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19
118
헬무트
118화
“이상하군.”
헬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지만, 어차피 위협은 안 된다.
설령 덫에 걸렸더라도 비스를 썼다면 덫 이빨이 다리를 파고들지 못했을 터.
화이트가 덫에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드웨인 교수가 치료 마법을 써 줄 테지만, 교수도 학생이 아닌 짐승에까지 마법을 써야 하는 걸 썩 좋아하진 않을 테니까.
“화이트.”
그의 백마는 멀쩡해 보였다. 그쪽에 맛있는 풀이 있는지 열심히 뜯고 있다가 헬무트가 가까이 오자 고개를 들어 보였다.
역시 화이트가 제 이름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 멍청하다고 비난하기엔, 오늘 붙인 이름이다.
그동안 돌보긴커녕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은 헬무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자주 불러 줘야겠군. 기억할 수 있게.”
나름대로 처음으로 키우는 녀석이다. 마물들과 달리 순한 짐승.
엘라가가 자신의 아래에 헬무트를 뒀듯이, 헬무트도 처음으로 자신의 아래에 이 녀석을 뒀다. 조금은 애착이 생겼다.
“이리 와.”
헬무트는 화이트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풀을 배불리 먹었는지 화이트는 순순히 그에게 끌려왔다.
헬무트는 무심코 화이트를 묶어 놨던 끈을 잡아당겼다. 왜 풀렸는지 살펴볼 생각으로.
그 순간, 오싹한 감각이 일었다. 끈은 끝은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날카로운 무언가로 잘라 낸 것처럼.
*
화이트를 끌고 돌아와 제대로 묶어 둔 헬무트는 별일 없이 아까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그의 주스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헬무트는 거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
“헬무트, 숲에서 시체라도 봤어? 왜 그래.”
헬무트는 거의 항상 무표정했지만, 괜히 그동안 붙어 다닌 게 아니다. 아스카는 헬무트의 달라진 분위기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헬무트는 좀 경직되어 있었다. 놀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말할까 하던 헬무트는 다시 입을 닫았다. 아스카한테 알려 줘 봤자 난리만 칠 것이다.
범인을 색출하자고 다짜고짜 화이트 근처에 있었던 말 주인의 멱살을 잡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이쪽의 머리만 아파진다.
헬무트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누가, 왜, 어떻게.’
중요한 건 그것. 화이트를 도로 데려오면서 수상한 기척을 느끼진 못했다.
헬무트는 자리에 앉아, 화이트를 묶어 놓은 쪽을 유심히 바라봤다. 걸음으로는 오십 보가량. 꽤 먼 거리다.
말들이 여럿 겹쳐 있다 보니 여기선 화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까 화이트를 묶어 놓고 저 자리를 떠나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끈을 자른 이유는, 화이트를 이탈하게 하려고.’
가만히 있던 화이트가 돌연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이 마음에 걸렸다.
묶인 끈이 잘려 있었다면 진작 움직였을지도 모르는데 화이트는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학생들 소행은 아닐 터.
‘누가 화이트를 유인했나? 끈을 미리 잘라 놓고 유인했다면. 그렇다기에는 숲 쪽에 기척이 없었는데.’
하지만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발목이 잘릴 만한 함정. 만약, 거기에 부상을 입었더라도 비명을 지르면 닿을 거리에 마법사가 있다. 헬무트의 발목은 금방 치료되었을 것이다.
아레아의 마법을 떠올려 보건대 마법 학부 교수가 그 정도 상처를 치유하는데 어려움을 겪진 않으리라.
‘걸리면 아프긴 했겠지.’
단순히 골탕을 먹이려고? 식사하느라 신경을 빼앗겼을 때쯤, 그때 말 쪽으로 다가간 녀석이 있었나?
헬무트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만약 있었다면 시야에는 잡혔을 텐데.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해도 의식하지 않은 사실을 기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었다. 덫을 설치한 범인과 끈을 자른 범인이 일치한다면, 범인은 검술 학부 학생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여기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저 큰 덫을 숲속으로 몰래 들고 가 설치하기도 힘들다.
‘검술 학부 녀석이 한 짓이 아니라면, 범인은?’
