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37
136
헬무트
136화
헬무트를 비롯한 검술 학부 2학년 학생들이 아카데미로 돌아올 즈음, 페디카 숲에서의 전방위적인 수색이 행해졌다.
말할 것 없이 늦었다. 탈론과 파쇼는 이미 숲을 빠져나간 터. 암살자의 흔적은 야영지에만 남았을 뿐, 그 외에는 말끔하게 지워졌다.
하지만 1급 용병급 암살자의 존재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헬무트는, 파쇼가 제정신이라면 혼자서 다시 자신을 노릴 리 없다는 걸 알았다. 그것도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하지만 아카데미 사람들은, 특히 에단 교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헬무트는 바덴으로의 외출을 금지당했다.
다행인 점 하나는, 그 때문에 그의 일정이 단순해졌다는 것이다. 헬무트는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진술을 마치자마자 개인 수련장으로 향했다.
강한 상대와의 전투, 강렬하고 새로운 경험은 영성을 일깨운다. 헬무트는 비스를 형상화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검사.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경지에 오르면 모든 종류의 성취에 영향을 받는다. 새로운 경험, 새로운 감정, 새로운 삶. 그가 얻은 경험은 곧 그의 양식이 된다.
‘어둠의 싹이 자라났군.’
어쩔 수 없다지만, 마기를 가까이서 접했다. 어둠의 싹은 미미하게나마 커지고 있었다. 성장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둠의 싹이 커지자 그의 비스도 비례해서 늘어났다. 지지부진하던 단계를 훅 건너뛴 것처럼.
두 개의 힘은 헬무트를 지탱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견제했다. 그 덕분에 헬무트는 강해졌다. 얼마나 어떻게 강해졌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전투를 치른 것도, 영향이 있었다.’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비스를 소모하여 다시 새롭게 채워 넣는 과정. 그 모든 게 줄줄이 엮어져 있다. 하나의 순환고리. 아카데미에서 헬무트는 약해졌으나 동시에 강해졌다. 그는 성장하고 있었다.
헬무트는 이 길이 쉽지 않음을 안다. 그는 곧 다시 벽을 대면할 것이다. 하지만 그 벽을 넘어서 나아간다면 헬무트는 언젠가 다리언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과신하기는 이르지만, 그것이 먼 미래는 아니리라.
홀로 선 수련실 안에서 헬무트는 목검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헬무트는 절묘하게 두 친구와 마주쳤다. 아카데미에서 조사를 받고 뒤늦게 돌아온 아스카와 시안.
“너희들 숲에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면서?”
시안이 흥미로운 듯이 물었다. 수행 과제를 진작 마친 그는 기숙사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아예 평소에는 놀고 시험 기간에만 심혈을 쏟는 걸로 전향한 그였다.
“암살자랑 싸우는 건 어땠어. 재밌었어?”
“응, 존나 재밌었지. 이것도 재밌고!”
아스카가 사정없이 시안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아야야야야야!“
시안의 호들갑스러운 비명을 들으면서도 아스카는 힘을 주었다. 웬만하면 이 허약한 놈을 힘으로 제압하려 들지 않는다. 남의 일이라고 이렇게 가볍게 말하다니. 아스카 자신도 생각 없이 말하는 타입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내버려 둘 수 없다.
“너, 이 자식! 그게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친구한테 할 말이냐?”
“아니, 무사해 보이길래. 인사차 그렇게 말한 거지. 멀쩡해 보이는구만. 아야야, 이거 놔!”
“인사는 개뿔, 넌 좀 혼나 봐야 돼!”
투닥거리는 그들을 보면서 헬무트는 자신이 그레타 아카데미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했다. 한참, 저 멀리 어딘가로 벗어났다가 복귀한 기분이다. 놀라울 만큼 현실감이 일었다. 이미 이곳이 고향이 되어버린 듯하다.
“난 쉬러 간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제 방에 도착해 문을 열려던 헬무트는 멈칫했다.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아레아가 깨어있나.’
일찍 돌아왔으니 자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레아는 그답게도 밤늦게까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서 와.”
문을 열고 들어선 그를 아레아가 의자에서 일어나 맞았다. 묘하게 부드러운 말투였다. 헬무트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잠옷은 안 입었군.’
아레아는 학생복 차림이다. 곰돌이 잠옷을 입은 게 귀여운데 아쉽다고 생각하던 헬무트는 흠칫 놀랐다. 자신에게 그런 취향이 있다는 걸 오늘 발견한 그였다.
“자, 이거 가져.”
