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39
138
헬무트
138화
수련장에 거의 다다랐을 때, 헬무트는 그녀와 마주쳤다. 정말로 우연이었다. 순간 조심하라고 경고를 던지던 아레아를 떠올린 헬무트는 움찔했다.
“안녕하세요.”
샤를로트가 당혹한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이 새벽부터 수련장을 찾을 정도면, 그녀도 열심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걸로도 모자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둘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수련하러 온 거야?”
“예, 예!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샤를로트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쫓기는 듯이 사라져 갔다. 헬무트는 미간을 좁혔다. 꼭 죄를 지은 듯이 군다. 어째서?
‘하긴 그레타 아카데미에서는…….’
물어서도, 말해서도 안 될 규칙이 있다. 헬무트는 샤를로트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가 ‘마그리트 이레인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모, 모릅니다. 선배, 아카데미 규칙상 그런 걸 물어보면…….”
당황한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샤를로트는 거짓말을 잘 못 하는 성격이다. 그 때문에 헬무트는 확신을 얻었다. 그 이름의 여인과 그녀가, 아주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일순 수많은 질문이 쏟아져나와 목구멍에 걸렸다. 살아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건강한가. 자신을…… 기억하는가. 그러나 폭류는 이성에 가로막혔다. 어둠의 싹의 존재가 그의 혀를 붙잡았다.
“그래.”
헬무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짤막한 응답뿐이었다.
“내가 물어봤다는 건 잊어버려. 별일 아니니.”
생각보다 빠르게 답을 찾았다. 샤를로트, 그녀가 답이었다. 헬무트는 샤를로트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되짚어 봤다.
아마 꽤 유력한 귀족 가문의 자녀. 틀림없는 귀족이다. 그녀가 귀족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의 부모도 그럴 터.
그렇다면 아직 살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찾는 건 먼 미래의 일처럼 생각해 왔다. 파헤의 숲을 나오는 것만큼 어렵고 고된 과정 일 거라 은연중에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눈앞에 떨어진 실마리에, 헬무트는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혈연이라…….’
평생을 따로 떨어져서 살아왔다. 기억이라고는 아기 때의 그 잠깐뿐.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조차도 가물가물하다. 그의 어머니는, 과연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을 반가워할까. 아니면?
‘어둠의 싹을 가진 아이가 돌아왔다면,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
신전은 마그리트 이레인이 어둠의 싹을 가진 아이를 낳았다는 걸 안다. 난데없이 그녀에게 아들이 생긴다면,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가족은 어머니 한 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헬무트가 기억하는 건 그녀뿐이었지만, 어머니 혼자 그를 낳았을 리 만무하다.
아버지, 그리고 형제와 친척들. 귀족이라고 하면, 아마 혈연으로 이어진 자들이 한둘은 아니리라.
‘그들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지.’
스쳐 지날 뿐인 검술 학부 학우조차도 자신 때문에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자신의 등장이 그들에게 불행으로 밀어닥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헬무트는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디노와 안드로, 제임스를 무시할 수가 없었던 건, 그들이 처한 상황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은 아기 때 헬무트가 파헤의 숲에 던져진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죽을 위험에 처했다.
헬무트는 마음속 깊이 그것을 부당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위험에 처한 원인이 자신이었기에 더더욱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헬무트가 숲에 던져진 원인은 어둠의 싹이고 신전이다. 헬무트는 과거를 돌이킬 수 없고, 돌이킨다고 한들 무엇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미래는 바뀔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싸울 수 있었다. 어둠의 싹을 가졌다는 건,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은 아니었다.
헬무트는 파헤의 숲에서 살아남았고, 그곳을 나왔고 이제 인간 세상에 땅을 딛고 서 있었다. 대마법사 안티올이 말한 대로, 언젠가 그는 이 힘마저도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 현재의 그는 안전할 만큼 강하지 않다.
완벽하게 안전한 때는 없다. 하지만 지금이 그의 정체를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해도 좋을 때일까.
헬무트는 고민했으나, 곧 답을 내렸다.
‘아직은 아니야.’
그는 아직, 신전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적절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놓치지는 않을 테지만. 그가 스스로 찾아 나서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그리고 지금은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
“다들 주목! 기말고사 실기 시험에 대한 소문은 들었겠지?”
