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4
13
헬무트
13화
그리고 4년.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열네 살의 헬무트는 큰 키와 체격 덕에 열여섯 살 정도로 보였다.
타고난 거구는 아니었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훈련이 영향을 미쳤다.
껑충 키가 커 호리호리해 보이나 근육으로 다져진 몸. 손재주가 늘어 그럴듯한 형태를 갖춘 옷은 품이 넉넉했다.
키가 계속 자라다 보니,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파헤의 숲. 창백한 얼굴과 대조되는 새까만 눈동자는 묘한 빛을 띠었다. 총기가 감도는 깊은 눈이다.
씻고 다듬고 옷을 입으니 지저분한 모습에 감춰졌던 용모도 살아났다.
단정하고 수려한 이목구비는 귀티가 났다. 똑바로 선 자세는 단정하고 곧으니 옷을 제대로 갖춰 입는다면 귀공자처럼 보일 것이다.
그의 성장을 목격하니 무딘 다리언도 가슴이 벅찼다. 크흠, 헛기침한 그가 말했다.
“키가 꽤 컸구나. 처음 만났을 땐 이만한 꼬마였는데.”
‘그러는 다리언은.’
늙었다고 말하려다가 헬무트는 입을 닫았다. 그도 눈치가 늘었다.
처음 만났을 때 다리언이 아흔여섯이라고 했으니 이제 백 세일 것이다.
고강한 검사인 그는 원기가 성성하여 그 나이의 노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새는 어딘지 힘이 빠져 보였다. 이제야 서서히 제 나이를 찾아가기 시작한 듯이.
“당연하잖아요? 나이를 먹었으니까. 그보다 오늘 어때요?”
헬무트는 자신만만하게 허리를 폈다. 오늘 대련에서 헬무트는 최초로 다리언을 향한 공격에 성공했다.
비스를 쓰지 않은 대련, 그래 봐야 열 번 중 한 번의 성공에 불과한 데다가 복부를 가볍게 스쳤을 뿐이다.
하지만 다리언의 옷깃조차도 스치지 못했던 이전에 비하자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헬무트의 공격은 나날이 날카로워졌다.
“조금은 쓸 만해졌구나.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구태여 사족을 단다. 다리언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보다 네 비스를 한번 보여 봐라.”
헬무트는 바닥으로 늘어뜨렸던 손을 들었다. 목검 끝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 상태로 정지한 채 헬무트는 정신을 집중했다. 검 끝을 타고 옅은 빛이 비쳐 올랐다.
‘열네 살에 비스의 형상화라.’
헬무트가 비스를 형상화할 수 있게 된 지는 어언 1년이었다.
비스를 십 대에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검사는 지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모두가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검사가 되었다.
헬무트는 고작 열네 살. 단순히 재능으로 설명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어둠의 싹이란 건 무서운 힘이로구나.’
다리언은 침중한 눈으로 헬무트의 성취를 바라보았다. 그는 10대에 비스를 형상화했던 몇 안 되는 검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이 검을 배운지 고작 4년이 지났던 시점은 아니었다.
주신 루멘의 권속들은 수십만분의 일의 확률로 어둠의 싹을 몸에 품고 태어난 갓난아기들을 찾아내어 죽이거나 파헤의 숲으로 이동시켰다.
다리언은 그 이유를 직접 확인한 기분이었다. 어둠의 싹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는 어떤 괴물로 자라날지 모른다.
선량하게 자라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악인이 된다면…….
‘세상에 다시 없을 재앙이 오리라.’
어둠의 싹은 세상에 흩어진 마왕의 파편이라고 알려졌다. 만약 그 몸에서 마왕이 부활하기라도 한다면 세상은 다시 멸망과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헬무트를 처음 만난 이후로 다리언은 쭉 고뇌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를 제자로 삼았지.’
만약 헬무트가 험난한 훈련 도중에 한 번이라도 폭주했다면 다리언은 그를 죽이진 않더라도 포기했을 것이다.
어둠의 싹은 심성을 흉포하게 한다. 혈기 넘치는 어린 소년이 강함을 갖추게 된다면 더더욱 그 영향을 받기 쉬웠다.
하지만 헬무트는 차분한 기질 덕에 어둠의 싹의 영향을 잘 누그러뜨리는 것처럼 보였다.
헬무트는 잘 화를 내지 않았다. 화가 나면 눈빛이 달라졌지만, 그때도 기분과 충동을 다스릴 줄 알았다. 잔혹하거나 충동적인 심성은 아니다.
그러나 저것. 다리언은 무거운 눈으로 헬무트의 검 끝을 응시했다.
피어오른 비스는 흐린 잿빛이었다. 헬무트가 처음으로 형상화한 비스는 이보다 더 희었다. 그의 비스는 원래 청백색이었다.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이다. 그 의미는…….
‘어둠의 싹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
아무리 식사에 신경을 쓰고, 마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이곳은 파헤의 숲.
마기가 충만한 이 숲에서 어둠의 싹의 성장을 완전히 막을 방법은 없다.
어둠의 싹은 헬무트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천천히 몸을 키우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저 아이가 그것에 먹혀 버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다리언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허나 이 아이가 나가 세상을 파멸시키더라도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그가 죽고 난 이후의 일일 터.
