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29
128
헬무트
128화
“소리를 지르면서 곧장 달려가 봤지만 늦었어. 놈은 디노를 어깨에 메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디노는 죽어 있었나?”
헬무트는 차분하게 물었다. 제임스와 안드로가 몸을 움찔 떨었다. 아스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몰라, 움직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피는 안 흘리던데. 의식을 잃었을 뿐일지도?”
꼭 칼로 찌르지 않더라도 목을 꺾거나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면 사람은 죽는다. 디노는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제임스와 안드로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잠깐, 정말 잠깐이었다. 찰나의 방심에 디노가 잡혀갔다. 그들은 암살자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로 암살자의 실체를 보게 되자 그들이 느낀 건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실체가 된 공포였다.
“헬무트, 디노를 포기할 건 아니지?”
제임스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은 아니야.”
헬무트는 생각을 정리했다. 디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알 방법은 있다. 습격해서 죽이면 그만이었을 텐데, 굳이 납치해갔다면 목적이 있는 거다. 다시 접근해올 터.
‘그런데 이 녀석들, 괜찮을까.’
둔감하다. 긴장감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저희끼리 뭉쳐 있는 것조차도 못하다니.
하지만 별수 있겠는가. 암살자가 그들을 노리게 된 건 헬무트 때문이었다. 걸리적거리더라도, 최대한 지키려고는 해 볼 것이다.
“일단 이거라도 먹지. 먹고 이야기해.”
헬무트는 물병과 토끼를 내밀었다. 식욕이 뚝 떨어진 기색이었지만, 식욕과는 별개로 배는 고팠다.
전에 따둔 버섯과 토끼를 아스카가 요리하여 내밀자 모두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웠다.
몸을 바짝 굳히고 긴장한 통에 기운을 많이 빼앗겼다. 위장이 요란하게 신호를 보냈다.
4명이 배를 채우기에 딱 적당한 양이었다. 검술 학부 녀석들의 위장을 꽉 채우기엔 무리였지만, 부족하게나마 배가 찼다. 먹을 것이 있는 게 어디인가.
“이젠 어떻게 할 거지?”
“내일 돌아갈 거야? 디노는 어떻게 하고.”
완전히 캄캄해진 숲 쪽을 제임스가 불안하게 돌아보았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빛으로는 밝힐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이었다.
예정대로였다면 지금쯤 8명이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신나게 바비큐 파티를 벌이고 있었을 텐데, 느닷없이 극한 상황에 던져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디노를 찾아보겠다고 내가 자리를 뜨면, 또 누가 당할지 몰라.”
헬무트가 딱 부러지게 말했다.
“일단은 여기서 날이 밝을 때까지 있는 게 좋겠어. 충분히 쉬어 둬. 보초는 내가 선다.”
그가 보초를 자처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녀석들을 믿고 잠들 수가 없으니까. 하룻밤쯤 새는 걸로 컨디션에 심각한 난조가 오지는 않는다.
“뭐, 그래.”
아스카가 태연하게 승낙했다. 그가 먼저 침낭을 깔고 눕자 다른 녀석도 머뭇거리면서 따라 움직였다.
헬무트를 제외한 세 명은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바짝 붙어 누웠다. 죄다 검을 침낭 안에 두고 손잡이를 붙잡은 상태였다.
조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디노가 납치당했다. 머리꼭지가 당길 만큼 긴장감이 일었다.
그 때문에 헬무트가 쉬라고는 말했지만, 코를 골기 시작한 아스카를 제외한 다른 두 명은 불안감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눈앞에서 친구를 잃은 그들은 충격이 컸다. 디노의 시체를 확인하기 전까진,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이성을 지키기 쉬울 것 같았다.
자정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모닥불 앞에 앉아 졸 듯이 눈을 감고 있던 헬무트는 돌연 눈을 떴다.
날카로운 소리와 날아온 화살이 그의 앞에 꽂혔다. 퍽!
일부러 빗맞힌 거다. 부르르 떨리는 화살의 끝에는 천 주머니가 매어져 있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제임스와 안드로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헬무트는 화살이 날아온 쪽을 쳐다봤다.
