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20
119
헬무트
119화
천막 안은 널찍했다. 말을 타고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 어색한 분위기로 각자 자리를 잡았다.
조원 중에서는 안드로와 제임스, 바실, 디노가 친했고 웨슬리와 미첼이 친했다.
원래는 그렇게 나누어져 있다가 오는 길에 대화를 나누며 다들 친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여섯 명의 이야기였다.
다른 조원들과 헬무트와 아스카,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스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주먹을 쥐고 달려들 수 있는 거리다. 다들 슬쩍 눈치를 봤다.
“아, 안장도 새로 살걸! 엉덩이 나가는 줄 알았네.”
다행히 아스카는 그럴 기운이 없어 보였다. 엄살을 떨며 침낭을 편 아스카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는 게 낮잠이라도 잘 모양이다.
헬무트는 잠깐 나가서 야영지 주변을 둘러볼까 생각했다.
만약 상대가 블랙 호크라면 함정을 준비해 놨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직접 접근하든가.
블랙 호크는 번거로운 방법으로 경고까지 해 왔다. 해치우고 끝낼 상대라면 그렇게까지 할까.
압박을 주고 거래를 하든 대화를 하든 기선 제압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레타 아카데미 학생들을 휩쓸리게 하진 않겠지.’
그의 은원에 다른 녀석들이 휘말리는 건 원치 않는다.
여기에는 유수의 귀족 가문에서 모인 학생들이 있다. 블랙 호크가 음지에서 활동한다고 해도 양지의 수많은 나라와 가문을 적으로 돌릴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을 터.
바덴을 건드리지 않는 건 그 어떤 단체건 불문율이었다. 상식적으로 헬무트 하나 잡는데 일을 그만큼 벌이진 않으리라.
자리를 뜨려는 그를 붙잡은 건, 다른 조원들이었다.
“헬무트, 어딜 가려고?”
“잠깐 바람 좀 쐴까 하고.”
“곧 다시 나가야 할 텐데?”
“나도 바람을 쐬고 싶었는데. 같이 갈까?”
“나도.”
급히 아스카를 향해 눈짓하는 게, 언제 깨어날지 모를 그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헬무트는 침낭 위에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마음이 바뀌었어.”
화색을 하고 조원들도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헬무트는 자유롭지 않았다. 그가 개 주인인 한은 그랬다.
하지만 나쁠 건 없다. 모두가 잠든 시간, 행동해도 늦지는 않을 테니까.
‘생각보다 다들 내게 주목하는군.’
그게 문제였다. 하지만 반대로 이점이기도 했다. 블랙 호크에서도 헬무트를 처치하기 어려워질 테니까.
상대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린 이상, 어떤 식으로 접근해 올지 기대가 되었다.
‘재미있어지겠어. 이번 사냥 소풍.’
헬무트는 조용 조용한 대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잠깐의 휴식이었다.
*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천막 중앙에서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비큐 파티가 시작된 것이다.
모닥불 근처에는 조별로 커다란 통나무 식탁과 의자, 따로 불을 옮길 수 있는 장작과 쇠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고기와 버섯, 감자 등등으로 가득한 쟁반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조별로 나눠 준 음식재료는 학생들이 알아서 구워 먹어야 했다. 요리라고 하기엔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여긴 고기 구워 본 적도 없는 도련님 천지였다.
다들 야영을 할 때면 손도 까딱하지 않고 수행인들이 해 주는 걸 받아먹었던 것이다.
머뭇거리는 검술 학부 학생들을 향해 알란 교관이 엄중하게 선고했다.
“음식을 해 줄 사람은 없다. 요리를 못 하면 굶어야 하는 거지.”
9조의 조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누가 자신 있게 한다고 손을 드나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런 녀석은 없어 보였다.
“대충 어떻게 하는지 보긴 봤으니까 할 수 있겠지.”
먼저 나선 건 안드로였다. 어디서 본 게 있는지 그는 기다란 쇠막대기에 양념 된 고기와 야채를 꿰었다.
다른 녀석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련된 장작에 불을 옮겨다 붙였다.
“어이, 거기! 불똥이 튈 뻔했잖아. 조심하라고.”