생각보다 답이 쉽게 나왔다. 블랙 호크. 그들의 일원을 죽이고, 계획도 망쳤다. 헬무트가 바덴에서 나오는 이때를 기다려서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아니, 이상한가. 그들은 헬무트가 얼마나 강한지 안다. 이런 짓을 해서 통할 리가 없다는 걸 알 텐데.
철저한 함정을 파면 모를까, 이런 수법은 적을 경계하게 만들 뿐이다.
‘과민하게 생각할 건 없지.’
덫은 그냥 밀렵꾼이 설치해 놨고, 헬무트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제 말을 근처에 묶으며 슬쩍 화이트의 끈을 잘랐다.
화이트가 뒤늦게 변덕이 들어 숲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정리하면 편했다.
하지만 그 정리로는 납득할 수 없는,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
하나의 가정이 더 있었다.
만약 헬무트가 기척을 읽을 수 없을 정도의 강자가 은밀히 끈을 잘라 화이트를 유인해 낸 거라면. 그래서 헬무트를 거기에 오게 한 거라면.
‘하지만 덫에 걸려 봐야 어차피 치료할 수 있는데. 내가 덫에 걸렸다면 그때 공격할 셈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헬무트가 그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묘하게 으슬으슬한 느낌. 본능을 자극하는 불길한 예감. 하지만 헬무트는 곧 떨쳐 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전전긍긍하는 건, 약자의 마음가짐이다. 헬무트는 강자였다. 누가 뭘 꾸미든, 모습을 드러낼 때 박살 내 주면 그만이다.
좀 더 확실해지면, 그때 누구에게든 말을 할 셈이었다.
생각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자 아스카가 집요하게 물었다.
“그래서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러고 있었던 거야?”
뭐라고 말할까 하다가, 헬무트는 가볍게 대꾸했다.
“누가 덫을 설치해 놔서 걸릴뻔했어.”
“뭐야, 여긴 사냥 금지 구역인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덫이 있었다고?”
누군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페트리샤 교관이었다.
“어떤 자식들이 위험하게. 여긴 쉼터 근처라 그런 걸 설치해 두면 위험해. 전에도 아카데미 학생이 채집차 숲을 돌아다니다가 덫에 걸려서 다쳤다고. 어딘지 안내해 주겠어? 한 번 살펴봐야겠구나.”
“그러죠.”
헬무트는 흔쾌히 응했다. 찝찝했던 차에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헬무트는 그녀를 덫이 있던 자리로 안내했다.
“저곳에…….”
검지로 지목하려던 헬무트는 흠칫 손을 내렸다.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덫이 있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여기가 맞아?”
“……네.”
페트리샤 교관이 그 자리를 살펴봤다.
“잘못 본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잖아.”
따라온 아스카가 코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그새 곰이 물어갔을 수도 있잖아요.”
“퍽도 그러겠다!”
괜히 아스카의 머리통을 한 대 내려친 페트리샤 교관이 피식 웃었다.
“들뜬 거니? 헬무트 너답지 않구나. 그런 걸 잘못 보게. 아무튼 골치 아픈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밀렵의 현장이라도 발견한 건가 했는데.”
허탕을 쳤는데도 그녀는 기분 나빠하진 않았다.
“조금 후 출발할 테니, 부르면 바로 모이도록 해.”
페트리샤 교관이 등을 돌려 사라지자마자 아스카가 투덜거렸다.
“에이 씨, 저 여잔 내 머리가 공인 줄 알아. 자꾸 때리게. 헬무트, 너 뭐해?”
헬무트는 몸을 숙여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수풀에 미세하게 눌린 자국이 보인다.
줄기가 꺾이진 않아서, 그렇게 티는 안 나지만 덫은 이곳에 있었다. 분명히.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다시 사라졌다.
검술 학부 학생의 소행은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헬무트는 줄곧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고, 자신이 돌아온 이후로 이쪽으로 들어간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으니까.
“덫 같은 건 없다니까. 덫 유령 같은 건 들어 본 적 없는데. 너 환각을 본 거 아니야? 누가 샌드위치에 약을 탔나.”
“돌아가자.”
