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31
130
헬무트
130화
“꼭 악몽에 출현할 것 같은 모습이로군.”
아스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직접 보니까 더 살벌했다. 이쪽보다 신장부터가 우월하니 상대하기 어려울 건 분명하다.
강하고 자비 없는 적. 세 명의 어린 소년을 망설임 없이 살해할 남자다. 오싹, 소름이 일었다.
‘실수하면 죽겠는데.’
아스카는 자신의 계획을 점검했다. 밀려드는 긴장감에도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죽음의 두려움은 그를 압도하지 못했다.
“간이 부은 녀석이 하나 있구나.”
웃고 있는 건 파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명문 그레타의 검술 학부 학생이라지만 고작 15살 소년 세 명.
그 정도도 처리하지 못할 거라면, 파쇼가 호크 아이에 소속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파쇼는 무수한 실전 경험을 쌓은 강자. 암살자로서 특기를 펼칠 만한 상황이 아닌, 오히려 불리한 조건이었다.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고, 목표는 멀쩡한 정신으로 이쪽을 경계하고 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빠르고 정확하게 이들을 해치우는 것.
목표물이 향하는 곳에 안배를 해 놨으니, 혹여 살아 돌아오더라도 힘이 좀 빠졌을 거다.
그때 친구 시체를 목격하게 되면, 아무리 강철 같은 정신력이라도 균열이 일 수밖에 없을 터.
친구를 포기하지는 않은 녀석이니, 꽤 크게 흔들릴 것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흔들고 기회를 노려 친다. 그것이 그가 목표물을 사냥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굳이, 다 죽일 필요는 없지.’
파쇼는 문제를 최소화하는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흠, 뭐 좋아. 내가 제의 하나 할 테니 들어 보는 게 어때.”
“제의가 뭔데?”
아스카가 냉큼 물었다. 다른 녀석들은 어차피 긴장해서 입도 못 연다.
파쇼가 피식 웃었다.
“지금 내 앞에서 나불거리고 있는 이 평민 녀석을 내버려 두고 물러나면, 다른 두 녀석은 살려 주지.”
아스카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왠지 뒤의 두 녀석을 의식했다. 원래 의심 많은 아스카다. 이 약해빠진 두 녀석이 그를 뒤치기라도 하면, 원래의 계획이고 뭐고 죽은 목숨이었다.
파쇼가 악마처럼 중성적인 목소리로 달변을 토했다.
“어때? 귀족 도련님들. 평민 하나 넘기고 두 귀족의 목숨을 건사하는 거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지. 귀족과 평민의 목숨은, 같은 저울에 올려놓는 게 우스운 것이니!”
그건 대체로 사실이었다. 그레타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왠지 암살자가 그런 말을 하니, 이전에는 당연했던 그 사고방식이 나쁘게 느껴진다.
제임스와 안드로는 안면을 굳혔다.
“자, 의심할 것 없어. 우리 블랙 호크에서는 함부로 귀족에게 손대지 않는다. 난 도련님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할 기회!”
그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춰졌다.
“나약한 건 죄가 아니야.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하는 선택도 죄가 아니지. 자, 남은 건, 도련님들 손에 달렸어. 죽느냐, 사느냐!”
파쇼는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보는 것이 좋았다. 아카데미 학우인 두 귀족 도련님이 저 평민 녀석을 두고 떠난다면, 그것은 나름대로 즐거운 일일 터. 현실적인 우정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아스카가 코웃음 쳤다. 암살자보다는 장사꾼이 어울리는 놈이다. 혹할 만큼 흡인력 있게 말한다.
사실 살짝 불안했지만, 그는 태연한 척 물었다.
“그래서 안드로, 제임스. 니들 생각은 어때. 날 넘기고 니들은 편하게 살아서 돌아갈래?”
그러고도 너희들이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느냐는 비난의 뉘앙스였다. 하지만 그의 불안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아니지. 저 말을 어떻게 믿고.”
“검가의 자존심을 우습게 여기지 마라!”
전자는 제임스, 후자는 안드로였다. 안드로가 한 말이 좀 더 멋있어서 제임스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자식이 폼 잡네. 에라이, 모르겠다. 죽으면 죽는 거지 뭐!’