배신당해 파헤의 숲에 떨어진 이후 다리언은 여기서 생을 다할 운명이었다.
나갈 방법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진즉 포기한 이유는 모든 것을 되찾으려면 남은 생을 진창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걸어야 할 피의 길을 알았기에 포기할 수 있었다.
‘아쉬운 건, 내가 갈고 다듬어 정립한 검술을 이 세상에 남길 수 없다는 것이었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 달리 제자를 두지 않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이, 다리언이 배신의 조짐을 알 수 없었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후회는 항상 늦었다.
그러나 다리언에게 기회가 왔다. 제 발로 그를 찾아온 헬무트는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였다. 헬무트의 등장에 전율했으나, 그는 어둠의 싹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망설일 게 뭐가 있던가.’
다리언에겐 어차피 잃을 것이 없었다.
‘이제까지처럼 앞으로도 자신을 잘 통제하기를 바랄 수밖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간은 늙으면 죽는다. 강건한 육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아무리 많은 비스를 가지고 있어도 파헤의 짙은 마기는 수명을 갉아먹는다. 다리언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좀 더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건만, 슬슬 때가 다가오는가.’
다리언은 서둘렀다. 부러 헬무트를 다그치고 험하게 다루면서 제가 가진 지식이며 경험을 녹여 넣으려고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리언의 검술을 거의 익힌 것은 물론, 헬무트는 처음 만났을 때 비해 제법 사람다워졌다. 태어나자마자 야생에서 자라난 아이가 인간 흉내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 세상에 대한 상식을 가르쳤으니 바깥에 나가서도 그럭저럭 적응할 것이다.
파헤의 숲을 나서는 것이 앞선 문제지만, 그 표범 엘라가의 도움이 있다면……. 그 후로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다리언은 헬무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만약에 네가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끈기 있고 노력할 줄 아는 아이였다. 좋은 신분을 타고났으며 재능도 있다. 어둠의 싹이 없었더라도 잘 교육받았다면 대륙을 떨칠 검사가 되었을 거다.
어둠의 싹이 헬무트에게서 그 모든 것을 박탈시켰다. 마물의 품에서 자라난 이 아이에겐 앞으로도 험난한 운명이 주어질 터.
‘잘 견뎌 내겠지. 마물의 품에서 자라날 수 있었던 것도 제 운이니.’
다만 염려되는 것이 있었다.
‘이 아이는 인간과 섞이지 않았다.’
파헤의 숲으로 던져진 이후 접한 인간이라곤 다리언 한 명뿐. 4년이란 세월 동안 함께해 오면서 다리언과 헬무트 사이도 꽤 가까워졌다.
하지만 다리언은 일부러 정 붙이지 않으려고 헬무트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지 않는 게 나았을까.’
흉포한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짐승처럼 자라온 아이. 어떤 사람은 악의나 분노 없이도 사람을 해칠 수 있다. 필요라는 이유로 말이다.
처음엔 다리언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더라도, 어떻게 변해갈지 모른다.
돈이 부족하면 죽여서 빼앗고, 성욕이 일면 여자를 겁탈하고 배가 고프면 번거로운 사냥감을 노릴 것 없이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었다. 아무런 가책 없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도, 온기도 알지 못하는 이가 생명의 귀중함이나 도덕을 알 것인가. 그저 머리로만 배웠을 뿐인데.
엘라가라는 마물과는 제법 사이가 좋은 듯했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마물과 인간은 다른 법이니까.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겠군.’
다리언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계획을 더 세웠다. 헬무트가 인간 세상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줄 계획이었다.
몇 주 뒤 다리언은 헬무트를 세워 놓고 말했다.
“이제 때가 되었다.”
“때라니요?”
“파헤의 숲을 빠져나갈 때. 녀석아,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 알았느냐.”
“이렇게 갑자기?”
헬무트는 내뱉자마자 방어 자세를 취했다. 타이밍을 봐선 다리언이 한 번쯤 쥐어박을 때였다. 하지만 다리언은 한심하단 눈초리로,
“말이 짧다.”
라고만 했을 뿐 주먹을 뻗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은 일이었다.
헬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리언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놈의 어둠의 싹이 더 자라면, 넌 절대 신성 결계를 통과할 수 없다. 지금이 적기다.”
“난 별로 강해진 거 모르겠는데요. 내가 숲을 나가는 거, 가능하겠어요?”
당연한 의문이었다. 다리언에게 단 한 번의 공격을 성공시킨 후로 고작 몇 주가 지났을 뿐이다.
얼마 전에 목검을 들고 대련이랍시고 엘라가에게 덤벼들었다가 혼쭐이 났다.
다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시기는 없다. 하지만 가능한 시기는 있지.”
“당신은, 어떻게 할 건데요?”
“내게 지난 4년간 공짜로 가르침을 받은 거로도 모자라서 나가는 걸 도와달라고 할 셈이냐?”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헬무트는 약간 억울해졌다. 자신이 온 이후로 다리언의 생활이 더 편해졌으면 편해졌지 나빠진 건 없었을 거다.
‘허드렛일은 내가 다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