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34
133
헬무트
133화
‘그러고 보니 저 가면.’
왜 이자는 굳이 광대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걸까. 저 가면 아래 숨겨진 얼굴이 문득 궁금해졌다. 헬무트는 파쇼의 가면에 손을 가져갔다.
“뭐, 뭐하는 짓이냐!”
그가 기겁해서 외쳤다. 뜻밖에도 파쇼가 이제까지 보였던 것 중 가장 큰 반응이다. 하지만 그에게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헬무트는 검 끝으로 가면을 고정시킨 고리를 잘라 냈다. 가면은 수월하게 벗겨졌다.
‘음?’
가면이 벗겨진 얼굴은 하얗고 매끈했다. 흉터나 상처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눈살찌푸릴 만큼 추악한 인상도 아니다. 단지…… 이목구비가 너무 밋밋하고 흐렸다. 눈은 단추 구멍만큼 작았고, 코도 낮고, 입술도 얇고 길었다. 사람의 얼굴이라기엔 너무도 굴곡 없이 평평해서 이상한 생김새다.
“……뭐야?”
잠깐 동요한 헬무트는 그의 얼굴에 다시 가면을 덮어 주었다. 왠지 계속 보니 찝찝해진다. 끈적끈적한 알 같은 걸 보고 있는 기분이다.
“쓰고 있는 쪽이 좋겠군.”
파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잘생긴 놈이 지껄이니 타격이 더 심했다. 어린 새끼가 그에게 이런 굴욕감을 주다니! 그러나 그 어린 새끼가 지금 그의 목숨줄을 쥐고 있었다. 헬무트는 바닥에 누운 그를 내려다보며 질문을 이었다.
“호크 아이라는 집단, 규모가 어떻게 되지?”
“소수 정예다. 총인원은 나도 모른다. 십수 명쯤 될 테지.”
“너만 한 실력자가 거기에 몇 명이나 있지?”
“나를 포함하여 호크 아이에 내에선 다섯이다.”
‘5명이면 꽤 많군. 까다롭겠어.’
당장 검을 들고 쳐들어갈 상황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던 헬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파쇼가 말을 이었다.
“내가 확인한 게 5명이라는 뜻이다. 나도 정확한 수는 모른다. 우리는 함께 임무를 수행할 때 빼놓고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상부의 지시에 따를 뿐이다.”
“상부라면?”
“호크 아이의 수장. 나는 그분을 탈론 님이라고 불렀다.”
“본명은 모른다는 거로군.”
뭔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암살자 놈 말하는 게 다 모호하다. 아는 것도 별로 없다. 하긴 이렇게 제 목숨 살려 보겠다고 입이 싼 놈이니 소속된 집단에서도 알려 주려고 하지 않았을 거다. 덕분에 고문할 타이밍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블랙 호크와 호크 아이는 무슨 관계지?”
“호크 아이는 매의 눈. 블랙 호크에서도 집행자의 역할을 맡는다.”
“블랙 호크의 거점은 어디지? 수뇌부들은 어디 모여 있나?”
“그것은 나도 알지 못한다. 나는 따로 임무를 하달받고 블랙 호크의 지부에서 너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럼 넌 어떻게 그들과 연락하지?”
“지정된 장소에서 연락을 취하면 사람이 온다.”
“그놈들은 네 윗선과 연락이 닿나?”
“연락이 닿을 테지만, 그들도 어디 있는지는 모를 것이다. 마법적인 수단을 이용할 테니까.”
“그렇다면 너는 쓸모가 없군. 아는 게 없으니까 내게 말해 줄 것도 없지.”
헬무트는 검을 파쇼의 목에 바짝 겨누었다. 그의 표정은 싸늘했다. 말해 준 내용도 모호하고, 진실을 말해 준 건지도 알 수 없다. 그냥 말해 주는 척 숨긴 건지도 모른다.
어둠의 싹이 어떻게 되든 후한이 남을 놈은 지금 죽여야 했다. 판단이 훅 기울었다. 유예가 끝났다는 걸 알아챈 파쇼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나를 살려 보내면, 내 권한으로 이번 임무를 종결지을 수 있다!”
헬무트는 친절하게 지적했다.
“말했듯이, 네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슬쩍 지혈했는지 손에서 흐르는 피가 멎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고 과다 출혈로 죽진 않을 터. 바로 숨을 거둔다.
