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10
109
헬무트
109화
헬무트는 그날 내내 공부하다가 밤늦게야 잠들었다. 야식 시간은 사라졌고, 학습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스카도 아레아도 시안도 모두 말없이 책만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필기시험 기간 동안은 수련은 중단해야겠군.’
특히 아스카가 열심히 하는 게 거슬린다. 실기 시험을 본 이후로 부쩍 의욕적이었다.
그게 헬무트를 이기고 싶어선지, 아레아가 운동장을 돌게 하고 싶어선지는 모르겠지만.
모처럼 아침 수련도 아예 손 놓고 학습실에 들어선 헬무트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역시 여기 있었군.’
“오늘이 ‘마법의 이해’ 시험이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본 아레아가 물었다.
“맞아.”
“내가 마지막으로 좀 봐 줄까?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시험공부는?”
“난 진작에 시험공부 같은 건 다 끝냈어. 그냥 복습하고 있었던 거야. 이미 아는 거, 시험 전까지 질리도록 되풀이하면서. 네 것 봐 줄 시간 정도는 있어.”
마법 학부 수석다운 발언이다.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헬무트는 아침부터 두 시간가량 아레아가 낸 문제를 풀었다. 답지를 본 아레아는 그럭저럭 만족한 눈치였다.
아레아도 헬무트에게 엄청나게 높은 수준을 바라진 않았다. 애초에 그의 눈높이를 충족시킬 만한 답지를 써낼 수 있는 녀석은 마법 학부에서도 드무니까.
“이 정도면, 실수만 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나오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말투였다. 왠지 압박감이 느껴진다.
아레아가 또렷한 눈빛으로 헬무트를 응시했다. ‘시험을 잘 봐라, 무조건 잘 봐야 한다. 못 보면 죽는다’ 이런 환청이 들렸다. 극성맞은 부모보다도 더하다.
하지만 그 눈빛을 받아 내는 헬무트는 그런 걸 일일이 의식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실수를 한다는 건?”
“범인의 기준에서 실수란 이런 거지. 잉크 엎질러서 기껏 다 쓴 답안지를 망가트린다거나, 필기구를 떨어뜨리거나 긴장감에 논리의 흐름을 놓쳐 버리는 거.”
“아아.”
“몸 상태는 괜찮겠지? 물은 마시지 마.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지 모르니까. 시험장엔 일찍 일찍 들어가고.”
아레아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시험 문제 풀다가 졸 수도 있으니 아침은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어. 정신이 흐려지니까.”
“……그래.”
헬무트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레아가 아침부터 학습실에서 헬무트의 시험 준비를 도와준 이유를.
아레아는 부쩍 초조해하고 있었다. 혹시 정말로 자신이 운동장 100바퀴를 돌게 될까 봐.
자기가 직접 보는 시험엔 자신감이 있어도 헬무트의 시험엔 확실한 자신이 없을 테니까.
‘아스카가 나보다 공부를 덜 하긴 했지만, 그 녀석 시험이 더 쉽지.’
아스카는 실기 시험을 괜찮게 봤다고 말했다. 헬무트와 붙은 것도 아니니, 그도 최고등급을 받아 냈을 거다.
객관식 문제처럼 일일이 점수를 매길 수 없는 검술 대련은 그래서 헬무트한테 손해였다.
“시험 잘 봐.”
“너도.”
헬무트는 인사를 하고 교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한 주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곧 아카데미에서의 첫 시험이 끝나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
“아, 드디어 끝났다.”
최종적으로 검술 학부 실기 시험을 보고 나오면서 아스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험은 그럭저럭 잘 본 표정이다.
헬무트도 그랬다. 차분하게 시험을 봤다. 그가 본 시험 중 가장 쉬운 축에 드는 시험이었으니 긴장할 것 없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도 아니니까.
“이제 반만 더 버티면 돼. 반 학기만 정학을 안 당하면…….”
“안 당하면?”
“용돈이 늘어나지.”
