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28
127
헬무트
127화
“그래서 우리의 상대는 누구지? 저 짓거리를 벌인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아스카의 손끝이 땅 위에 엉망으로 뭉개진 음식물을 지목했다. 그의 눈빛에서 살의가 번졌다. 헬무트는 차분한 말투로 답했다.
“상대는 1급 용병에 준하는 실력의 암살자다. 한 명밖에 못 봤지만, 한 명 이상일 수도 있지.”
기척, 흔적, 기타의 것들은 감안하건대 적들의 수는 많지 않을 거다. 그 한 명뿐일지도 몰랐다. 더 있어 봐야 조력자 역할의 잔챙이들.
1급 용병급의 실력자가 여럿이라면 헬무트를 노리는 데 거리낌 없이 행동했을 터. 굳이 그의 학우들을 노리며 돌아가는 방법을 쓰진 않았을 거다.
번거로운 방식은 곧 약자들의 방식이다. 정면으로 이길 자신이 없기에 하는 선택.
1급 용병급이라는 소리를 듣자, 조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1급 용병급이라면…… 어느 정도지?”
“제국 황실 기사단에서도 알아주는 수준. 아카데미 교관님들 중에서도 강한 분에 속하지 않을까.”
“에단 쿠드로 교관님 같은?”
“그래.”
“그럼 엄청 센 놈이라는 거잖아.”
“당연히 센 놈이지. 괜히 우리까지 다 잡아 죽이겠다고 하겠냐?”
“너 혹시 이거 우리 놀리려고 하는 소리야?”
“교관님이 내린 깜짝 수행 과제 같은 거 아니지?”
디노와 제임스가 의심을 보였다. 하지만 헬무트의 짤막한 답에, 그들의 의심은 곧 수그러들었다.
“믿기 싫으면 마음대로 해도 돼.”
말 안 듣는 녀석까지 설득해서 돌봐 줄 여력은 없다.
헬무트는 제 선을 인지했다. 그의 선 안에 있는 녀석은 아스카까지였다. 다른 녀석들은 걸리적거리면 버릴 수 있다.
조원들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감지했다.
“빌어먹을, 난 이런 상황 처음 겪는데.”
“누군 아니래? 사냥 소풍이래서 재밌을 줄 알았는데 암살자한테 노려지다니, 이거 뭔.”
아스카가 뜬금없이 물었다.
“귀족이면 후계자 싸움 때문에 암살 시도 같은 거 겪어 보지 않아?”
“난 우리 형하고 사이좋거든?”
“내 동생이 3살인데 내 목숨을 노리겠냐? 아직 대소변도 못 가릴 나이인데.”
“우리 가문은 정당한 경쟁을 통해서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 의외로 평화롭군.”
아스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가한 표정이었다.
나름대로 검술 학부 2학년 수석, 차석, 차차석까지 모인 조다.
하지만 헬무트를 제외하면 실전 경험은 없다시피 하다. 그것도 이런 숲속에서, 암살자를 상대로.
그러나 난데없는 소리를 들은 중에도 그들이 불안을 누를 수 있었던 건, 수석과 차석이 침착했기 때문이다.
헬무트와 아스카는 태연했다. 헬무트가 이 녀석들이야 어찌 되든 자기는 이길 자신이 있었기에 그런 거였지만, 아스카는 그냥 간덩이가 부은 녀석이었다.
두려움은 전염된다. 하지만 이 두 녀석은 일행의 두려움을 압도할 만한 존재감이 있었다.
누구도 두려움 때문에, 헬무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건 검사답지 못한 일이었다.
안드로, 제임스, 디노. 셋 다 검가 출신이다. 어리지만 이런 일로 징징댈 만큼 나약하지는 않았다.
안드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아 맞다. 수정구! 수정구 꺼내 봐. 저쪽에 연락하면 되잖아.”
“교관님들이 연락해 보자. 수정 구슬, 누가 가지고 있지?”
“나.”
아스카가 손을 들었다. 그는 품을 뒤적였다.
“어? 왜 없지? 분명히 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마구잡이로 제 몸을 더듬던 그는 짐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너저분한 짐 속에서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없어! 어디로 갔지? 에이 씨, 왜 없는 거야?”
“야, 이 덜떨어진 자식!”
“대체 어디 다가 흘린 거야?”
“보관할 자신 없으면 맡질 말았어야지!”
