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11
110
헬무트
110화
아스카는 곧 단순하게 결론을 내렸다.
“뭐, 난 실력이 있으니 그때가 되면 뭐하든 먹고 살겠지.”
아스카는 자신할 만큼 실력이 좋았다. 하지만 그에게 얻어맞은 귀족가 자제들이 한둘도 아닌데 그를 기사로 써 줄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보복할 셈이라면 모를까.
“졸업하고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귀족들을 그렇게 뚜들겨 패고 다녔겠지.”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졸업하고 나서 네가 살아 있을지가 제일 궁금하다야. 바덴 앞에서부터 병사가 포진하고 있는 거 아니야?”
시안이었다. 말투는 평소 같았지만 왠지 우중충한 얼굴이었다. 주먹을 들려던 아스카도 멈칫할 만큼.
“뭐야, 시험 망했냐?”
“그럴 리가. 이대로만 가면 이번 학기 성적도 저번 학기와 비슷할 거야.”
“또 차석?”
“그러는 넌 어떤데.”
“난, 뭐 나야…….”
대충 대답하려던 아스카가 멈칫했다. 그제야 잊고 있던 게 기억난 탓이다. 시안이 아련한 눈길로 헬무트와 아스카를 번갈아 봤다.
“날 잘 기억해 둬. 난 운동장을 돌다가 죽은 그레타 아카데미 최초의 마법사로 기억될 테니까.”
“야, 꼭 내가 졌으리란 보장은 없다고. 아직 성적 발표 안 났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아스카의 목소리는 기어가듯이 작았다. 시안은 제 머리를 헤집었다.
“내가 미쳤지. 왜 그따위 내기를 해선!”
아스카따위한테 뭔가를 거는 게 아니었다. 아스카는 슬쩍 발뺌했다.
“아, 나는 오늘은 이만! 한숨 푹 자야겠다. 아카데미 입학한 이래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 본 건 처음이야.”
보통은 뒤풀이하자고 말하는 쪽은 시안인데, 그는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아스카가 재빨리 사라지자 시안이 헬무트를 노려봤다. 온화한 인상의 그가 노려본대 봤자 별로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가 투덜거렸다.
“헬무트, 네 엉터리 답안지가 날 낚았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우는 거야?”
“집중하면 돼. 성적 발표는 아직 이라지만, 운동장은 미리 오늘부터 돌아 두는 게 어떨까? 네 체력을 생각하면 오늘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텐데.”
헬무트는 냉담히 대꾸하고 몸을 돌렸다. 제가 아스카한테 비꼬던 그대로 당한 시안이 입을 떡 벌렸다.
“와, 너!”
“나도 들어간다.”
헬무트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미뤄 둔 수련을 할까 했지만, 더 이상 뭔가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게을러진 건가.
요새 맨날 하얀 것과 검은 것, 종이와 글씨를 종일 들여다본 탓에 눈이 뻑뻑했다.
아직 기력이 있는 몸과는 달리 정신은 쉬고 싶다고 외치고 있다. 이런 느낌은 낯설었다.
‘일단은 쉬어야지.’
“시험은 어땠어?”
방으로 돌아오니 먼저 와서 책상 위의 교재를 정리 중이던 아레아가 물었다.
“문제는 거의 네가 말한 대로 거의 나왔어. 그런데 독특한 문제가 하나 있더군.”
“뭔데?”
헬무트는 기억을 더듬어 ‘마법의 이해’ 시험에서 유일하게 아레아가 예측하지 못한 문제를 읊어 주었다.
‘당신은 우연히 금지된 어둠의 힘을 얻었다. 힘을 잃으면 당신은 죽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둠의 힘이라.”
아레아가 미간을 좁혔다. 헬무트는 어쩐지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그 교수님은 매번 하나쯤 그런 문제를 내. 점수 기준은 모호하지만, 성의껏 썼으면 대체로 감점은 없는 편이야. 넌 어떻게 답했는데?”
헬무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둠의 힘을 받아들인다. 살아서 맞서 싸우며 그 힘을 다스릴 방법을 찾겠다.”
생을 포기하는 선택은 애초에 선택지에서 배제했다. 어둠의 힘을 가진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어떻게 할지는 그의 소관이다.
신전의 척살 대상이 되더라도, 싸워서 버티며 언젠가는 어둠의 힘조차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리라.
