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1
10
헬무트
10화
헬무트는 남자다. 파헤의 숲에서 최초로 본 인간인 다리언도 남자다.
뽀얗고 둥글둥글하며 뼈대가 가는 여자들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척 보기에도 노동에 종사하는 왜소한 사내들과는 다른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안색이 좋지 않았다. 창백하고, 두려움에 떠는 표정.
덩치 큰 사내 몇몇이 양몰이를 하듯 그녀들을 다른 건물로 이동시켰다. 단단히 문을 닫고 빗장까지 대었다.
-누구 맘에 드는 여자라도 있냐?
엘라가가 갸르릉 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물었다.
“맘에 들다니? 모르는 인간인데.”
굳이 느낀 감상이라면, 색다르게 생겼다 정도일까. 엘라가는 뭔가 반응을 기대하기엔 헬무트가 너무 어리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너도 아직 어린애였지.
“무슨 소리야. 근데 왜 저 여자들은 집에 우르르 들어가 있지? 낮이잖아.”
남자들이 바깥에서 일하면 여자들은 안에서 일한다.
하지만 저기 저 하얗고 고운 여자들은 아예 어떤 일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꼭 인간의 지배 계층처럼 말이다.
-저 여자들은 제물이야.
“제물?”
-나호놈은 육질이 연하고 소화가 잘되는 인간 암컷을 선호하지. 하얗고 고운 살과 근육 없이 부들부들한 몸을 가진 저 암컷들은 나호에게 바치는 제물이 된다. 너무 작으면 먹을 게 없으니 성숙해질 때까지 관리해서 길러 내지. 그래서 제물로 바쳐질 여자들은 저렇게 따로 가두어 키우는 거다.
“저 여자들은 그럼…….”
-파헤의 숲에서 나고 자란 가축들. 인간 마을이라곤 여기밖에 없으니. 짧은 생이나마 마음껏 먹고 마시며 안전하게 사는 대신 성년이 되기 전에 나호의 한 끼 식사 거리가 된다. 놈은 먹이의 공포와 고통을 즐기면서 천천히 입속으로 밀어 넣지. 변태 같은 놈!
엘라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헬무트는 여자들이 갇힌 건물을 빤히 들여다봤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파헤의 숲에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군락을 이루고 살다니.
마물들은 약하고 살이 부드러운 인간을 먹잇감으로 선호한다.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다.
만약, 아주 강력한 마물의 노골적인 수호가 있지 않았다면.
“나호가 저 마을을 지켜주는 대신, 여자들을 제물로 받는 건가.”
-그래, 정작 유지시키는 건 인간 녀석이지만 말이야. 저 마을을 다스리는 인간이 있다. 저기 있는 인간들 모두 나호의 가축이고 그 인간은 나호의 대리인이지. 남자들은 노동으로 마을을 유지하고, 개중 제일 충실한 놈들에게 상으로 여자를 줘서 교미를 시킨다. 그렇게 일정 수를 유지한다.
“그래서 농장이라는 거로군.”
-자, 저기 봐. 우두머리가 나타났다.
비열한 인상의 꼽추 노인이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나타났다. 그가 손짓하자,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 사내가 한 여자를 끌고 나왔다.
겁에 질린 채 바들바들 떠는 여자의 턱을 올려 본 노인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아아악!”
여자가 지르는 비명이 이곳까지 닿아 피부가 찌릿했다. 바둥거리는 여자는 입이 틀어막힌 채 사내들에게 끌려갔다.
“저자가 대리인인가.”
헬무트는 불현듯 다리언이 한 말을 떠올렸다. 저 마을에, 인육을 즐기는 인간이 있다고 했었지.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법을 알고 있는 그가 저자인가.
“저 여자를 어쩌려는 거야?”
-잡아먹거나 교미하거나, 나호에게 바치겠지.
속이 메슥거리는 말이었다. 어쩔 수 있는가. 파헤의 숲에서 살아가기 위해 형성된 인간들의 생태계. 운 좋게 엘라가의 수호를 받고 자라난 그가 평할 자격은 없다.
-저 인간, 어떻게 아는 건지 떨어지는 인간들을 잘도 주워오더군. 다리언이라는 그 인간이 이십 년 전에 저 마을을 반쯤 박살 냈는데. 벌써 복구가 다 되었어. 너도 운이 조금만 나빠서 나호의 영역에 떨어졌으면 저 농장의 가축이 되었을 거다.
“엘라가는 왜 나를 키웠던 거야? 날 돌보기 귀찮았으면, 저 마을에 던져두었으면 되었잖아.”
새삼 궁금해진 헬무트가 묻자 엘라가는 침묵했다. 사실 잡아먹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살려두었고, 먹을 것을 주었고, 그러다 보니 기르게 되었다. 그 ‘어쩌다 보니’를 설명할 길은 없었다.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 생명을 차마 집어삼킬 수 없었던 그 감정을, 인간이라면 온갖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표범이었고 파헤의 숲의 마물이었다. 엘라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나호의 가축을 늘려 줄 필요는 없잖아.
나호에게 득이 되기 싫어서 헬무트를 키웠다. 누군가가 싫어서 그랬다고 하기엔 엄청나게 번거로운 일이라 설명이 되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엘라가는 그런 성격이니까.
“그렇구나.”
-돌아가자.
툭 내뱉은 엘라가가 꼬리를 들었다. 헬무트는 또다시 다가온 고역스러운 시간에 인상을 썼다.
그들이 막 영역을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이런, 이런 이게 누구야.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한 헬무트는 눈을 크게 떴다. 둔중하게 공기를 짓누르는 마기가 폐부를 압박했다. 그런데도 소리 하나 없었다. 오싹했다.
