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35
134
헬무트
134화
“파쇼.”
탈론이 부르자 힘겹게 몸을 일으킨 파쇼는 그에게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생각보다는 멀쩡한 상태로 보였다. 심지어 제 잘린 손가락도 잊지 않고 챙겨갔다.
‘다른 손도 잘라줄 걸 그랬나.’
아직 부족한 감이 있었다. 파쇼가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합니다, 탈론 님.”
“아니, 일단 몸을 치료해야겠구나. 상태가 말이 아니야.”
파쇼는 탈론이 건네주는 포션을 받아 마셨다. 헬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몸을 회복해서 달려들면 곤란한데.’
다행히 그렇게까지 효력이 좋은 포션은 아니었나 보다. 잘린 손가락을 붙일 만큼은 말이다.
기력을 보충한 파쇼는 굽어졌던 허리를 펴고 섰다. 멀뚱히 보고 있을 시간은 없다. 헬무트는 짐을 챙겨 들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난 이만. 빨리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아, 잠깐.”
물러가기 전 그가 헬무트를 불러세웠다.
“자네에게 충고 하나 하지.”
헬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뭔데.”
“자네는 실력이 좋고 판단력도 좋아.”
갑자기 칭찬이다. 헬무트는 무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무른 구석이 있는 건지 아니면 계산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뜸을 들인다는 거다. 적이 뭐라고 지껄이건 바로 목을 베는 쪽이 좋을 때도 있을 거다.”
파쇼를 죽이는 게 좋았을 거라는 뜻인가? 담담한 말투. 그러나 이상하게 귀에 박혔다. 쓸데없는 충고라는 생각은 들지만.
헬무트가 상대의 말을 들어 보는 건, 그럴 필요가 있어서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인간의 입은 많은 정보를 쏟아 낸다. 또 그에게는 어둠의 싹이라는 제약이 있다.
살인할 때, 이 살인을 꼭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렇겠지. 하지만 난 그레타 아카데미 학생이라서.”
“학생이라서 살인은 삼가겠다는 건가? 흥미롭군.”
“멋대로 생각해.”
헬무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등을 돌렸다. 이번에는 붙잡지 않았다.
등 뒤로 탈론과 파쇼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은밀히 행동하는 데 익숙한 자들이니 문제없이 숲을 빠져나갈 터.
헬무트는 망토를 어쩔까 하다가 옷 안쪽에 쑤셔 넣고 허리를 감았다. 망토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고급 제품답게 얇고 가벼웠다. 그리 티가 나지 않는다.
앞쪽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드웨인 교수가 탐색 마법으로 주변을 수색하는 모양이었다. 헬무트는 곧장 그쪽으로 다가갔다.
“헬무트!”
그를 발견한 알란 교관이 놀란 기색으로 외쳤다.
“너 괜찮은 거냐?”
헬무트는 문제없다는 의미로 양손을 펼쳐 보였다. 아까 바위를 깨부수느라 좀 다치긴 했지만, 피가 흐르는 생채기는 없었다. 이미 엄청난 회복력으로 아물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알란 교관이 그의 어깨를 턱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홀로 암살자를 쫓아가다니! 그런 무모한!”
“별일 없었어요. 못 따라잡겠더군요.”
헬무트는 태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넌, 지금 혼자 암살자를 쫓아간 거다. 아무리 친구들이 다쳐서 화가 났다지만, 그러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없었으니 됐잖아요. 돌아가죠.”
헬무트가 너무 명쾌하게 이야기해서, 알란 교관은 할 말이 없어졌다.
“거기, 찾았군. 다행이야.”
드웨인 교수가 곧 모습을 드러냈다. 땀에 젖은 얼굴이었다.
제대로 길이 나 있지도 않은 이쪽은 경사도 굴곡졌다. 그 때문에 그가 탐색 마법으로 헬무트의 존재를 감지하자마자 알란이 먼저 이리로 달려온 거다.
암살자가 있는 숲에서 자기들의 안위도 생각하지 않고 떨어져서 오는 걸 택한 거니 교관다운 책임감이었다. 헬무트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면서 덧붙였다.
“전 강해요.”
그건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안심할 수 있게. 그가 무모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았음을 교관이 이해할 수 있게.
“안다. 어쨌든 돌아가서 말하지.”
알란 교관은 고개를 내저었다. 별로 납득한 기색은 아니었다.
‘말을 찾아가야 하는데.’