“네, 친구. 네 친구에 대해서 알려 주마! 그 녀석은…….”
“안 궁금해.”
아스카가 어쨌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헬무트는 검을 들어 올렸다. 내리찍으면 끝난다. 하지만 그때, 뒤쪽에서 느닷없이 어떤 음성이 그를 가로막았다.
“잠깐.”
중후한 울림. 힘이 담겨 있어,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외친 것이 아니라, 말한 것이다. 근거리였다. 등골이 오싹했다.
“잠깐, 거기 소년. 멈추어 보시게.”
긴장감이 일었다. 헬무트의 눈에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 암살자보다 더 기척이 없다.’
그렇다는 건 파쇼보다 더 우위의 실력자다. 헬무트는 뒤를 돌아봤다. 30보 정도 떨어진 거리. 가까웠다.
막 등장한 후드를 눌러쓴 정체 모를 상대는 그리 몸집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이 위협적이고 강렬한 기세. 저절로 몸이 경계 태세를 취하게 된다.
“탈론……님.”
파쇼의 입에서 신음과 함께 흘러나온 말을 들은 헬무트는 눈을 부릅떴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정신이 바짝 곤두섰다.
“호크 아이의 수장인가.”
“예감이 좋지 않아 직접 왔지. 결국은 이렇게 되었구먼.”
정중하고 온후한 말투였다. 호크 아이라는 집단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란 생각이 들었다.
‘강자다.’
헬무트는 인정했다. 느껴지는 기운도 대단한 데다가, 서 있는 자세에서도 허점이 보이지 않는다. 보는 것만으로 파악이 안 된다는 건, 숨길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헬무트는 디노를 구해 내고 파쇼를 쫓아 제압하느라 비스를 많이 소모했다. 이런 자와 맞서 싸울 만큼,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길 수 없지는 않다. 하지만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상대였다. 만약 전력으로 싸워도…… 승패를 가릴 수 없다는 느낌이 강력했다. 헬무트는 퍼뜩 깨달았다. 눈앞의 이 자는, 그가 파헤의 숲을 나온 이후로 만난 이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였다.
“내 부하를 돌려 주게. 값은 치르지.”
상대는 느긋하게 말했다. 당장은 싸움을 열 의사가 없다. 그 사실을 파악한 헬무트는 말했다.
“저 녀석은 입이 싸고 조직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녀석이다. 살려 둬도 쓸모가 없어.”
아카데미에서 그런 자는 가까이 둬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하지만 탈론은 부드럽게 반박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기준이지, 우리 호크 아이에서는 그렇지 않다네. 지명 수배가 걸렸거나, 죄를 저질러 외부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하지 못할 이들 천지지. 그러나 사람은 각자 제자리에서 쓸모를 다하기 마련이거든. 적절히 잘 다루면 말이야. 인력난이다 보니 그런 걸 가릴 상황이 아니라네. 저만한 실력자는 드물지.”
흥미로운 논리였다. 그러나 거기에 집중할 때가 아니었다. 탈론이 물었다.
“자네도 분풀이는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안 충분한데.”
실패했을 뿐이지, 성공했다면 헬무트는 야영지에 돌아갔을 때 아스카와 안드로, 제임스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을 거다. 그 상황을 떠올리면, 살의가 일었다.
“안 충분하다면, 부족한 만큼 내가 채워 주지. 다른 방식으로.”
거래할 의향이 있는 듯이 부드럽게 말하고 있으나, 그리 녹록한 자는 아니다. 그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실력 행사에 들어갈 것이다.
‘진작 죽일 걸 그랬나.’
발밑에 있는 파쇼란 자는 전투 불능이라 합세할 수 없다. 하지만 인질로서 쓸모는 없어 보인다. 탈론의 눈빛은 무감정했다. 파쇼가 죽더라도 아쉽게 느낄 뿐 크게 마음 쓰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채워 줄 건데.”
“보상을 하지. 돈이든, 정보든, 무엇이든. 말해 보게.”
탈론이 양손을 펼쳐 보였다. 뭐든 들어주겠다는 듯이.
헬무트는 갈등했다.
여기서 파쇼를 죽이고 탈론과 싸운다. 야영지에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니 비스를 쓰면서 요란하게 싸우면 교관들이 곧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였다. 교관 두 명과 교수 하나. 도움이 될까? 헬무트는 그들의 실력을 대충 간파했다. 아카데미 교수진은 가르치는 데 전문적인 이들이지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알란 교관과 페트리샤 교관은 실력으로 치면 파쇼보다 못한 수준이다. 드웨인 교수는 마법사니까 실력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검사보다 전투 능력이 떨어졌다.