‘움직임이 빠르군. 파쇼가 직접 왔나.’
어둠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그이지만, 이 녀석들을 두고 쫓아갈 수는 없다.
‘디노를 납치한 목적을 말해 줄 모양이지.’
헬무트는 화살에 매어진 천 주머니를 풀었다.
“아씨, 잘 자고 있었는데.”
아스카가 눈을 비비며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헬무트는 주머니 안에 있는 종잇조각을 꺼내 들었다. 글씨가 적혀있다.
“친구를 찾고 싶다면 동이 트기 전 혼자 큰 바위 언덕으로 와라.”
“큰 바위 언덕이라고? 그게 어딘지 어떻게 알아.”
“우리 지도가 꽤 세밀하던데. 표시가 되어 있을걸. 아, 여기 있다!”
안드로가 지도를 꺼내서 펼쳤다. 지도에 그려진 각종 지형에서 큰 바위 언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한곳 뿐이었다. 헬무트는 지도를 통해 거리를 가늠해 봤다.
“여기서 전력으로 뛰면 15분 정도. 그렇게 멀진 않아.”
“이 거리가 15분으로 된다고?”
“나한테는 돼.”
질문한 제임스가 입을 딱 다물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그가 멋쩍은 채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다.
“응? 안에 뭐가 들어 있어.”
무심코 주머니를 털자 뭔가가 툭 떨어졌다. 그가 소스라치며 뒤로 물러앉았다.
“뭐, 뭐야! 미친!”
하얗고 작은 덩어리. 바닥에 떨어진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제임스는 반쯤 혼백이 달아난 표정을 지었다.
피 묻은 검지였다. 매끈하게 잘린 단면이 잘라 낸 사람의 솜씨를 말해 주는 듯했다. 헬무트는 태연하게 그걸 주워서 확인시켰다.
“손가락이군. 이거 디노 손가락 맞아?”
“모, 몰라!”
“친구잖아.”
“친구라도 잘린 손가락 같은 걸 어떻게 구분하냐!”
제임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새파랗게 질린 모습이 충격이 상당했나 보다. 더 말을 걸면 울어 버릴 것 같았다.
헬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난 아스카의 손가락을 알아볼 수 있는데.’
그건 헬무트의 눈썰미와 기억력이 좋아서다. 아스카가 손가락을 뺏어 들어 살폈다.
“상태를 보아하니, 잘린 지 얼마 안 됐어. 피도 안 굳었어.”
“그럼 디, 디노는!”
“살아 있는 거겠지. 손가락이 잘려서 좀 아픈 상태로. 잘린 게 손가락만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그렇다면 친구를 찾고 싶다면 오라는 게, 친구의 시체를 찾고 싶다면 오라는 뜻은 아니리라.
아스카가 으으, 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자꾸 보고 있으니 징그럽잖아.”
그는 그걸 한쪽에 굳어 있던 안드로에게 건넸다.
“그 손가락 잘 챙겨 놔.”
안드로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다시 주머니에 담아 수습했다.
제임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십 년 감수한 표정이었다.
아스카가 심드렁하게 중얼댔다.
“드웨인 교수님 정도면 문제없이 붙여 줄 수 있을 거야.”
“다행이로군. 살아 있으면 구할 수 있을 테니까.”
헬무트는 희망적으로 말했다. 죽은 놈은 그도 살릴 재주가 없다. 살아 있다면, 구해 낼 방법이 있을 거였다.
안드로와 제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는 헬무트를 기가 막히다는 듯이 응시했다.
‘뭐, 이런 녀석이…….’
참 기묘했다. 정말 살 떨리는 상황이고, 잠자기도 무서운데 안드로도, 제임스도 이성을 놓아 버리지는 않고 있었다.
그들은 그게 헬무트라는 무섭도록 침착한 녀석 덕이라는 걸 알았다. 그와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것 같았다. 아, 태평한 아스카도 한몫했다.
“어떻게 할 거야?”
“생각해 봐야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혼자 오라고 했으니, 헬무트 혼자서 가야 할 텐데 그러면 또 이 녀석들만 남게 된다.