살 놈이면 살 것이고, 죽을 놈이면 죽을 것이다. 이제는 발버둥 치는 일만 남았다. 제임스는 검을 치켜들었다.
“네가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없어. 싸울 거면 덤벼!”
실력에 비해 과한 패기였다. 파쇼가 혀를 찼다.
“역시 어린 것들은 목숨 아까운 줄을 몰라.”
새파란 단검이 그의 양손에 잡혔다. 쌍수 단검술. 파쇼의 주특기였다.
“후회해도 늦었다. 죽음을 선택했으니,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그의 몸이 쏜살같이 세 소년에게 짓쳐 들었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
큰 바위 언덕은,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형상이 되었다. 거대한 바위는 옆으로 쓰러졌고, 쓰러져 바닥과 충돌한 면은 일부 으깨져서 흙먼지를 휘날렸다.
충돌 지점 끝자락, 쓰러지기 전 바위 머리 부근에 부서진 바위 조각이 돌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굉음에 잠식당했던 것이 언제냐는 듯, 어느덧 그곳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쿠그극.
뭔가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돌덩이가 퍽 튕겨 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돌덩이가 있었던 자리에서 불쑥, 손이 하나 튀어나왔다. 이어 주변의 바위 조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헬무트는 돌무덤에서 빠져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뻔했네.”
파헤의 숲에서 나호한테 쫓겨 본 이후로 이렇게 심장이 쫄깃해져 본 건 처음이었다.
자신을 과신하는 건 좋지 않다고 배웠다.
왜 굳이, 위험을 무릅썼을까. 모든 걸 완벽하게 끝내고 싶다는 자만심 때문에?
아니면, 그도 인간적으로 변한 건지도 모른다. 자신 때문에 죽게 될 친구를 내버려 둘 수 없어서. 그게 이유라면 말이다.
헬무트는 제 밑에 깔린 디노를 끄집어냈다.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던 덕분에 디노는 제법 멀쩡했다. 거의 짓밟히다시피 했지만 큰 상처는 없다. 미리 잘린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어쨌든 사람한테 깔리는 게 바위에 깔리는 것보다 나은 법이다.
의식이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직접 목격했다면 공황이 올 만큼 엄청난 사태를 겪었으니까.
아카데미에는 마법사가 많으니 약간의 상처는 고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손이 아리군.”
헬무트는 아프도록 쥐고 있던 검을 허리에 그제야 꽂아 넣었다.
바위가 덮쳐드는 순간, 헬무트는 디노를 낚아채며 동시에 검을 뽑았다.
완벽하게 충돌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끄트머리에 이르러, 바위 일부를 검으로 분쇄한다.
그것이 찰나에 떠올린 헬무트의 계획이었다.
그가 아는 한 가장 불확실한 계획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을 갈라 봤어도 바위는 갈라 본 적이 없었으니까.
“성공했다는 게 중요하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커다란 상처는 없었지만 자잘하게 쓸리고 긁혀서 욱신거렸다.
비스도 꽤 많이 소모됐다. 마기를 태우고 바위까지 부쉈다. 반절 좀 넘게 남았나.
그런데도 파쇼를 상대로 질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오만이 아니었다.
“이제 그 변태 같은 놈을 처리하러 가야지. 녀석들이 괜찮을지 모르겠네.”
디노는 구했다. 그를 둘러업은 헬무트는 잠시 바위 쪽을 돌아봤다.
어떻게 저 거대한 게 쓰러졌는지 짐작이 갔다. 바위는 이미 균형을 잃었고, 마법의 힘으로 미세하게 균형이 유지되던 상태였다. 그 마법이 거둬진 거다.
“잔챙이인가?”
기척은 못 느꼈지만, 헬무트는 마기를 사르는 데 집중한 상태였다. 놈이 이 큰 바위 저편에 접근했을 때 느끼지 못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놈은 아마도 헬무트에게 완전히 근접하여 검을 꽂아 넣지 못할 변변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
그렇지 않다면 헬무트가 잠깐 디노에게 집중했을 때를 노려 습격했을 테니까.
‘지체할 시간이 없어.’
헬무트는 바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야영지로 돌아간다. 올 때보단 시간이 좀 더 걸릴 터.