말이 어디 있는지는 안다. 하지만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 때문에 지금은 찾으러 갈 수 없었다.
혹시 그 녀석들이 타고 가는 건 아니겠지? 헬무트는 살짝 불안해졌다.
***
한쪽에서 드웨인 교수가 부상자들에게 치유 마법을 거는 와중에 헬무트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뺄 건 빼고 최대한 간결하게. 이미 안드로가 설명을 해둔 터라 이야기가 쉬웠다.
그의 말을 들은 페트리샤 교관이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암살자는 도망쳤다고? 아예 모습도 못 본 거니?”
“네, 가다가 흔적이 끊겨서 돌아왔어요.”
계속 거짓말을 하려니 양심이 따끔거렸다. 헬무트는 자신이 그레타 아카데미에 꽤 많이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양심이라는 게 생긴 걸 보니.
“디노의 상태가 어떨지 모르겠네요.”
헬무트는 폭주하는 디노를 자신이 어떻게 구해 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하기엔 디노의 상태가 워낙 이상했다. 치료를 하려면 일단,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들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헬무트는 디노가 폭주한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놈들이 디노에게 마기를 주입했다는 것. 그리고 그와 맞서 싸우다가 어느 순간, 디노가 쓰러졌다는 것을 말이다.
헬무트가 마기를 빼낸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몸에 미세하지만 마기가 남아있어. 아마 신전에 데려가서 정화를 해야 할 것 같다.”
디노의 상태를 살핀 드웨인 교수가 고개를 저으면서 덧붙였다. 신전이라는 소리에 헬무트의 몸이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운이 정말로 좋았다. 마기와 비스가 충돌했다면, 아마 혈관이 파열되면서 죽어 갔을 텐데. 어떻게 된 건지 마기가 몸에서 쭉 빠져나간 모양이야.”
“블랙 호크라니, 정말 집요한 녀석들이로군. 이런 데까지 사람을 보낼 줄은 몰랐다.”
“진작 연락을 해 봤어야 했는데. 너희가 위험해진 건 우리가 안일했기 때문이다. 미안하구나.”
페트리샤 교관이 사과하며 헬무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들이 도착해서 본 광경이 정말로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피를 토하고 있는 아스카, 몸이 걸레짝이 된 제임스, 손가락이 잘린 채 기절한 디노. 그리고 사라진 헬무트. 그나마 멀쩡한 건 안드로 뿐이었다.
‘위험은 내가 자초한 건데.’
애초에 교관한테 말하지 않은 건 헬무트의 독단이었다. 그는 적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즐겼다. 그 긴장감을 즐겼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즐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의 조원들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일까.
야영지로 돌아와서 쓰러진 학우들을 본 순간, 화가 났다. 그래서 깨달았다. 자신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현재의 헬무트는 자신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 돌아볼 필요가 없었던 과거의 그가 아니라는 것을.
거추장스러운 제약이 또 하나 생겼다. 제약에 매인 그는 부자유스러워졌다. 생경했다.
하지만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변화가 달갑지는 않았지만, 용납할 수 없지도 않았다. 한 걸음 더,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간 기분이다.
알란 교관과 페트리샤 교관, 드웨인 교수는 저희끼리 회의를 시작했다.
다급히 오느라 야영지를 비웠다. 이 많은 사람을 모두 이동시키는 건 이미 치유 마법을 사용한 드웨인 교수에게 무리가 된다.
이 다섯 학생과 함께 돌아가는 것도 문제였고, 하루 남은 사냥 소풍을 어떻게 할 건지도 결정해야 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말은 언제 찾지.’
현재로써는 헬무트에게 그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 단독 행동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그의 애마를 두고 갈 수는 없다. 약간 초조해진다.
“아, 좀 살 것 같다.”
뻗어 있던 아스카가 치료를 받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죽을 뻔했던 것치고 별 정신적인 타격을 받지 않은 듯 태연했다.
암살자의 팔을 베서 일격을 성공시켰다. 저보다 강한 상대로 잘 싸웠기에 기분이 좋은 것이다. 단순한 아스카다웠다.
그에 반해 나머지 두 명은 안색이 어두웠다.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그득한 얼굴이다.
왜 두 명이냐면 나머지 한 명인 디노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을 마시던 아스카가 문득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을 들었다.
“어, 저기 봐.”
헬무트는 이미 그쪽을 보고 있었다. 다각 거리는 발굽 소리와 함께 하얀 말이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헬무트는 눈썹을 들었다.