헬무트의 말에서 의지가 느껴졌다. 강렬하고 단호한, 그리하여 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두 부숴 버릴 만큼 파괴적인 의지.
압박감이 몸을 짓눌렀다. 아레아는 흠칫 놀랐다.
‘왜 이런 느낌이…….’
아레아는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나쁜 답은 아니네. 교수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룩센 교수님이 나쁘게 생각할 답이 아니야.”
헬무트는 나직이 물었다.
“너라면, 어떤 답을 썼을 것 같아?”
이상하게도, 아레아의 답변이 기다려졌다. 정답에 가까운 답이 아니라, 그의 답변이.
“나라면…….”
고민하던 아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보통은 신전을 찾아가 답을 구한다고 할 거야. 그게 정석이니까. 어둠의 힘은 신전의 관할이지. 그리고…… 귀족 출신들이 그 외의 답을 쓰기는 어렵겠지.”
마법사들이 주로 듣는 ‘마법의 이해’ 수업이다. 어둠의 힘을 가졌다는 건, 마법사에게 흑마법사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아마 시험을 보는 녀석들은 이를 사상 검증 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최대한 착실하고 모범적인 답안을 썼을 터.
하지만 헬무트가 알고 싶었던 건 아레아의 답안이었다. 보통의 답안이 아니라.
그가 재차 묻기도 전에, 아레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라면 너와 비슷한 답을 냈을 거야.”
“신전과 적이 되더라도?”
“신전과 적이 되더라도.”
딱 부러지는 대답에 헬무트는 아레아를 쳐다봤다. 그의 답을 들은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마음속에서부터 채워지는 느낌.
제 안 깊숙이 묻어 둔 뭔가를 공유한 듯이. 기묘하면서도 충만했다.
아레아가 부연했다.
“어차피 루멘의 신전에서는 어둠의 힘에 대해선 완고해. 신전에 도움을 청한다고 해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어? 뻔한 거지.”
어차피 아레아는 신전과 적이 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꺼릴 필요가 없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까.
평생을 신전을 피해서 살거나,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운명. 아레아가 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그것은 피할 수 없으리라.
그 때문에 아레아는 차라리 힘을 쌓아 신전과 대적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너 그런 소리, 내 앞에서는 해도 상관없지만, 조심해. 아무 데서나 하지 말고. 혹시 신전에 고발당하면 곤란해질 테니까.”
“그래.”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아는 되확인하듯 물었다.
“어쨌든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시험은 잘 봤다는 거지? 그거 빼고 다른 것도 모두?”
“물론.”
“그렇다면 검술 학부 수석은 네가 되겠군. 시안 녀석 운동장 도는 꼴이 기대되는데?”
아레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서렸다.
“수고했어.”
말을 마친 그는 피곤하다며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헬무트도 곧 침대 속으로 몸을 묻었다. 시험 끝났으니 뒤풀이다 뭐다 번잡한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헬무트와 그 친구들은 휴식이 우선이었다.
눈을 지그시 내려 감자 어둠이 덮였다. 헬무트는 무의식에 빠져들기 전,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전부터 깨닫고 있었던 것이 좀 더 선명해졌다. 아레아는…… 달랐다. 다른 누구와도.
그렇다 한들, 그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
다음날, 눈이 일찍 떠졌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파란 새벽이었다.
푹 쉰다고 해도, 헬무트는 늘어져라 낮잠을 잔다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저녁부터 잠들었으니 새벽엔 눈을 뜰만도 하다.
조용히 잠자리에서 벗어난 헬무트는 목검을 집어 들었다. 땀을 좀 흘리고 올 셈이다.
개인 수련실에서 오랜만에 완전히 검에 몰두했다.
모든 깨달음은 성취에 영향을 미친다. 비스는 지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으나 반대로 지성은 비스에 영향을 미친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의 성장을 바탕으로 하는 힘.
수련을 뒷전에 두고 책만 팠던 헬무트는 자신이 어느덧 계단 하나를 올랐음을 깨달았다. 엄청나게 눈에 띄는 성장은 아닐지라도.
‘조금 늘었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헬무트는 저릿저릿한 손아귀를 내려다봤다.