아레아가 내민 것은 납작하고 얇은 은판을 구부린 듯한 형태의 팔찌였다. 단순한 모양새에 글씨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헬무트는 무심코 그걸 받아 들며 물었다.
“이게 뭔데.”
“연락용 팔찌. 이걸로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연락해. 충전식이고 일회용이야.”
팔찌는 새것이었다. 갓 마법을 부여한 듯이. 룸메이트가 걱정되어 만들어 온 듯했다.
아레아는 배려심 있는 녀석이었다. 헬무트는 그를 성격 파탄자라고 욕하는 아스카와 시안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특별 대우를 받는 당사자는 그걸 인식하기 어려운 법이다.
“시동어는 ‘아레아후 아크바르’야. 착용 후에 말하면 바로 마법이 시전 돼.”
“아레아후 아크바르…… 무슨 뜻이야?”
독특한 발음. 공용어는 아니었다.
“어떤 섬지방 언어로 ‘아레아 님은 위대하시다’라는 뜻이지. 너야 기억력 좋으니까. 잘 외워 둬.”
“……그래.”
기분이 싸해진다. 헬무트는 그 시동어를 읊조리면 아레아한테 목숨을 애걸하는 느낌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왠지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팔찌를 착용했다. 무력으로 그에게 도움을 빌 일은 없겠지만, 부상을 입는다면 아레아의 치유 마법은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럼 쉬어.”
아레아는 바로 돌아서서 책상으로 향했다. 수행 과제를 정리하던 중이었나 보다. 팔찌의 감촉이 서늘했다. 꼭 족쇄를 찬 것 같은, 어딘지 속박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갸웃한 헬무트는 욕실로 향했다. 고단한 몸을 씻고 쉴 생각이었다.
***
야영지 관리인은 숲 인근에 사는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빌려줬다고 실토했다. 9조의 조원들이 말한 파쇼의 인상을 토대로 수배 전단도 붙었다. 하지만 그런 걸로 그를 잡을 수 있을까. 헬무트는 회의적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영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행정실을 색출하여 검술 학부 2학년생들이 페디카 숲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블랙 호크에 누설한 첩자를 잡아 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아카데미의 전체가 떠들썩했다.
어쨌든 그들은 다시 헬무트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차라리 헬무트가 그들에게 접촉하는 순간을 이용하려 할 터.
‘세 가지 정보라.’
헬무트는 물을 만한 정보를 생각해 봤다.
‘다리언의 원수, 내 가족, 그리고 신전 정도인가.’
바덴은 마법사에게 친숙한 도시. 인간의 성취보다도 신에 대한 순종을 중요시하는 신전과는 길이 달랐다.
배척까지는 아니지만, 갈등이 있었다. 실제로 신전에서 바덴에 결계를 설치하겠다고 압박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아직은 급하지 않아.’
헬무트는 고개를 저었다. 다리언의 원수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다. 다리언이 말해 줬으니까.
가장 필요한 정보는 두 번째다. 헬무트는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왜 그 정보를 찾는지 블랙 호크는 궁금해할 것이다. 헬무트는 그 정보를 통해서 그들이 역으로 자신의 약점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알았다.
‘국가 기밀급 정보를 제공한다는 데 잘 생각해야지.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블랙 호크에게 정말 그런 걸 제공할 능력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
헬무트는 휴일에 종일 수련에 몰두했다. 휴일이 지나고 다사다난한 소풍 주간이 끝나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헬무트는 곧 자신이 대단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그마치 1급 용병급 암살자와 맞서 싸운 녀석으로!
지나가는 아카데미 학생들은 선후배 가릴 것 없이 그를 보며 수군거렸다. 검술 학부 2학년생들은 수업 시간에 나타난 그를 ‘오오!’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막상 피 터지게 싸운 아스카가 못마땅하게 투덜거렸다.
“아니, 놈한테 칼침을 놓은 건 나고 저 자식은 그냥 도망가는 걸 쫓아간 거라니까.”
“헬무트한테 쫄려서 도망간 거라며, 그 자식.”
“그럼 헬무트가 다 한 거지.”
피 터지게 싸운 것보다 상대가 꽁지 빠지게 도망치게 하는 쪽이 더 멋있다. 아스카는 안면을 구기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안드로와 제임스는 같은 일을 겪고도 잠잠한 편이었다. 둘 다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았는지 수련실에 처박혔다. 9조에서 진작 이탈한 바실과 웨슬리, 미첼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못 돌아간 이후로 그런 일이 있었다니.”