“화이트.”
말은 숲속에서 놀다가 온 듯이 경쾌해 보였다. 제 이름을 알아들었는지 화이트가 태평하게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헬무트는 다시 찾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화이트가 기분 좋은 듯이 푸르릉거렸다. 척 보기에 수작을 부려 둔 것 같지는 않다. 일종의 사후 서비스인가.
‘제법이로군.’
헬무트는 갑자기 탈론이 마음에 들었다. 거의 해치울 뻔한 사냥감을 낚아채 간 자라 감정이 살짝 남았는데, 그마저도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곧 그 뒤를 이어서 네 마리의 말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안드로와 제임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말이 왜 돌아온 거야?”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다들 제 말을 되찾았다는 것에 기뻐했다. 검사에게 자기가 오랫동안 타온 말은 소중하기 마련이었다. 검처럼 제게 맞춰 길들어 있다.
“사라진 말이 돌아오다니, 이것 참.”
드웨인 교수가 마법으로 말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상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곧 어깨를 으쓱했다.
“말에 수작을 부려 놓지는 않은 것 같군요.”
페트리샤 교관과 알란 교관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느낌이 이상하네요. 암살자가 말을 돌려줬다는 게요.”
“그냥 쫓아냈던 것이 돌아오거나 묶어 두었던 끈이 풀려 온 것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기분이 묘하군요.”
“어서 학생들을 데리고 돌아가야겠어요.”
말이 생기니 일이 좀 더 쉬워졌다. 세 명은 어떻게 해야 할지 합의를 내렸다. 페트리샤 교관이 9조의 다섯 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 지원을 요청해 놨어. 비상 상황이라 곧 마법 학부와 검술 학부 교수진이 도착할 거야.
그들을 맞이하고 다른 학생들도 소집해야 하니, 나와 드웨인 교수님은 디노와 함께 먼저 야영지로 돌아간다.
나머지 다섯 명은 좀 고생해야겠어. 짐도 있으니 알란 교관님과 함께 말을 달려 돌아가야 할 거야.”
드웨인 교수를 혹사할 게 아니라면 마법으로 다 이동할 수는 없었다.
의식불명인 디노가 말을 탈 수는 없고, 드웨인 교수 혼자서 돌아가기엔 연락할 학생이 많다. 그래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문제없어요!”
반색을 해 보인 건 짐이 많은 아스카였다. 사냥 소풍을 온답시고 이것저것 별 물건을 싸 짊어지고 온 그다.
그중 하나, 특정 구역을 진공 상태로 만드는 마법 스크롤이라도 유용하게 썼으니 가져온 보람이 있었다.
“수정 구슬이 있으니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줘요, 알란. 우린 먼저 가 볼게요.”
“예, 페트리샤, 야영지에서 뵙겠습니다.”
그것으로 귀환 방식이 결정되었다.
***
드웨인 교관을 비롯한 3명이 먼저 떠나고, 그들을 짐을 챙겨서 바로 출발했다. 9조의 구역으로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는 길은 4시간이 꼬박 걸렸다.
치유 마법으로는 상처만 치료할 뿐이다. 다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전투를 치렀다. 먹을 건 없는데 배도 고팠다.
단순히 운동량으로만 따지면 훈련이 더 고되다. 하지만 지독한 긴장감은 그만큼 체력을 소모시켰다.
떠나간 첫 야영지가 보였을 때, 피곤에 지친 9조의 조원들은 일제히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헬무트도 마찬가지였다.
“헬무트!”
야영지에 들어서자 한 남자가 그들에게로 뛰어왔다.
“에단 교관님.”
헬무트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늘 진중하던 그답지 않게 다급한 얼굴이었다. 다른 누구도 안중에 없이 다가선 에단이 말에서 내려선 헬무트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헬무트 네가 내게 말을 했었는데, 이런 일이 정말로 벌어질 줄은.”
블랙 호크가 습격했다는 소리를 이미 들었나 보다.
에단 쿠드로는 헬무트와 블랙 호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다. 자신이 전에 말했기 때문에. 헬무트는 가볍게 대꾸했다.
“저도 예상 못 했으니 자책하실 거 없어요.”
“나도 왔었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에단이 일그러트린 안면을 쓸어내렸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하는 기분은 제법 괜찮았다.
헬무트가 변했듯, 그의 주변 사람도 변했다. 그 변화는 유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