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38
137
헬무트
137화
9장 첫 학기의 마무리
페디카 숲을 나온 이후로 별다른 사건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헬무트는 아카데미 생활에 제법 잘 녹아들었다. 그의 발톱을 숨기고, 우수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서. 평범하진 않지만 크게 모나지도 않은 돌처럼.
기말고사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마그리트 이레인, 이 이름을 가진 여인을 알아?’
‘그 이름은…….’
창가에 앉아 머리를 식히던 헬무트는 문득 몇 주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황한 듯 커진 샤를로트의 눈동자도,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대답도. 그 후로 아레아와 나누었던 수수께끼 같은 대화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왠지 아레아의 기억이 유독 강렬했다.
‘너 그 1학년 여학생과 대련을 했다면서?’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지만, 매서운 눈빛이었다.
‘아아, 해달라고 해서.’
‘넌 해달라고 하면 다 해 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해 줄만한 사이라는 거야?’
‘해 줄만한 사이?’
‘그걸 몰라서 물어?’
왠지 피곤해지는 대화 끝에, 헬무트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에게 밝힐 수 없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 괜찮은 녀석이라 운동 삼아 붙어 본 거야. 아스카와 했다간 삐칠 게 뻔하잖아. 당연히 내가 이길 테니까.’
‘아, 뭐 그래.’
그제야 아레아는 납득했다. 자신도 너무 캐물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홱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충고를 남겼다.
‘아무튼 조심해!’
자신의 추종자를 조심하라는 걸까? 헬무트가 보기에 샤를로트는 아레아를 피곤하게 할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판단. 아레아가 듣는다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뜻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헬무트는 굳이 제가 답을 찾아낼 수 없는 수수께끼에 매달리지 않았다.
‘집착 받는 기분이 드는데 착각일까.’
아레아는 친구가 사실상 헬무트밖에 없었다. 인간관계가 협소한 경우 하나뿐인 친구에게 편중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 면에서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사실 헬무트는 아레아의 비밀을 아니, 다른 쪽으로도 의심해 볼 만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쪽에 완전히 꽝이었다.
또한 어떤 면에선 무감각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던했다. 그냥 집착 당하면, 집착 당하나 보다 하고 마는 것이다.
헬무트는 책을 닫았다. 그는 이번에는 색다르게 도서관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제는 공부 방법을 안다. 더 이상 과외를 받지 않아도 되었기에 학습실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아스카는 도서관이 숨 막힌다며 시안과 함께 학습실을 빌렸다. 헬무트는 방해가 되는 그들을 자연스레 떨칠 수 있었다.
헬무트는 새로운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그의 성취에 영향을 준다는 걸 깨달은 터였다. 그 새로운 경험을 늘려 보려고 고심하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면 미어터지는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도서관에서는 모두가 양쪽에 일렬로 늘어서서 앉는 식탁 같은 기다란 테이블에서 공부했다.
줄줄이 책을 쌓아 놓고 앉아서 코를 박았다. 사방은 펜 움직이는 소리나 종이가 사각대는 소리만 들릴 만큼 고요했다.
거기서 헬무트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지독하게 잘생긴 검술 학부 남학생의 등장에, 시선이 쏟아졌다.
대체는 제 코가 석 자라 책에 다시 시선을 파묻었지만,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이도 있었다.
“이거 마시면서 해.”
고혹적인 느낌을 주는 한 미소녀가 그의 자리에 레몬 주스가 담긴 유리병을 놓았다. 헬무트는 그것을 의심스럽게 본 뒤 차갑게 말했다.
“전 신 거 안 먹어요.”
별로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선배가 주는 걸 먹긴 찝찝했다. 상대는 그에게 솜사탕이 뭔지 알려 준 마법 학부 3학년 수석. 아레아의 추종자다.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헬무트는 그렇게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 인사한 적 있는데 내 이름 기억해?”
“글쎄요. 여긴 도서관이고 떠들면 안 되죠.”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린 거였지만, 공부 벌레들이 가득한 독서실이다. 다들 예민했다. 테레사는 제게 쏠린 눈총을 느끼고 움찔거렸다. 그녀가 헬무트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럼 같이 잠깐만 나갈래? 할 말이 있는데.”