아스카는 갖은 불평을 해대며 얼른 그를 따라갔다. 그의 불평은 페트리샤 교관의 부당한 폭력에 대한 거였다.
헬무트는 아스카의 말을 귓등으로 받아넘겼다. 그의 신경은 완전히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재미있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공터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헬무트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그에게서 보기 드문 미소. 전의를 느낄 때의 미소다. 검은 눈동자에 살기가 스쳤다.
‘예고인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누가 이런 재미있는 장난을 치는지, 무척 기대된다. 예감이 좀 더 확실해졌다.
이번에는, 만만치 않은 적이 왔다. 자신이 기척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적이.
2급 용병 두 명을 참살한 이후로, 적수가 될 만한 상대를 만나 보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하던 터였다.
헬무트는 자신이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죽일 만한 상대였으면 좋겠군.’
살인에는 페널티가 따른다. 헬무트는 누군가를 죽이면, 어둠의 싹 때문에 고통을 느꼈다. 결코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헬무트는 자신을 노리는 그 누군가가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죽이지 않고는 이길 수 없는 상대이기를 바랐다. 고통을 감수할 만큼 말이다.
“너 지금 웃은 거야? 진짜 누가 약을 탔나 봐. 근데 네가 웃으니까 쫌 무섭긴 하다.”
옆에서 산만하게 구는 아스카의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그였다.
*
노을이 지는 시각, 그레타 아카데미 검술 학부 2학년들은 드디어 페디카 숲의 야영지에 도착했다.
야영지 입구에서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뛰쳐나왔다. 두 교관과 드웨인 교수는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 바로 말에서 뛰어내린 학생들은 엉덩이며 허벅지를 주물렀다.
오랜만에 장시간 승마를 하다 보니, 다들 몸이 뻐근했다.
“아아, 드디어 도착인가.”
“야영지라더니, 확실히 꽤 넓은데?”
야영지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넓은 공간이었다. 가장자리에는 말을 두는 곳이 있었고, 빽빽이 들어찬 천막과 야영시설이 한눈에 보였다.
가운데 빈 공간에는 불은 피워져 있지 않지만, 커다란 모닥불 자리가 있었다. 저기서 바비큐를 굽는 모양이다.
“이제, 이런 데서 모기에 뜯기면서 자야 하는 거지.”
웨슬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귀족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가문 출신. 심지어 검가 출신도 아니었다.
아카데미 기숙사 생활도 썩 몸에 맞지 않은데 야영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도련님 같은 소리를 하네.”
“도련님 맞거든?”
“학술부나 들어갈 것이지 검술 학부는 왜 들어왔냐.”
“어쩌겠냐 내 재능은 이쪽인 것을. 책 붙잡고 10분만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고 시원하게 검을 휘두르고 싶어지는데.”
“그건 인정한다. 나도 그렇거든.”
“넌 검가 출신이잖아. 도통 책을 들여다보지를 않는다고 내가 얼마나 어른들에게 눈총을 받았는데.”
“그래, 너 참 불쌍하다.”
“지금 시비 거는 거지?”
“위로해 주는 거잖아. 검술 학부 식으로.”
“미친.”
투닥거리던 그들의 시선이 문득 헬무트와 아스카 쪽으로 쏠렸다.
이왕 같은 조가 된 거, 여기까지 어울려 오긴 했는데 한 천막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문제가 되는 쪽은 아스카였다. 무슨 패악을 부릴지 모르니까.
“그래도 비 맞으면서 자는 건 아니니 다행이긴 한데.”
“여기선 천막은 어떻게 쓰는 거지?”
마침 그때, 알란 교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각자 조별로 천막을 이용한다. 이틀간, 이곳에서 머물 테니 짐을 풀고 잠시 몸을 쉬어두도록. 천막에 각자 번호가 붙어 있을 거다.”
정말로 천막에는 번호가 붙어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별 불만 없이 제 천막을 찾아갔지만, 9조의 녀석들은 유독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스카는 다른 녀석들은 안중에도 없이 헬무트에게 손짓했다.
“일단 말을 저기다가 묶어 두고 당장 쓸 짐만 내리자. 후딱 해치우고 천막에서 쉬자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