뜻대로 해 주기로 했다.
이쪽이야 다리언의 검술을 내보이지 않을 거고, 공용 검술만 써도 충분하다. 살짝 귀찮을 뿐 나쁠 거 없다.
“제 다음 대련은, 아마 좀 더 오래 걸릴 것 같군요.”
“제군, 내가 제군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담스럽게 구는 페트리샤 교관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 뒤 헬무트는 꾸벅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이걸로 아스카와 엮인다거나, 아스카 때문에 뭔가 사고가 터져도 페트리샤 교관이 좀 눈감아 줄 거란 계산이었다.
*
“시험은 어땠어?”
목검을 뒷목에 올린 아스카가 시험장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헬무트의 대련은 오전 일찍 잡혔다. 아스카는 헬무트보다 몇 분 일찍 다른 교관들 앞에서 대련을 치렀다. 그러니 여기서 마주칠 만했다.
“그럭저럭.”
“네 상대가 샤를로트였지? 걔 좀 제법이던데. 몇 분이나 걸렸어?”
당연히 이겼을 테지만, 좀 애를 먹었을 거라는 말투였다.
헬무트는 잠깐 고심했다. 아마 초 단위였던 것 같은데, 그것까지 셀 수는 없었다.
“1분.”
“뭐라고?”
“1분 좀 안 됐던 것 같은데, 금방 끝났어.”
잠깐 얼어붙었던 아스카가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봤다.
“너, 지금 엄청나게 재수 없었다는 거 알아? 아레아인 줄 알았어.”
“물어봐서 답했을 뿐인데.”
“룸메이트라고 닮아가냐. 진짜 내가 왜 이런 것들을 만나서.”
투덜거리는 아스카와 함께 헬무트는 기숙사로 향했다.
필기시험은 실기 시험 기간이 끝나면 몰아서 보게끔 짜여 있다.
함께 간단히 점심을 먹은 그들은 바로 학습실로 향했다. 이젠 학습실에서 공부하는 것도 익숙해져 있었다.
혼자서 공부한다고 느슨해지지는 않는 그였지만, 그래도 공부할 의지가 있는 여럿이 함께 공부하는 쪽이 더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았다.
적당히 긴장감이 돈다. 특히 같은 방안에 열의를 불태우는 아레아가 있으면 말할 것도 없다.
시안이 험담하듯 말하기를 1등을 놓친다는 건, 아레아에게 혀 깨물고 죽을지라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헬무트도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맨날 시안더러 차석, 차석 불러대는 아레아가 누군가한테 그런 소릴 듣는 상황이 된다면 폭주해 버릴 것이다.
헬무트도 아레아가 운동장 100바퀴를 돌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후한이 조금…… 신경 쓰였다.
아스카는 넷 중에 가장 의지가 박약한 편이었지만,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서 꽤 열심히 했다.
천재 과인 그는 헬무트가 나타나기 전에는 실기에선 늘 1등이었으니 별로 걱정할 거리가 없었다.
이중 가장 평범한 학생처럼 행동하는 건 시안이었다.
“아아, 시험 망했어.”
시안이 한탄을 하며, 학습실로 비척비척 들어왔다. 막 교재를 펴고 있던 헬무트와 아스카가 그를 쳐다봤다.
시안은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 책상에 머리를 쿵 찧었다.
“아아아아, 내가 이런 꼴이 되다니.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야.”
“야식집 알아볼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시험을 잘 봤을걸.”
자기도 같이 쏘다닌 주제에 아스카가 비아냥거렸다. 위로해 주는 다정함은 이 방의 누구에게도 없었다.
유일하게 그런 다정함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는 위로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시안은 엄청나게 좌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헬무트가 물어봤다.
“답안지를 못 썼나?”
“아니, 논술은 다 썼는데 객관식 50문제 중에서…….”
“50문제 중에서?”
아스카가 호응하자, 시안이 머리에 손을 집어넣고 세차게 흐트러트렸다.
“2문제나 틀렸다고! 으흐흐흑!”
“이 자식도 재수 없는 소리를 하네.”
아스카가 기가 막힌 얼굴로 교재를 탁 덮었다.
모든 문제가 동일한 점수라면 100점 만점에서 96점을 맞은 게 된다.