성장은 늘 기분 좋은 일이다. 아카데미에선 종일 수련할 수 없으니 성취가 더뎌지지 않을까 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아카데미 생활은 헬무트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이었고 그 다채로움이 그의 정신을 성장시켰다. 그것이 수련과 상호 작용하고 있었다.
‘의외의 효과로군.’
적성이 맞지 않고, 인내해야 하고, 감수해야 한다고 느꼈던 모든 일들이 헬무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아카데미란 곳, 나쁘진 않은 듯하다.
‘슬슬 배가 고픈데.’
그가 일어났을 때는 완전히 새벽이었다. 문을 연 가게가 없어서 아침도 먹지 못했다. 아마 지금은 정오에 가까워진 시각.
‘그러고 보니 시험이 끝났으니 휴일이군.’
쿠드로 저택에 가서 식사해도 좋을 것이다. 거기도 수련할 장소는 있으니까.
헬무트는 바로 기숙사로 향했다. 대충 몸을 씻고 출발할 셈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목에서 그는 아스카를 만났다.
“어라? 너, 수련하고 온 거야? 시험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지독한 놈이 있냐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스카도 그런 말 할 입장은 못됐다.
“그러는 너야말로.”
목검을 들고 선 아스카에게선 땀 냄새가 풍겼다. 고된 수련의 흔적이다.
대련에서 진 이후로 부지런해졌다 싶더니, 시험이 끝났다고 해서 느슨해진 건 아닌 듯하다.
“아니, 뭐. 요새 맨날 책을 붙들고 있었더니 좀이 쑤셔서 말이지.”
한 번 졌다고 계속 질 생각은 없다. 당연히 제 것인 줄 알았던 수석 자리였다.
아스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분함을 느꼈다. 일찍 일어나 수련장으로 향할 만큼 자극이 일었다.
헬무트는 생각했다.
‘재능에 노력이 더해지면, 더 강해지겠군.’
방학 때 특훈을 한다니 여름 방학이 끝날 때까지 이 추세를 유지한다면 아스카는 검사로서 훌쩍 성장해 있을 것이다.
물론, 경쟁자라고 말하기엔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겠지만.
헬무트의 성장세는 아스카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위로 올라갈수록 성장은 차츰 더뎌지기 마련이니.
‘아는 녀석인데 이왕이면 강한 게 낫겠지.’
헬무트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스카가 물었다.
“너, 점심 먹으러 가는 거야?”
“그래.”
“혹시 쿠드로 저택으로 갈 거야?”
“맞아.”
“그럼 나도 같이 가. 너 혼자 맛있는 거 먹지 말고.”
쿠드로 저택의 음식은 맛있었다. 하지만 헬무트가 보기에 아스카가 거길 찾으려는 이유는 식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작년에 사고를 쳐서 그런지 성적이 나아지기 전엔 용돈을 별로 못 받는다고 했으니까.
“좋을 대로 해.”
둘은 함께 기숙사로 돌아갔고, 거기서 시안을 만났다.
“이거 아주 모범생들이네. 검술 학부라서 그런지 체력도 좋아. 너희들도 참 대단하다. 아우, 땀냄새 나.”
투덜거리며 시안이 코를 움켜잡았다.
“그러지 말고 휴일인데 좀 놀러 가지. 슬슬 점심시간이잖아?”
“안 그래도 쿠드로 저택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너도 가던가.”
초대할 권한은 이쪽에 있는데 당연한 듯이 권유한다. 시안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쿠드로 저택이라고? 당연히 가야지. 그러고 보니 니들 여기서 안 마주쳤으면 나 빼고 갔을 거 아니야? 너무한데.”
“원래 저 의리 없는 녀석이 혼자 가려고 했던 거야.”
“헬무트, 정말 실망이다.”
“…….”
왠지 일이 거창해졌다. 20분 후에 기숙사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헬무트는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는 마침 불이 켜져 있었다. 깨어난 아레아가 책을 읽고 있었다.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씻고 나가려던 헬무트는 문득 물었다.
“아레아, 쿠드로 저택에서 점심을 먹을까 하는데 혹시 너도 같이 갈래?”
“너도라는 건?”
시안과 아스카가 함께라는 소리에 거절할 줄 알았던 아레아가 따라나선 건, 의외로운 일이었다.
헬무트가 변했듯이, 그도 변해가고 있었다.
다사다난한 중간고사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성적이 발표될 때까지는 당분간 평온할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