기말고사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알란 교관이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실기 시험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자 검술 학부 학생들은 모두 잔뜩 들떴다.
“환상 마법이라고?”
“굉장한걸. 재미있겠어.”
“응용력이나 실전 경험을 중시하는 시험인 건가.”
“상대는 마물이라고? 심장 약한 놈들은 보고 기절하는 거 아니야?”
헬무트는 소란한 와중에 가만히 알란 교수의 말을 되짚어 봤다.
아카데미 내부에는 커다란 돔 형태의 건물이 있다. 시험은 그 안에서 치러진다. 온갖 마법의 정수가 담긴 정교하고도 튼튼한 건물이다. 그 안에 들어가서 시험이 시작되면, 마물이 마법으로 구현된다. 환상이지만 실제와 거의 같은 형태와 속도를 가지고 있다.
베거나 급소를 찔러서 전투 불능으로 만들면 마물은 사라진다. 마법으로 구현된 마물은 제법 생생한 모습일 테지만, 실제로 이쪽을 타격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물한테 치명상을 입을 만한 부위를 가격당하면, 시험은 바로 종료된다.
시험은 총 10단계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쉬운 마물이 나오지만 차츰 어려운 마물이 나오는 식이다. 마물을 상대로 어떻게 싸웠느냐, 얼마나 높은 단계까지 갔느냐에 따라 시험 점수가 정해졌다.
2학년 수준으로는, 4단계도 힘들 거라고 했다. 실전 실력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학생들은 진검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간다.
“주의 사항이 있다. 비스를 써도 좋으나 괜히 벽을 향해 검을 휘둘러서 기물을 파손하지는 말도록. 마법 학부 교수님들한테 저주를 받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알겠나?”
“예!”
설명을 듣던 아스카가 말을 걸어왔다.
“시안 말대로 재밌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
“그래.”
“자신 있어? 마물과 싸우는 거잖아. 존나 끔찍한 놈들 나올 것 같지 않냐. 심장 벌렁벌렁하게.”
아스카가 눈을 찡그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헬무트는 호송 의뢰를 할 때 본, 산채로 사람을 씹어먹는 원숭이 마물을 떠올렸다. 끔찍하다면 그런 모습일 터. 그건 몇 단계나 될까. 2학년들 수준으로는 열댓 명은 달라붙어야 할 거다. 그중 한둘은 죽을 거고.
아닌가. 다 죽을 수도 있다. 개개의 힘을 하나하나 더하면 놈보다 강할 테지만, 이것은 산수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문제다. 기본적으로 놈에게 공격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엘라가라면 10단계? 아니, 이들의 마법 수준으로는 구현하지도 못하겠군.’
헬무트는 파헤의 숲 중앙 권역을 다스리는 집채만 한 표범을 떠올렸다. 성격은 허당이지만, 엘라가는 더럽게 셌다. 헬무트가 이를 악물고 덤벼들어도 꼬리로 퍽 쳐서 바닥에 굴릴 만큼.
이제 자신은 강해졌다. 그와의 격차는 지금 얼마나 줄어들었을까. 헬무트는 그걸 생각해 보지 않기로 했다. 기분만 나빠지니까.
‘나호도 먹었으니 더 강해졌겠지.’
원래도 나호보다 엘라가가 좀 더 우위에 있었다. 나호의 한쪽 대가리가 사라진 상태였으니 그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엘라가 역시도 헬무트가 파헤의 숲을 빠져나갔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어쨌든 여기서 내가 더 높은 단계에 이르면 아스카와 점수 차이를 벌릴 수 있을 테지.’
반가운 시험 방식이었다. 헬무트는 최대한 까다롭고 강한 마물이 나오기를 바랐다. 아스카는 마물과 싸워 본 적이 없었다.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추측이 맞았다.
“아이 씨, 근데 완전 흉악하거나 징그럽게 생긴 놈 나오면 어떡하지? 당황할 수도 있잖아.”
“사람하고는 잘 싸웠으면서.”
헬무트는 불현듯 파쇼의 낯짝을 떠올렸다. 그에겐 그쪽이 더 징그러웠다.
“사람하고 마물 하고 같냐? 사람은 생긴 것부터가 좀 작고 만만하잖아. 마물은 이빨도 이렇고 크아아앙! 이렇게 살벌하게 소리 지르지 않나.”