“경고해 두지만, 나는 목숨이 위험한 상처가 아니면 치료해 주지 않을 거다.”
드웨인 교수가 지나가면서 엄포를 놨다.
헬무트는 자신의 역할을 고민했다. 9조의 조원들은 생각 외로 적극적이었다. 자기 가문이 범상치 않다는 걸 은근슬쩍 암시한 웨슬리조차도 그랬다.
‘가만.’
달궈지는 쇠판을 바라보며 헬무트에게 퍼뜩 의심이 찾아들었다. 혹시 블랙 호크에서 독을 발라 놨을지도 모른다.
“야, 그러다가 손 대이겠다.”
“괜찮아.”
헬무트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달아오르는 쇠판을 슥 닦아 냈다. 생각해 보니 그럴 거면 음식에 독을 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조원들 모두가 독에 당할 테고, 블랙 호크에서도 그렇게 광범위하게 노리진 않을 것이다.
‘괜한 짓을 했군.’
헬무트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괜한 짓은 아니었다. 헬무트까지 나서서 움직이자 멀뚱멀뚱 서 있었던 아스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테이블 위를 닦아 내며 식기를 펼쳐 놓았다. 보기 좋게 달아오른 쇠판에 이제 고기를 얹기만 하면 되었다.
“그냥 올려두면 되나?”
호기심이 일었는지 제임스가 시험 삼는답시고 집게로 집은 고기를 쇠판 위에 통으로 얹어 놨다. 치직!
넓게 펼쳐 놔야 하는데 그대로 얹어 놓고 멀뚱히 구경만 했다. 그 때문에 곧 시커먼 연기가 솟았다.
“어어, 타는 건가?”
집게로 들어보니 아래쪽이 시커멓게 타 있었다. 당황한 그가 고기를 반대쪽으로 뒤집은 채 방치했다. 곧 아래와 위가 타고 쪼그라든 괴이한 형태의 요리가 완성되었다.
“그건 네가 혼자 처먹어.”
그 모습을 본 아스카가 인상을 구겼다. 헬무트는 숯덩이가 된 고기를 바라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페이스 용병단의 핀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그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불쑥 다른 녀석들을 밀어내고 아스카가 나섰다.
“야, 꺼져 봐.”
아스카는 척척 고기를 구워 냈다. 불은 꽤 셌다. 바로 뒤집어서 또 굽고 핏기가 사라졌을 때 건져 낸다. 사실 요리랄 것도 없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야채까지 척척 구워 낸 아스카 옆에서 큰 접시가 수북하게 들어찼다. 고기를 태워 먹은 제임스가 재빨리 접시를 들어다가 날랐다. 아스카가 손을 탁탁 털었다.
“무능한 자식들, 고기 하나 못 구워서 어떻게 먹고 사냐? 더럽게 곱게들 자라셨네.”
“아스카, 너.”
다시 봤다는 눈빛이었다. 역시 평민 출신! 내심 감탄하는 것 같기는 했으나 무시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줄곧 저 밑에 놓았던 평민이란 단어가 서서히 이들에게서 새롭게 자리매김해 가고 있었다.
“맛있는데?”
“와, 잘 구웠다.”
“그렇지?”
아스카가 으쓱거렸다. 성격으로 모든 장점을 깎아 먹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스카는 다재다능한 녀석이었다.
헬무트도 갑자기 아스카가 다시 보였다. 그는 유독 요리 실력 점수를 높게 쳤다.
잔뜩 구워 놓은 고기는 곧 모두의 배 속으로 깨끗하게 사라졌다. 샌드위치만 먹고 온종일 말을 탔다.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무엇보다 군것질거리나 비상식량을 가져온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 가져오지 말라고 교관들이 엄포를 놨을 뿐만 아니라, 아침에 검사를 해서 다 압수당한 탓이다.
재수 없이 사냥이나 요리에 꽝인 조에 걸렸다간 닷새 내내 쫄쫄 굶어야 하는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건장한 검술 학부 학생들이 죽지는 않겠지만.
“이봐들, 나한테 좋은 게 있는데.”
웨슬리가 슬쩍 눈짓했다. 그가 품에서 꺼내든 건, 큼지막한 병이었다.
딱 보기에도 평범한 음료수는 아니었다. 표면엔 납으로 상표가 박혀 있었다.