전력으로 달려서 15분 거리면, 아까 거기보다 훨씬 멀다.
파쇼가 이곳에 직접 온다는 가정하에, 이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헬무트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스카의 실력이 쓸만한 건 사실이지만, 1급 용병의 실력에는 못 미쳤다. 하지만 다른 두 녀석과 합하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상대가 암살자고 정정당당한 1대 3의 대결을 펼쳐 주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딜레마다. 살릴 수 있을지 불확실한 디노를 찾으러 가느냐, 아니면 확실히 살아 있는 이 녀석들을 지키느냐.
전자를 택한다고 치면, 모두를 살릴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모두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극단적이었다. 하지만 후자를 택한다면 디노는 확실히 죽는다.
‘사지선다로 답안을 주면 좀 편할 텐데.’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헬무트는 결정을 미루었다.
“좀 더 자 둬. 새벽이 되기 전에 깨우지.”
제임스와 안드로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 두는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들은 순순히 잠자리로 들어가 누웠다.
아스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헬무트의 귀에 바짝 고개를 붙였다. 숨결이 느껴지자 소름이 일었다. 헬무트는 그를 노려봤다.
“떨어져.”
“야, 조용히 말해. 저 녀석들이 듣잖아.”
아스카가 소곤거렸다. 또랑또랑한 눈빛이,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숙면을 취해서 피로가 많이 풀린 눈치다.
피로를 풀어야 할 때 확실히 풀 수 있는 것도 능력이었다.
“어떻게 할 참이야? 디노를 구하러 가려고?”
“생각 중이야. 어떻게 할지.”
“다수결로 하는 게 어때. 저 녀석들한테 물어보면 디노를 구하러 가라고 할걸?”
“네 생각은?”
“나도 같아.”
아스카는 자신 있게 말했다. 헬무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스카는 본능적이다. 파쇼가 저보다 강하단 것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하다. 자신이 위험에 처하더라도 학우를 구하러 가라는 뜻인가?
순순히 그런 뜻으로 해석하기엔, 아스카란 녀석은 착하지 않다. 이기적이고 뻔뻔하다.
다른 녀석들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 우리끼리 탈출하자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녀석이다.
헬무트는 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놈은 강해. 암살자라서 정면 싸움은 약하다는 편견도 실력 차가 나니 통하지 않을 테지. 상대할 자신이 있어?”
“난 놈과 싸워보고 싶어.”
“호승심에 목숨을 걸겠다는 건가.”
“아니, 사실은 내가 아까 잠자리에 누워서 5분간 생각을 해 봤거든. 물론 그 5분 후에는 금방 곯아떨어졌지만 말이야.”
“그런데.”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단 거지. 내가 이번에 사냥 소풍을 준비하면서 물건을 좀 샀잖아. 쓸 만한 게 하나 있어. 파쇼라는 그놈이 상상도 못 할 물건이지. 그게…….”
아스카가 신이 나서 설명을 이어갔다. 설명이 끝나자 헬무트는 이채를 띤 눈으로 아스카를 응시했다.
이런 발상이라니. 전투에 있어서는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간다.
“네 말대로 되면 괜찮겠지만, 네가 그럴 틈을 낼 수 있을까? 실패할 경우…….”
“네가 전력으로 뛰어서 큰 바위 언덕까지 15분이 걸린다고 했지. 만약 디노가 살아 있다고 치면, 손가락도 잘린 녀석이 멀쩡할 리는 없을 테니 네가 녀석을 짊어지고 와야 할 거 아니야. 그럼 오는 데는 20분 이상 걸리겠지. 40여 분 가까이 내가 이 두 녀석과 암살자 놈을 상대해야 하잖아. 한 번 시도해 볼만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은 디노를 포기하는 거다. 실전 경험도 거의 없는 네가 제대로 해낼지 모르겠으니.”
헬무트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야, 헬무트!”
아스카가 언성을 높였다. 하도 가까이 붙어 있다 보니 고막이 얼얼했다. 헬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난 이미 내 일에 너희들을 끌어들였어.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너희들을 최대한 많이 살려서 돌아가는 거야. 그걸 위해선 한 명쯤은 포기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