그의 집안에 대해서 숨기려 했던 아스카였다. 헬무트도 눈치챌 만큼 표가 났다.
지금도 별거 아닌 소리를 해 놓고는 지레 움찔거린다.
시안이라면 매우 궁금해 했겠지만, 헬무트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아스카의 존재란 그냥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 족했다.
“넌 뭐 죽어라고 공부하더니, 중간고사 1등 할 자신 있어?”
“당연히.”
가장 열심히 준비했던 ‘마법의 이해’ 시험에선 꽤 재밌는 문제가 나왔다. 그건 아레아가 예측하지 못한 유일한 문제였다. 배점은 적었다.
‘당신은 우연히 금지된 어둠의 힘을 얻었다. 힘을 잃으면 당신은 죽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수업의 내용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서술하시오.’
헬무트는 막힘없이 답을 써내려갔다. 그 문제를 본 순간 알았다.
자신보다 더 그 문제에 자신 있게, 그리고 확고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걸.
‘티가 나진 않았겠지.’
파헤의 숲의 ‘파’짜도 꺼내지 않았으니까.
민감한 주제였지만 그의 답안에서 캐낼 건 없을 거다. 생각에 빠진 헬무트에게 아스카가 물었다.
“마법사들이야 원래 성적에 집착하는 족속들이고 아레아야 좀 심한 녀석일 뿐이지. 그 녀석은 그렇다 치고, 넌 왜 이렇게 열심히 하냐. 난 용돈이라도 더 받지만, 넌 그런 거도 없잖아. 에단 교관님이 뭐 해 주나?”
헬무트는 간단히 답했다.
“남들보다 위에 있는 게 좋아.”
파헤의 숲에선 납작 엎드려 살았다. 아주 긴 세월을. 강력한 마물 속에서 그는 먹잇감에 불과했다.
다리언에게 검을 배우면서, 조금씩 강해져서 최하단 지층에선 좀 올라섰지만, 그래도 떳떳하게 지상에 고개를 들이밀 수는 없었다.
강해져 봤댔자 엘라가가 꼬리로 퍽 치면 날아가서 바닥에 처박히기 일쑤였으니까.
수명이 거의 끝을 다해가 기운이 빠져가는 다리언한테도 이겨 본 적이 없다. 그게 헬무트의 위치였다. 밑바닥.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달랐다. 그는 페이스 용병단 사람들을 구해 줄 만큼 강했고, 블랙 호크에서 보낸 2급 용병 두 명을 해치울 만큼 강했다.
헬무트는 지상, 혹은 그 위에 있었고 그의 아래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온 헬무트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이 달라진 상황, 달라진 자신의 위치가.
아직은 몸을 숨겨야 한다지만, 그래도 강자의 반열에 올라선 이 현실이.
아카데미의 시스템은 노골적으로 학생들의 우열을 가른다. 성적이란 방법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성적을 받아 내서 위에 서고 싶다. 헬무트에겐 자연스러우면서도, 남들보다 강렬한 열망이었다.
아스카가 혀를 내둘렀다.
“평민이 하기에는 위험한 소리다. 너 같은 녀석 기사로 뒀다간 반역을 걱정해야겠어.”
“난 기사가 될 생각이 없어.”
헬무트는 딱 잘라 말했다. 체링겐 후작가의 제니아를 호위하면서 기사들이 뭘 하는지 관찰했다.
기본적인 건 용병과 비슷했지만, 주인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잠깐 의뢰에 묶인 용병보다 훨씬 예속된 직업처럼 느껴졌으니.
“뭐, 진로 이야기를 하기는 이르지만 아카데미를 나오면 평민은 기사가 되거나 용병이 되지. 주로 기사가 된다고 하던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레타 아카데미 검술 학부 출신들 실력은 인정해 주니까 말이야. 헬무트, 너는 용병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기사 쪽은 아예 생각도 안 하는 거야?”
아스카답지 않게 진지한 질문이었다.
“일단은 그래.”