‘인질로 잡히기라도 하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리고 이자는 대륙 공용 검술로 상대할 수 없다. 전력을 다한다면, 다리언의 검술을 써야 할 텐데 이 자한테 드러내는 것도, 아카데미 교수진에게 드러내는 것도 문제가 된다.
‘배워도 써먹을 수가 없으니 문제로군.’
헬무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최선의 결정이 뭔지 알았다. 그것이 그의 마음이 바라는 바와는 반대라서 문제였지만. 살의를 잠재운 헬무트는 타협하듯 내뱉었다.
“다 필요해. 돈도, 정보도.”
탈론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이대로 싸우는 걸 택한다고 해도, 헬무트는 싸움을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걸 모른다. 일단 뜯어낼 건 뜯어낼 계획이다.
“욕심 많은 녀석이로군. 하지만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품에서 뭔가를 꺼낸 탈론이 바닥을 향해 던졌다. 투둥! 묵직한 소리가 났다. 돈주머니였다. 살짝 열린 입구에서 금화가 비쳤다.
“30만 마르크쯤 될 거다. 확인해 보도록.”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 옷인가. 헬무트는 조심스레 움직였다. 혹시 함정이 있을까 싶어, 일부러 검 끝으로 건드려서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부피를 보건대, 그가 말한 금액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들고 가는 게 문제였다.
“그 옷.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지? 그 옷도 줘. 내가 이 돈주머니를 가지고 가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돈을 받고 친구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 암살자를 풀어 줬다. 지탄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받은 돈을 골고루 나눠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요구에 탈론은 별말 없이 응했다. 그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벗어서 바닥에 던졌다.
“자.”
그제야 그의 얼굴을 확인한 헬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야영지 관리인? 어떻게 기운을 숨겼지.”
그때의 그는 약해 보였는데. 달려들어 목을 꺾으면 그대로 죽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의 탈론은 기운이 넘쳐나는 것뿐만 아니라 외견적으로도 다른 사람처럼 젊고 강인해 보였다. 기이한 현상이다.
“위장은 내 특기이니,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군. 또 바라는 게 있나?”
탈론은 온후한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친근한 인상이지만, 저 인상대로의 남자라면 호크 아이의 수장씩이나 되지도 못했을 거다. 지나치게 순순한 것도 수상했다. 헬무트는 탈론이 준 망토와 돈을 제 앞으로 끌어다 놨다. 파쇼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제가 섣불리 행동하지만 않으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일단 재물을 얻었다. 다음 차례는 정보였다. 헬무트는 추궁하듯이 물었다.
“정보는 어떻게 줄 거지?”
“블랙 호크는 정보를 사고파는 일도 하지. 어려울 것 없다. 그 망토 안에 수정 구슬이 들어 있다. 비스를 쓰면 작동할 거다. 정보를 원할 때, 그것을 통해서 접촉해라. 하지만 단 3번이다. 어떤 정보든, 국가 기밀급 정보라도 입수한 것이 있다면 알려 주마. 의뢰인에 대해서는 비밀이 보장된다. 기한은 10년이다.”
망토의 주머니에서 수정 구슬을 확인한 헬무트가 바로 입을 열었다.
“5번.”
“욕심이 많구나. 30만 마르크에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망토. 거기에 3번의 정보 제공이다. 충분한 대가라고 보는데? 물론, 보복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너에 대해서 블랙 호크는 어떤 의뢰도 받지 않는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흥정은 단박에 실패했다. 탈론은 의외로 단호하게 나왔다.
‘여기까지로군.’
아쉽지만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헬무트는 선언했다.
“좋아, 거래는 끝났다.”
그의 뒤에 파쇼가 있었다. 헬무트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대로 보내 주긴 좀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마지막으로 파쇼를 다시 한번 힘껏 걷어찼다. 퍽! 파쇼가 신음을 토했다.
“크헉!”
비스를 형상화할 수 있는 수준의 검사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을 거다. 여기서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운수가 좋은 녀석이었다. 헬무트는 살벌한 눈으로 경고를 던졌다.
“데려가. 만약, 다시 한번 내 눈에 띄면 그때는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