“고생 많이 했네.”
“운이 나빴어.”
헬무트는 그들이 세력 높은 귀족 가문 자제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쇼가 그 때문에 그들을 배제한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아스카가 알았다면 속이 뒤틀린 표정을 짓겠지만, 다행히 그는 몰랐다. 헬무트는 담담하게 그들이 건네오는 말을 받아넘겼다.
“그래.”
“뭐, 있으면 방해만 되었을 테니.”
아스카 역시도 콧방귀만 끼고 넘겼다.
***
수업이 끝나고 검술 학부 건물에서 빠져나오던 헬무트와 아스카는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아, 선배.”
샤를로트가 꾸벅 인사하며 말을 걸었다. 원래도 마주치는 일이 적었지만, 헬무트와의 대련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한 직후 수련에 몰두하던 그녀였다. 그동안 마음을 추슬렀는지 표정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들을 기다린 모양이다. 헬무트가 물었다.
“용건은?”
‘또 아레아는 아니겠지.’
샤를로트는 아레아를 좋아한다. 진실이 어쨌든 헬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용건은 다행히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문은 들었습니다. 블랙 호크라는 집단의 암살자에게 습격을 받으셨다고요. 두 분 모두, 험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유일하게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녀였다. 샤를로트를 보자마자 인상을 쓴 아스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너.”
“네?”
그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뭔가를 갈등하고 있는 표정이다. 아스카는 곧 할 말을 골라냈다.
“도움이 많이 됐다.”
“네?”
샤를로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착각하지 마. 너한테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응용한 것뿐이니까.”
아스카는 휙 돌아서서 먼저 가버렸고, 샤를로트는 헬무트를 쳐다봤다.
“저게 무슨 소린지 아십니까?”
“아니.”
아스카는 원래 이상한 녀석이었다. 샤를로트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선배, 그보다 실례가 아니라면 저와 휴일에 대련을 한 번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적은 그거였던 모양이다. 하긴 그녀도 검술 학부다. 암살자한테 습격당한 것 때문에 위로의 말을 하려고 굳이 찾아올 감성은 아니었다.
귀찮음에 ‘실례야’라고 대꾸하려던 헬무트는 멈칫거렸다.
“……좋아. 단지 조건이 있어.”
“조건이 뭔데요?”
“내 질문에 답해 줘.”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요.”
“좋아.”
거래는 성사되었다. 헬무트는 그녀와 약속을 잡고 등을 돌렸다. 미루어뒀던 일이다. 하지만 블랙 호크에게 정보를 달라고 하기 전에 우선 그녀에게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는 성취를 이뤘고, 그 때문에 망설이고 있던 것들을 앞당기기로 했다. 일단은 알아두고 싶었다. 행동에 나설 시기는 아직 미정이지만.
***
“여어!”
며칠 후, 사흘 만에 요양을 마치고 복귀한 디노가 학우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원래 유쾌한 성격이었다. 눈깔이 뒤집혀 폭주했던 것치고는 양호한 상태다.
헬무트는 그의 몸에서 마기의 잔재가 완벽히 사라졌다는 것을 감지했다. 다행이었다.
‘신성 마법이 확실히 마기에 효과가 있나.’
디노의 치료비는 아카데미에서 지불했다. 마기를 완벽하게 정화하기 위해 신전에 막대한 돈을 바쳤다고 했다. 돈이 없으면 치료도 못 할 악랄한 수법이다.
애초에 헬무트가 마기를 빼내지 않았으면 치료를 하기도 전에 디노는 죽었을 테지만. 헬무트는 그걸 말해서 디노의 생명의 은인이 될 생각도, 그럴 수도 없었다. 다만.
‘그때 물어볼 걸 그랬나.’
파쇼가 자신에게 먹이려고 했던 심장을 파먹는 벌레도 독특한 수법이다. 블랙 호크에서는 헬무트가 들어 본 적 없는 수법을 썼다. 그런 수법이 한둘이 아니라면 알아 두는 게 방비가 될 거다.
생각에 잠긴 사이 주변에서는 쾌활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야, 디노! 너 오줌싸다가 암살자한테 잡혀갔다는 게 사실이냐?”
“바지 까고 잡혀갔어?”
“오줌싸개 자식. 진짜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온다.”
“시끄러워! 마려운 걸 어쩌란 말이야.”
디노는 곧 놀림거리가 되었다. 뻔뻔스럽게 대꾸하는 걸 보니 다행히 겪은 일에 비해서 정신적인 타격은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도 평화로운 검술 학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