“상급 용병이면 돈은 많이 벌겠지만, 기사는 부에다가 명예까지 따라온다고. 평민이랍시고 얕보던 귀족 놈들도 기사가 되면, 준 귀족이 되는 거니까 함부로 굴지 못해.”
“용병일 때도 딱히 함부로 구는 귀족은 못 만나 봤는데.”
제니아는 헬무트한테 거의 관심이 없었다. 집사는 그럭저럭 친절했고 기사들이라고 해서 그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블랙 호크의 건달패들이 그를 무시했다면 모를까, 바덴에 오기 전에는 그랬다.
‘이 바덴이 문제인가.’
“운이 좋았던 거겠지. 여기 귀족 녀석들처럼 구는 게 보통이라고. 제 기사들은 아끼면서 용병들은 방패막이로 쓰는 귀족 의뢰인도 많다던데.”
“그럴지도.”
의뢰라고는 딱 두 번, 아니, 바덴에 와서 맡은 것까지 세 번 맡아 봤으니 뭐라고 말할 것도 없다.
“너 정도 실력이면, 기사가 되고 나서 귀족까지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그것도 꽤 높은 귀족 말이지. 실력 좋은 검사란 희귀한 존재거든.”
왠지 꼬드기는 것 같길래 헬무트는 그를 묘하게 쳐다봤다.
“그래서 내가 기사가 되길 바란다는 거야?”
“아니, 당연히 선택은 네 몫이지만 너무 일찍부터 기사가 되는 걸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내가 보기엔 용병이나 기사나 장단점이 뚜렷하거든. 어느 나라의, 어느 가문의 기사냐에 따라 다르지만 기사도 괜찮다는 뜻이야.”
헬무트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아스카가 맞는 소릴 할지는 좀 의심스러웠으나 선택지를 열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스카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다, 넌 누굴 섬길 성격 같아 보이진 않으니 마물 사냥꾼 같은 거나 하는 게 좋겠다.”
그거야말로 마기와 멀어져야 하는 헬무트가 택해선 안 되는 직업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라.’
아득하도록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헬무트가 그리는 미래는,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찾는 것도, 다리언의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헬무트는 그런 자신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후자야 그렇다 치지만, 전자가 흐릿한 것도 이상하다.
그는 어머니를 찾고 싶었다. 분명히, 뿌리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대단히 서두를 만큼 간절하진 않은 게 사실이었다.
실제로 헬무트는 느릿하게, 인간 세상에 적응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헬무트는 파헤의 숲을 나왔고 그 때문에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열망이 상당 부분 충족된 것이다.
나머지는 서서히 이루어야 할 과정이었다. 목표점은 그게 아니다.
‘내 목표는, 내가 바라는 건…… 강해지는 것. 이 세상 누구보다도.’
누구도 그를 다시 파헤의 숲에 처박을 수 없게. 누구도 그의 위에 설 수 없게. 다리언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힘을 가지는 것.
검사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고, 제 안에서 꿈틀대는 어둠의 싹마저 지배하게 되는 것. 누구도 강제할 수 없도록 자신이 온전히 제 삶의 주인이 되는 것.
헬무트는 그것을 원했다. 열망했다.
누구한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본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는 죽었거나 파헤의 숲에 있다.
어둠의 싹이란 원죄를 타고난 한, 헬무트는 이 깊고 새카만 비밀을 홀로 간직해야 했다. 그는 오래도록 고독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누군가가 나타날, 그 존재할지도 알 수 없는 미래까지.
다행인 것 하나는, 헬무트가 고독을 견뎌 낼 만큼 강인하다는 거다.
헬무트는 잠시 후 물었다.
“그러는 너는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뭘 할 건데?”
그의 목표가 그렇다면, 그래도 평범한 축에 드는 인간인 아스카의 목표는 어떨까.
“나? 난…….”
아스카가 당혹스러운 듯이 눈을 깜빡였다.
“뭐하지?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용병이니 기사니 아는 척 실컷 설교해댄 것치곤 황당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