그때까지 아스카와 제임스, 안드로 세 명이 잘 버텨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
“으헉!”
제임스가 소리를 질렀다. 어깨가 검에 베였다.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 올라왔다.
제임스의 온몸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단검이 가르고 지나간 자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곁에서 보는 안드로와 아스카도 기가 질렸다.
“엄살이 심한 도련님이로군.”
파쇼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이 피비린내, 향기롭다. 기분이 고조된다. 싱싱한 사냥감이 피를 쏟으며 내지르는 신음도, 그 냄새도 모두 만족스럽다.
이번 임무는 모처럼 귀족을 죽일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그 기회를 포기하고 자비를 베풀었는데, 거절당했으니 도리가 있나.
‘아무리 시간제한이 있어도, 즐기는 걸 포기할 수는 없지.’
완전히 즐기기 위해서만 하는 짓은 아니었다. 3명이 진영을 잡고 있으니, 아무리 상대가 그보다 약하다고는 해도, 마구잡이로 달려들 수는 없다.
달리 연습한 적도 없는데 매일 같은 훈련을 받아 와서인지 셋은 호흡이 잘 맞았다. 하지만 파쇼는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알았다.
‘진영은 약한 쪽을 공략하면 무너지지.’
파쇼는 그 3명 중 가장 취약한 한 명이 누군지 바로 간파했다. 제임스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제임스만을 노리며 기회가 될 때마다 단검으로 그어댔다.
1급 용병급 암살자의 단검을 평범한 아카데미 2학년생이 완전히 막아 내는 건 불가능하다.
몸 이곳저곳이 난자된 제임스는 살아 움직이는 고깃덩어리 같은 모습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아스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10분쯤 지났나.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헬무트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벌써 돌아오진 못할 거다.
저놈이 하는 짓거리를 보니, 그쪽에도 뭔가 일을 꾸며둔 게 틀림없다.
만약의 상황에는 오로지 그들만으로 파쇼와 싸워 이길 궁리를 해야 했다.
파쇼는 한 호흡 여유를 두었다. 그는 완급을 조절할 줄 알았다. 이렇게 느긋하게 굴다가 단숨에 찔러 든다.
그때마다 그의 공격은 효과적으로 제임스에게 먹혀들어갔다.
순발력이든 기술이든, 비교할 수 없이 차이가 난다. 다른 두 명, 특히 아스카가 좀 재빠르긴 했지만 다 막아 주는 건 무리였다.
‘이대로 가면 제임스는 더 이상 못 싸워.’
지금도 위태롭다. 계속 공격당해 피를 흘린 제임스는 눈에 띄게 둔해져 가고 있었다.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약해진다. 그의 눈빛에 공포심이 차올랐다.
만약 제임스가 무너진다면, 이 진영은 그대로 박살난다. 암살자는 일순 무너진 균형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스카는 돌발적으로 선언했다.
“야, 이러지 말고 너 나랑 일대일로 붙자.”
“아스카!”
안드로가 경악하여 외쳤다. 그의 눈에는 아스카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처럼 보였다.
“너 아까부터 난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잖아. 그럴 거면 나 하나와 싸우는 게 편하지 않나?”
“삼 대 일로도 방어하는 게 고작이면서, 무슨 오만이지?”
“오만은 무슨. 난 이길 것 같거든. 넌? 질 것 같냐?”
아스카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작태는 파쇼를 도발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어린 녀석이 건방 떠는 걸 참아 주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가면 밑에서 파쇼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좋아, 네 친구를 치워 낼 시간을 주지.”
“안드로, 넌 제임스를 데리고 물러나. 너도 필요 없어. 나 혼자 한다.”
암살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제임스를 인질로 잡으면 그것도 곤란하다.
둘이서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없다면 그냥 안드로도 빼 버리는 게 나았다.
두 변변찮은 녀석이 1급 용병급 암살자를 상대로 이만큼 버텨 줬으면 제 할 일 다 한 거다.
‘능력 안 되는 놈들에게 많은 걸 기대해선 안 되지.’
수석인 헬무트가 디노를 구하러 갔으니, 이제 이 암살자를 상대하는 건 차석인 자신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