“헤네시의 독주잖아?”
“웨슬리, 너 술을 가져온 거야?”
“근데 그거 한 병은 아니겠지? 에게.”
“자식들이 욕심은 많아 가지고. 한 병도 겨우 가져왔는데.”
웨슬리가 혀를 찼다.
“독주라서 기분 삼아 조금씩 마시면 땡이거든. 술 약한 녀석 있으면 물에 타 마셔!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을 거다. ”
“야, 너 어떻게 숨겨왔어?”
“다 방법이 있지. 근데 잠깐 기다려, 장담하는데 페트리샤 교관님이라면 분명히 이쯤에서 한 번쯤 불시 검문을 할 거라고.”
웨슬리의 말이 맞았다. 곧 그들이 있는 자리에 들이닥친 페트리샤 교관은 술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이상 없군. 좋아.”
저쪽에서 원성이 터지는 걸 보니 누가 적발당해서 빼앗긴 모양이었다. 어디서 뺏어왔는지 페트리샤 교관의 손에도 술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잠시 뒤, 웨슬리가 다시 술병을 꺼내 들었다. 그가 슬쩍 주변 눈치를 봤다.
“교수님들 모두 가셨지?”
“식사하시려나 본데. 빨리 마시고 치우면 괜찮을 거야.”
“재주도 좋다. 숨겨온 방법을 좀 공개해 보지그래?”
“방법? 어려울 거 있나. 짐 속에 숨기니까 걸리는 거야.”
“넌 어디다가 숨겼는데.”
웨슬리가 제 망토를 펄럭거리면서 뻐기듯이 말했다.
“난 내 망토 속에 숨겼지. 이 망토, 안쪽 주머니에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어서 숨겨올 수 있다고. 드웨인 교수님이 탐색 마법을 걸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게 하시진 않더라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마력을 낭비하지 않은 것이다.
헬무트는 솔깃했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 망토라니. 처음 듣는 물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레아는 여행할 때도 짐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마차에 실어 놨다고 생각했지만, 일행과 이별할 때도 손에 들고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였나?
“그래? 특이하네. 가방이 아니라 옷은 찢기기라도 하면 마법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 물건 잘 안 만든다던데. 수리 가능한 마법사들이나 입지 않나?”
“맞아. 이거 신상품이라고. 튼튼해서 웬만하면 안 찢겨. 좀 비싸게 주고 샀지. 만약 마법이 훼손되더라도 마법사한테 가져가면 수리도 쉬울 거래.”
웨슬리가 자랑스럽게 웃으며 제 옷을 툭툭 쳤다.
“바덴에서도 잘 찾아보면 파는 데 있을걸?”
“얼만데.”
관심이 생긴 헬무트가 슬쩍 물었다. 휴일에 사냥 소풍을 간답시고 아스카가 산 잡동사니들과는 달리, 쓸 만한 물건으로 보였다.
당장 필요하진 않지만, 돈이 부족하다면 에단한테 부탁해서라도 구할 생각이었다.
웨슬리가 슬쩍 조건을 걸었다.
“말해 줄 수는 있는데, 너도 한 가지 답해 주면 말이지.”
“내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헬무트 너는 도시 출신인가? 검은 어디서 배웠어?”
많이 듣는 질문이다. 헬무트는 건성으로 답했다.
“아니, 나는 숲속에서 자랐어. 검은 스승님한테 배웠고.”
“숲속에서 자랐으면, 숲속 마을인가? 거기에 스승님이 계셨어?”
“아니, 그곳은 마을이 아니야. 집은 하나만 있었지. 난 스승님이 키웠어.”
사실 키웠다는 표현은 잘 맞지 않는다. 잔디는 밟을수록 잘 자란다고 했다.
다리언은 열심히 헬무트를 밟았다. 죽지 않을 만큼. 그래서 강인하게 성장할 만큼.
그 결과로 헬무트는 괴물처럼 강해졌다. 이 그레타 아카데미의 야영지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그를 제지하더라도 몰살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괴물은 얌전히 헬무트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그는 학살자도 괴물도 아니었다.
헬무트는 그저 자신이 이 인간 세상에 녹아들 수 있는 인간이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