누구나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소녀였다. 적극적으로 나오는 태도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의 눈이 책으로 향했다.
“아니요.”
헬무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전 시험공부를 해야 해요.”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테레사는 자존심이 팍 상했다. 학내에선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녀다. 이렇게까지 도도하게 나오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방해하지 않을 게. 다음에 봐.”
다음에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헬무트는 가볍게 응답했다.
“네.”
실력 있는 마법사한테 원한을 사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
“여어, 헬무트. 시험공부는 잘되어가?”
자정이 될 무렵, 헬무트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시안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아스카와 함께 잘도 붙어 다니는 그였다. 공부를 하는 건지, 야식을 먹으러 다니는 건지. 헬무트는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시험 기간에 들어서면서 시안의 볼이 통통해졌기 때문에.
“이번에 검술 학부 2학년 실기가 좀 재밌을 거라던데. 마법 학부 교수님들이 교관님들과 이야기 하는 걸 보았거든. 실전형 시험일 거래.”
아스카가 코웃음 쳤다.
“잘 된 거지. 실전에 나가면 아무것도 못 할 녀석들, 성적이 곤두박질칠 테니까.”
1급 용병급 암살자를 상대한 이후로, 아스카는 제 전투 감각에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파쇼가 쉬엄쉬엄 상대했다고 쳐도, 아카데미 6학년도 웬만해서는 오래 못 버틸 그에게 일격을 가했다. 비록, 운도 따랐다지만 아스카에게는 이럴 때 운도 실력이었다.
“난 역시 천재야.”
아스카가 돌연 중얼거렸다. 그는 헬무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자식이 더 천재라고 해서 내가 천재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
천재는 유일무이한 단어가 아니다. 다수보다 뛰어난 소수는 수재라고 불리고, 그 소수에서도 극소수만이 천재라는 단어로 불린다.
아스카도 그 단어로 불릴 자격이 있었다. 대련에서도 지고, 자신만만하던 실력도 헬무트 때문에 2등으로 밀렸다. 아스카도 그간 스트레스를 받았다. 가졌던 것을 빼앗긴 박탈감. 헬무트에 대한 악감정은 없더라도 분한 건 분한 거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아스카였다. 헬무트가 아닌 동 학년의 다른 녀석들은 그의 발치도 따르지 못한다. 그만큼 경험이 없는데 강자와의 실전을 효과적으로 치러 낼 수 있는 녀석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런 아스카도 헬무트 앞에서는 범인이 된다. 그는 틱틱거리며 물었다.
“너 필기는 이제 자신 있어?”
왠지 헬무트가 얄미워진 아스카였다.
“그럭저럭.”
“그거 알아? 내가 필기 만점 받으면 네 성적 넘을지도 모른다는 거.”
그건…… 아주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었다. 헬무트와 아스카 사이의 실기 점수는 얼마 차이 나지 않을 테니까.
“두고 봐, 이번엔 내가 이길 테니까.”
헬무트는 투쟁심을 보이는 아스카를 빤히 바라봤다. 패배 심리에 물들어서 2인자 자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이렇게 의욕 있는 쪽이 낫다. 하지만 그 의욕이 헬무트에게도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헬무트는 살짝 공격적으로 말했다.
“좋을 대로 해. 어차피 이기는 건 나일 테니까.”
“어어? 거만하게 나오는 거 봐라. 아레아 닮아가?”
아스카에게 아레아를 들먹이는 건 누구에게나 욕처럼 들릴 거라고 느껴지는가 보다. 시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내기할래? 지는 쪽이 운동장에서 바지 벗고 엉덩이로 이름 쓰기로.”
그가 얼른 덧붙였다.
“속옷은 입어도 돼.”
그는 이미 아스카의 패배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앙심도 있었다. 아스카 때문에 운동장을 돌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짜증이 인다. 아스카가 콧방귀를 꼈다.
“그런 거 하면 정학감이거든? 친구를 정학당하게 놔둘 수는 없지.”
아무리 자신감 있는 듯이 말했어도, 그런 내기 따윈 안 한다. 아스카는 의외로 도박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겁쟁이! 너 질 것 같아서 그렇지? 지금 그냥 입 털어 본 거지?”