그래 놓고 저렇게 죽을 듯한 얼굴로 난리를 치다니. 시안이 웅얼거렸다.
“네가 몰라서 그래, 두 문제나 틀린 게 우리 학부에서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난 10위권 밖으로 밀려날 거야. 온갖 멸시의 시선 속에서, 이젠 차석 소리도 못 듣게 되겠지. 열등생 시안이라니! 차석이었던 내가! 아마 그렇게 되면 목을 매고 싶어질 거야…….”
아마 저 말 속에 숨겨진 주어는, 아레아인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번 ‘마법과 문화’ 시험 문제가 좀 어려웠다고 하거든. 시험장이 울음바다야.”
“뭐, 정말?”
“그래, 평균적으로 8문제 이상 틀렸다고 하니까 네가 시험을 나쁘게 본 편은 아닐 거야.”
“너는 몇 점인데.”
“나야 당연히 만점이지.”
기대에 찬 시안의 눈빛이 팍 죽었다. 자리에 앉으며 아레아가 냉담하게 덧붙였다.
“아, 물론 발표 난 객관식 기준. 논술 시험 결과는 아직 모르지만, 나보다 더 점수를 잘 받은 녀석은 없을걸.”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현실이기도 했다. 책상에 턱을 붙이고 시안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나, 시험 기간 때 너와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바닥을 치는 느낌이니까.”
“만년 차석이면서 새삼스레 나와 비교할 것 없지 않나. 어차피 비교가 안 되는데.”
“아레아, 너!”
시안이 고개를 팍 들었다. 유들유들한 시안답지 않게 발끈한 눈치였다.
중간고사 시작하기 전부터 차석 자리도 놓칠 것 같다느니, 어쩌느니 푸념하던 건 괜히 한 말이 아니었다. 그도 꽤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싸늘한 시선이 꽂히자 시안은 바로 수그러들었다.
“됐다. 내가 앓느니 죽지.”
‘이 녀석도 강자를 알아보긴 하는군.’
헬무트는 생각했다. 그의 주변은 인간계의 평균 수준에 비해서 상대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맨날 당하는 시안이 불쌍해 보였는지 아스카가 위로랍시고 나섰다.
“야, 시안. 저 녀석도 앞으로 있을 시험에서 한두 문제 정돈 틀리겠지. 네가 앞으로 시험 잘 보면 되잖아. 차석이나 수석이나 한 끗 차라고.”
위로가 아니라 자신이 차석으로 예상되니까 밑밥을 깔아두는 것 같았다.
시안이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몰라서 그래. 아레아 저 녀석, 입학시험만 만점 받은 게 아니거든! 저 괴물 같은 녀석, 작년에도 두 학기 연속 전 과목 만점이었어.”
“아, 그래…….”
‘뭐 이런 게 다 있지?’
아스카가 마물 비슷한 걸 보듯이 괴이한 눈으로 아레아를 쳐다봤다.
아레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책을 펼쳐 들 뿐이었다.
학습실은 이내 조용해졌다. 시험 기간에 어울리는, 딱 좋은 정적이었다.
*
중간고사에서의 두 번째 대련은, 첫 번째 대련보다 살짝 늦게 끝났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노골적으로 ‘봐주고 있다’티가 났다.
이번 대련 상대는, 저번 주에 상대해 본 적 없는 녀석으로 샤를로트에 비해선 좀 처지는 상대였다.
시험이 끝나자 에단 교관이 그에게 흐뭇한 시선을 주었다. 기분이 좋은 듯했다.
헬무트가 1학기에 수석을 차지한다면 그의 후견인인 에단 교관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피후견인의 훌륭한 성적은, 후견인의 명예와 직결된다.
‘이젠 가장 어려운 시험이 남았군.’
학부 시험을 제쳐 두고 헬무트는 생각했다. 사실 학부 시험, 그것도 가장 높은 점수 비중을 차지하는 실기가 그에겐 제일 쉬웠다. 교양 과목이 가장 어려우니 문제지.
‘학부 수석이라…….’
헬무트는 아레아가 그토록 의미부여 하는 자리를 차지하면 자신이 어떤 소감을 느끼게 될지 궁금했다.
아마 그 기분은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