아스카가 이를 드러내며 크앙 거리자 저편에서 웃음을 터뜨릴 뻔한 녀석들이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귀엽게 굴거나 우스워도 아스카다. 미친개의 악명은 아직 죽지 않았다.
“……겁낼 것 없어. 실제로 죽는 것도 아닌데.”
때로는 마물보다 강한 사람도 있다. 인간은 교묘하며 마물이 싸우지 않는 방식으로도 싸우기도 한다.
“넌 마물하고 좀 싸워 봤나 봐. 태연하게.”
“그래.”
좀 많이 싸워 봤다. 그것도 아마 시험 기준 10단계 이상의 마물과. 아스카의 눈이 반짝였다. 흥미가 돋는 표정이다.
“야,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살았길래 그렇게 남들 못해 본 걸 다 해 보고 살았냐.”
“반대지. 남들 해 본 것도 못해 보고 살았으니까.”
“그건 무슨 소리야?”
“점심이나 먹으러 가지.”
헬무트가 턱짓하고 먼저 발을 움직였다. 적정선에서 끊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캐물을 눈치였다. 아스카가 투덜대면서 뒤를 따랐다.
“비싸게 굴기는. 존나 뭐 뒤 구린 것처럼 과거 숨기려고 들어. 지가 무슨 신전에서 지명한 공적이라도 되나.”
“…….”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아스카였다.
***
자정 무렵, 헬무트는 그날따라 일찍 돌아온 아레아와 마주했다. 노트를 줘서 고맙다고 말하자, 그가 왠지 고개를 홱 돌렸다.
“이왕 성적을 잘 받았으니 유지를 해야지. 넌 교관 추천으로 들어오기도 했잖아.”
“그래.”
헬무트는 시험 준비가 잘 되어가냐고 묻지 않았다. 마법 학부 수석에게는 우스운 질문이었다. 아레아는 어련히 잘하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아레아가 물었다.
“시험 준비는 잘 되어 가?”
헬무트가 검술 학부 실기 시험에 대해서 말하자 아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환상 마법 시험? 그거 우리도 하는데.”
“마법사도 해?”
“마법사도 실전 경험이 중요하다 뭐다 하는 말이 있거든, 그 때문에 우리도 그거 해. 우리 쪽이 더 힘들지. 마물은 보통 사람보다 순발력이 좋고, 마법은 구현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보통 검사와 마법사는 쌍으로 다녔다. 검사 여러 명에, 마법사는 한 명. 그래서 검술 학부에서는 그 구도를 우스갯소리로 공주님과 기사들이라고 말했다.
“10단계를 통과해야 만점인 거 아닌가?”
수준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시설 자체는 고학년까지도 시험을 치르는 시설이다. 아무리 아레아라고 해도 실전 경험이 많은 것 같지 않다. 아레아의 전 과목 만점 기록이 깨지는 건 아닐지 궁금해진다.
“마법 학부 기준으로는 상대평가로 가장 높은 단계까지 이르면 만점이야. 그리고 나보다 더 높은 단계에 이를 녀석은 없지.”
아레아는 코웃음 치며 단언했다.
“하지만 시안에게는 정령이 있지. 요령껏 시험에서 높은 단계에 이르면 그만 아닌가.”
그 말에 아레아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네 말은 일리가 있어.”
아무리 시안이 요령을 부린다고 해도, 자신이 시안보다 낮은 단계에 머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레아는 방심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수석 자리와 전 과목 만점을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
“아주, 일리가 있어…….”
중얼거리는 아레아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왠지 모르게 한기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헬무트는 괜한 말을 했나 생각했다.
***
“아레아가 갑자기 날 쌩하니 무시하기 시작하는데, 이유를 알아?”
다음날, 기숙사에서 마주친 시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헬무트한테 물어왔다.
“새로운 시험을 앞둬서 예민해져 있나 보지. 마법사에게는 까다로운 방식의 시험이라던데.”
까딱 잘못하거나 마법에 실수가 있으면 바로 그대로 시험이 종결될 수 있다. 아레아는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경쟁자가 제법 셌다.
시안의 정령은 사고할 줄 알아서 시전자가 계산하는 대로 쏘아져 나갈 뿐인 마법과는 달랐다. 제 마음대로 공격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의외의 상황에 대처하기 편하다. 그 때문에 그는 생각보다 더 이 시험에서 유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