시안이 깐죽거리자 아스카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너 안 닥칠래? 그런다고 내가 도발에 넘어갈 줄 알아?”
“입만 살아 가지고는. 으악!”
아스카가 팔뚝으로 목을 조이자 시안이 발버둥 쳤다. 시안의 어깨에 붙어 있던 빛의 정령이 내 마법사를 건들지 말라며 아스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시험 기간에도 그들은 여전히 활발하고 기운이 넘쳤다. 죽이 잘 맞는 것 같다.
“……난 이만.”
헬무트는 조용히 물러났다. 아스카가 저러고 있는 동안, 그는 수석 자리를 수성하는 데 힘쓸 생각이었다. 헬무트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다. 아레아는 자리에 없었다.
요즘 들어 헬무트는 자정 즈음에 잠들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조금 더 책을 들여다보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수련했다. 그다음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었다.
아레아는 그보다 늦은 시간에 들어와서 늦게까지 잤다. 욕실에서 씻고 나온 헬무트는 문득 제 책상 위에 올려진 한 노트를 발견했다.
‘이건 뭐지.’
펼쳐보니 맨 앞장에 ‘마법의 이해’ 시험 예상 논술 문제가 적혀 있었다. 다섯 가지다. 헬무트는 책장을 넘겼다. 그 뒤에 적혀 있는 건, 그의 답안이다. 갈겨쓰듯 적어 내린 글씨체였는데 언뜻 보기에도 놀라울 만큼 훌륭한 답안이었다. 논리의 전개, 어휘 수준, 풍부한 지식, 그의 견해까지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다.
얼마 전에 지나가듯이 시험 범위를 물어보길래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는데 기억했던 걸까. 과외는 분명히 끝났다.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사후 서비스인가 보다.
“……후하군.”
아레아는 헬무트가 암살자에게 습격받았다가 살아나 온 이후, 그에게 잘해 주고 있었다. 자신이 안쓰럽기라도 했던 걸까. 헬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날 이후로, 한시도 아레아가 준 팔찌를 빼놓지 않고 있었다. 아레아가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고.
“난 안 죽는데.”
그리 위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왠지 누군가가 자신을 돌봐 주는 느낌이, 나쁘진 않았다. 설마 이런 걸로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을 터.
‘룸메이트에게는 원래 이 정도로 신경을 써 주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지만, 좀 과하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아레아가 독특한 성격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거면 어쨌든 도움이 많이 되겠어.’
아레아의 예상 문제를 종이에 옮겨 풀다 보니 졸음이 왔다. 헬무트는 작성한 답안을 그대로 책상에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레아가 늦게 돌아왔기에 그날 밤, 마주치는 건 요원해 보였다.
‘보게 되면 고맙다고 해야겠지.’
헬무트는 눈을 감았다. 아레아가 드나들어도 그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짝 곤두선 경계심도, 아레아와 함께 방을 쓰면서 무뎌졌다.
하지만 그의 잠은 길지 않았다. 헬무트는 하루에 네다섯 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 많이 자도 일곱 시간을 넘지 않는 그이니 시험 기간에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적은 시간에 헬무트는 온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깊은 수면이었다.
새벽 무렵, 자고 일어난 그는 세수를 하고 책상으로 향했다. 수련하기 전, 어제 쓰고 잠든 답안지를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헬무트가 그의 책상에서 발견한 건, 엄청나게 많은 빨간 표시가 되어 있는 답안지였다.
‘아레아가 봤나.’
헬무트는 머쓱하게 답안지를 들여다봤다. 여전히 그의 답안은 아레아에게 수준 미달이었나 보다. 첨삭해 주다가 짜증이 났는지 글씨체가 흐트러진 흔적이 보인다. 꼭 잔소리하는 듯한 말투로 써 있다.
‘필담을 나누는 것 같군.’
아레아는 자고 있었다. 새벽에 들어왔을 테니, 새벽인 지금 그가 잠든 건 당연한 일이다. 헬무트는 아레아의 첨삭을 토대로 제 답안을 고쳐 보다가 수련을 하러 나왔다. 아침부터 글씨를 쳐다보기가 싫다는 점에서 그도 퍽 검술 학부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