이번에는 조원들도 버럭 성질을 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고 성질을 받아 줄 아스카가 아니었다.
아스카는 뻔뻔할 만치 당당하게 소리쳤다.
“시끄러워! 그 암살자 놈이 몰래 빼갔을지 어떻게 알아? 지들은 그놈이 등 뒤에 서 있어도 알지도 못할 거면서!”
아무리 봐도 아스카가 흘린 게 분명해 보였지만, 다들 불만스럽게 입을 닫았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데 낭비할 체력은 없었다. 이 미친개를 잘 달래서 숲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들은 바로 의논을 시작했다.
“이제는 어떻게 하지? 바로 야영지로 돌아갈까?”
“짐은 어떻게 하고.”
“지금, 짐이 대수야? 웬 암살자가 우릴 노린다는데.”
아스카의 표정이 실룩거렸다. 그는 유독 짐이 많았다. 야영을 준비한답시고 꽤 많은 물건을 사들였다. 그에겐 짐이 대수였다. 그건 얼굴도 못 본 암살자 따위 때문에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게 돈이 얼만데! 누가 부자 놈들 아니랄까 봐.’
하지만 수정 구슬을 잃어버린 그가 뭐라고 말할 상황은 아니었다. 아스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지?”
“멀어. 말로 4시간 가까이 걸렸지. 쉬지 않고 달려서.”
“말로 4시간이면, 우리가 마찬가지로 쉬지 않고 달리면 12시간 이상 걸릴 거야.”
“놈에게 말이 있다고 가정하면, 놈은 우리를 쉽게 쫓아올 수 있지. 지친 우리에 비해 놈은 멀쩡할 거야.”
“그렇다고 여기에 있을 수는 없어. 당장 오늘 먹을 것도 없잖아.”
“암살자가 노리는 상황에서 먹을 걸 구하러 가는 건 미친 짓이고.”
“그렇다고 지금 떠나면 가는 동안 깜깜해질 거야. 길을 따라가는 거라지만 밤을 새워 가야 하는데, 어둠 속에서 놈을 상대할 자신은 있어?”
“그럼 어떻게 하자는 소리야?”
그 질문에 모두가 침묵했다. 밤의 숲에서 암살자를 상대할 자신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발을 내딛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모두가 결정을 망설였다. 이런 순간에는 결정을 내릴 한 명이 필요하다. 이 두려움을 딛고 길을 제시할 한 명이.
“내게 생각이 있어.”
그건 바로 헬무트였다!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거야. 가는 길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그편이 나을 테지.”
“음식은 그렇다 치고, 물이 없어. 괜찮을까?”
“먹을 건 있어. 저 녀석이 따온 버섯이나 구워 먹자고.”
버섯은 다섯 명이 하나씩 먹으면 끝날 만큼 양이 적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게 먹을 수 있는 전부였다. 버섯에까지 독을 발라 놓지는 않았을 것 같다.
“따오길 잘했네.”
안드로가 중얼거렸다. 헬무트는 해결책을 냈다.
“내가 우리가 왔던 길 쪽을 살피고 오지. 그쪽에 시내가 하나 있어. 거기서 물을 떠 올게. 흐르는 물에 독을 타진 않았을 테지. 너희들은 여기를 정리하면서 뭉쳐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소리치고, 방심하지 마.”
헬무트는 쓱 조원들을 둘러봤다. 아스카는 감이 좋은 편이다. 파쇼라고 해도 그에게 근거리까지 접근하긴 힘들 거다. 습격하는 즉시, 아스카라면 반응할 터.
똘똘 뭉친다면 이 녀석들도 헬무트가 돌아올 때까진 암살자를 상대할 만할 거다.
헬무트는 두 개의 물통을 집어 들었다. 목을 축일 정도만 있으면 되었다.
불쑥 디노가 물었다.
“근데 헬무트, 넌 혼자 그 암살자를 상대할 자신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놈이 너희들을 노리겠지. 내 주의를 빼앗기 위해서.”
“그럼 네가 1급 용병급의 실력이라고?”
“그래.”
헬무트는 태연했다. 별안간 던져진 진실에 조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웬만한 녀석이면 자만심이 지나치다면서 의심을 하겠지만, 상대는 헬무트다.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허언을 하지 않았다.
“그, 그럼…… 에단 교관님도 이길 수 있어?”