움직임을 멈춘 엘라가가 안면을 굳히며 헬무트를 제 뒤에 놓았다.
-나호.
-이거, 엘라가잖아.
-내 영역엔 무슨 볼일이지?
스스스스. 바닥을 쓸고 이동하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스산한 기운을 뿜어내며 느릿하게 다가서는 기척.
헬무트는 엘라가의 몸 너머로 똑똑히 보았다. 거대한 전신에 괴괴한 잿빛 안개가 끼어 있는 모습. 형상화된 마기. 샛노란 눈이 유황불처럼 번뜩였다. 그 눈은, 두 쌍이었다.
두 쌍의 눈이 악몽처럼 허공을 미끄러지는 듯이 유영하고 있었다.
-……안 자고 있었냐?
-내 영역에 네 노린내가 풀풀 풍기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자겠어? 안 그래?
-네놈은 몸이 뜨거워서 냄새가 아주, 멀리까지 나거든.
쉭쉭 거리며 두 개의 음성이 엇갈렸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안개가 희미해지고, 마침내 헬무트는 흉악스러운 두 개의 뱀 머리를 목격했다.
하마터면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저절로 다리가 덜덜 떨렸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인간을 공포로 실신하게 만들 법한, 사악하고 끔찍한 모습이었다.
잿빛과 흑색이 뒤섞인 몸은 한없이 길 것이다. 과연, 동의 지배자라 불릴 만한 마물.
두 쌍의 눈이 헬무트를 발견하고 가늘어졌다.
-어디 보자, 내 마을에서 인간 놈을 훔쳐갈 셈인가?
-감히 내 영역에서 도둑질을 해?
쉭쉭 거리는 소리가 빨라졌다. 엘라가는 이를 드러냈다. 마기가 담긴 으르릉거림이 울려 퍼지자 헬무트는 숨을 헐떡였다. 심장이 짓눌린다.
발톱을 숨기고 있을 뿐 엘라가 역시, 나호 못지않은 마물 중의 마물이었다. 그 마기가 숨 막힐 만큼 강렬했다.
-누가 도둑질을 한다는 거냐? 이 녀석은 네 농장에서 데려온 게 아니거든?
-그러면? 누굴까. 인간 아이라.
-아아, 들은 적 있지. 네가 기른다던 그 새끼 인간인가.
-키워서 양이 많아지면 그때 잡아먹을 셈이지?
-그건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야. 수컷은 새끼일 때 잡아먹는 게 가장 맛좋은 법이지.
-어때? 내게도 한입.
두 개의 뱀 머리가 수다스럽게 교대로 말하며 혀를 날름거렸다. 공기 중에 묻어난 헬무트의 체취를 맡으려는 듯이 보여 오싹했다.
평상시에 나호를 만나면 노골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냈던 엘라가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엘라가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거절하지. 어차피 네놈은 인간 암컷을 선호하잖아. 네놈 입맛에는 안 맞을 텐데.
-그래, 안 그래도 마침 오늘 인간 암컷을 먹으러 온 참이었지.
-에루고가 날 위해 준비해 두겠다고 했거든.
‘아까 그 인간 여자가 오늘의 제물이었나? 그럼 나호 녀석이 여기 있는 게 그 때문이었군.’
바로 몸을 뺐어도 늦을 것 같지만. 엘라가는 혀를 찼다. 때를 잘못 맞췄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뼈가 야들야들하고 맛있지. 적당히 근육이 붙어서, 그래, 꼭 연골을 먹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이 아이.
-내가 싫어하는 냄새가 나는군.
고개를 갸웃한 나호가 두 개의 뱀 머리를 확 들이밀었다. 덮쳐들 듯이 가까워진 머리가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뚝뚝 떨어진 독액이 치직 바닥을 태운다.
-크아아아앙!
성난 포효가 공기를 찢어 냈다. 그 파동에 거센 바람이 후려친 듯 숲이 흔들리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속이 으깨지는 것 같았다. 헬무트는 몸을 웅크렸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펼쳐질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누가 승자가 되든 거기에 휘말린 헬무트가 온전하긴 힘들 것이다.
-어디다가 그 추한 머리를 들이밀어! 싸우자는 거냐?
엘라가는 도리어 나호에게 이를 드러냈다. 헬무트의 안위는 자신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마음껏 무시무시한 마기를 내뿜는다. 어쩐지 연기 같지 않았다.
두 개의 머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이 태연하게 중얼댔다.
-아아, 이 냄새는 그래. 그 인간, 다리언이로군.
-인간이 혼자 자식을 낳을 리는 없으니 다리언의 자식은 아닐 테고…… 저 아이는 뭐지?
-다리언과는 무슨 관계지?
다행인 건, 마물에겐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호는 인간의 생태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인간은 공들여 길러 낼 가치가 있는 먹을거리에 불과할 뿐이니.
-무슨 관계? 이 애가 다리언의 집에서 옷이란 걸 훔쳐서 냄새가 나는 것뿐이다. 아무 관계도 없어.
-옷이라고? 그래, 인간들은 외피를 만들어 입었지.
-짐승의 털가죽을 흉내 낸 것 같은 조잡함. 저런 걸 몸에 걸치다니!
-네 인간들도 옷은 입거든?
-그래서 따라 한 건가? 네 털이나 좀 잘라 주지 그랬니.
나호가 비늘을 번쩍이며 웃었다. 인간처럼 나호에게도 짐승의 털가죽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뱀피는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호의 비늘은 날아오는 화살도 가볍게 퉁겨 낼 정도로 단단했다. 마기를 싣지 않고선 엘라가의 발톱도 나호의 비늘을 찢어발길 순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