“붙어 본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
암살자를 마주했을 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우위라는 것을.
놈은 헬무트를 사냥하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언제든 저를 후려쳐 목줄기를 물어뜯을 수 있는 맹수를 사냥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건 사냥이다.
하지만 에단 쿠드로에게서는 그 느낌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가 암살자보단 실력적으로 우위였다.
“그럼.”
헬무트는 등을 돌렸다.
우는소리를 하는 건 검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엉망이 된 야영지를 수습했다.
서로 세 걸음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면서 제각기 할 일을 한다.
헬무트에게는 그들의 행동력이 의외였다. 핀이라면 이 상황에서 징징거리면서 헬무트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을 거다. 그 나이 또래인 것 같은데 이들은 달랐다.
‘꽤 쓸만한 녀석들인걸.’
헬무트는 길을 따라 걸으면서, 저들을 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쪽이 더 어려울 테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이기는 건 자신일 테니까.
20여 분이 흐르고, 헬무트는 시내에 다다랐다. 돌아가는 길은 서둘러야겠지만, 오는 길은 꼼꼼히 살피면서 왔다. 길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해 두기 위해서.
오는 길목에 무너져 내릴 다리도 없었고, 나무를 베어 가로막아 놓았다고는 해도 말과 함께 있는 게 아닌 이상 뛰어넘을 수 있었다. 돌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거다.
어둑어둑해져 가는 시내에는 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헬무트는 물병을 깨끗이 닦아 내고 물을 떴다. 냄새를 맡아 보니 이상은 없는 듯하다.
그때 문득, 저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헬무트는 자세를 낮추며 숨을 죽였다.
토끼였다. 귀를 쫑긋거리면서 물가로 뛰어오고 있다. 감성이 있다면 귀엽다고 느낄 만도 한데, 헬무트는 식량 거리가 제 발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종일 재수 없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살아 있는 토끼에 독을 타 놓지는 않았을 거였다.
‘활을…….’
가지고 왔다. 등에 그대로 메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화살은 없었다.
물병을 옆에 놓은 헬무트는 등을 더듬어 활을 잡아 쥐었다. 손을 뻗으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나뭇가지가 걸렸다. 가늘지만, 활대에 걸 만큼은 길었다.
헬무트는 활시위에 나뭇가지를 걸었다.
파삿!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간 화살은 토끼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토끼는 제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숨이 끊겼다.
‘간단하지.’
다시 활을 멘 헬무트는 물병과 사냥한 토끼를 챙겨 들었다. 시간 낭비도 거의 없었다. 이 수확물을 안고 돌아가면, 다들 좋아할 거다.
그러나 뛰다시피 돌아간 야영지에서 그를 맞이한 건,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병신아! 돌았어? 네가 따라가서 뭘 하겠다고! 주제 파악을 해야지.”
한 대 얻어맞은 듯 한쪽 얼굴을 움켜쥔 채 자리에 주저앉은 제임스와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보는 아스카. 그리고 굳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안드로.
한 명이 없었다. 헬무트는 무슨 상황인지 바로 간파했다.
“디, 디노가 잡혀갔는데 그럼 가만히 있으라고! 안드로 넌!”
안드로가 고개를 저었다.
“쫓아갔다가 너까지 사로잡히면 그때는 정말 대책이 없어.”
헬무트는 그제야 자신이 기척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를 냈다. 저벅거리는 발소리에 세 명이 일제히 그를 돌아봤다.
“헬무트!”
“무슨 일이 있었지? 디노가 어떻게 잡혀간 거야.”
그 짧은 새, 뭉쳐 있으란 그의 말을 잊었나? 헬무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스카가 불만스럽게 설명했다.
“아니, 디노 자식이 갑자기 소변이 마렵다잖아. 요 앞에서 보겠다고 하고 바로 나갔어. 정말 잠깐이었는데.”
헬무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좀 급했다. 야영지에서 오줌을 쌀 수는 없으니 살짝 걸어나가 나무에다가 싸겠다는 거였다.
고작 열 걸음 안팎으로 떨어진 거리. 바지를 까고 있는 녀석을 우르르 따라가기도 좀 그랬다.
그러나 볼일을 본 디노가 바지춤을 수습한 순간, 위쪽에서 두 개의 기다란 손이 내려와 번개처럼 디노의 몸을 낚아챘다. 거미가 먹이를 잡아채듯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모두가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