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44
143
헬무트
143화
10장 다리언이 남긴 것
“나는 지금 떠날까 해.”
이른 아침, 아레아가 헬무트에게 한 말이었다. 아직 짐을 뺄 필요는 없지만, 며칠 전부터 대강 정리는 해 두었다. 꼭 필요한 물건만을 구비해 놓은 그였기에 정리할 것도 많지 않다.
아레아가 물었다.
“너도 바로 떠날 거야?”
“기숙사에서는 곧. 에단에게 들렸다가 오후쯤 바덴을 나서려고.”
마지막으로 에단에게 들러서 함께 점심을 들고, 학장이 보낸 아티팩트를 테스트하고, 준비를 마친 뒤 바덴을 떠날 거다.
행선지가 같다면 중간까지는 함께해도 좋겠지만, 둘 다 서로에게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말해서는 안 됐다. 그건 시안이나 아스카도 마찬가지였다.
비밀을 가진 두 명은, 침묵 속에서 망설였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시간을 끌었다.
두 개의 시선이 마주쳤다. 보랏빛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하자 어딘지 가슴 한쪽이 아릿했다. 심장이 시큰거리는 것 같다.
헬무트는 서서히 이 증상이 아레아의 마력 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 가고 있었다.
결국 입을 연 건 먼저 떠나기로 한 아레아였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팔찌를 이용해서 나를 불러. 일회용이니 쓸데없이 부르지는 말고.”
“그래.”
“방학 잘 보내.”
담백한 한 마디와 함께 그, 아니 그녀는 돌아섰다. 탁. 문이 닫히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헬무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모두가 떠나가겠지만 결국 다시 바덴에서, 이곳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두 달 후.
먼 미래는 아니었다. 헬무트는 그때를 기약하기로 했다.
***
‘제가 당신의 복수를 하길 원하세요?’
헬무트는 과거에, 다리언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다리언은 대답했다.
‘아니.’
그러나 다리언은, 그가 헬무트에게 검을 가르친 건 나가서 죽으란 의도가 아니었다고 답했다. 헬무트는 그대로 긍정했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때로부터 고작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헬무트는 변했다. 그는 그때 더 자세히 묻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직접 말하지 않으면, 속뜻을 짐작하지 못했던 때이다.
‘만약 다리언이 복수를 원했다면. 하지만 나를 생각해서 그렇게 해 달라 말하지 못한 거라면.’
에단은 헬무트가 응당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리언의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배신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에단이 생각하는 정의였다.
그 말은, 다리언이 누군가에게 배신당할 만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다리언은 자신이 파헤의 숲을 나가면 복수를 해야 하기에, 나가지 않을 거라고 했지.’
그 말은 다리언이 복수를 할 능력은 되었다는 소리일까.
헬무트는 언젠가 자신이 다리언의 경지에 이르게 될 거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미리 좀 알아볼 수는 있지. 처리는 나중에 하더라도.’
다리언의 적들이 어떤 자들인지. 그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판단해야 한다. 과연, 죽여 원수를 갚아도 거리낌 없을 자들인지.
만약 그들이 선인이거나 이미 회개했다면 파헤의 숲에서 인간들을 사육하던 에루고조차도 죽이길 원치 않았던 다리언은, 복수를 원치 않을 것이다. 악행을 벌였더라도, 때로는 상황에 따라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자들도 있었다. 다리언은 항상 대의를 생각했다.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헬무트는 그 점을 제 안에서 분명히 했다. 다리언에 관한 일이니, 그의 뜻에 따르리라. 하지만 만약 그들이 자신을 노린다면, 그때는 가차 없이 제거할 것이다.
사실 헬무트는 당장 다리언에 대해서 알아볼 계획은 아니었다. 방학 때는, 마기의 영향에서 멀어져야 하니 마물은 못 잡겠지만 돈을 벌 생각을 했다. 의뢰든 뭐든 하면서. 그레타 아카데미에서도 다수의 학생이 속해 있는 제국 같은 큰 나라도 둘러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에단의 제의가 그의 생각을 바꿨다.
‘다리언 님이 사시던 곳에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
정말로, 생각지 못한 제의였다. 헬무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마침 그곳에서 무투회가 열린다고 들었다. 학장님이 네게 외형 변화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10단계 돌파 선물로 준다고 하더군. 학장님은 대단한 마법사이시지. 그분의 아티팩트라면 효과를 의심할 필요가 없다. 정체를 숨기고 참가할 수 있을 게다.’
구미가 당겼다. 헬무트는 긍정적으로 화답했다.
‘좋은 생각이군요.’
‘네 실력도 시험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기회일 테지. 하지만…….’
‘제 검술을 들켜서는 안 된다. 그런 뜻이죠?’
다리언의 검술을 다리언이 살던 곳에서 펼친다면, 누군가가 알아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그래, 하지만 공용 검술로도 충분할 거다. 이 그레타 아카데미에는 사실상 네 경쟁자가 될 만한 녀석이 없으니. 몸이 근질근질하지 않더냐?’
있었다. 한 명. 아레아. 하지만 그 한 명은, 헬무트가 싸울 수 없는 상대였다.
마법사이기에, 전투능력은 헬무트보다 떨어질 테지만 아레아는 전투시험을 10단계까지 돌파했다. 탈론보다도 어려운 상대일지도 모른다. 좋은 대련 상대가 될 터.
하지만 농담이라도 그에게 대련하자는 소리는 꺼낼 수 없었다.
‘아레아는 곤란해.’
강하더라도 싸우기 싫은 상대가 있다는 건 그에게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아레아는 특별하다. 왠지는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 사실이 받아들여졌다.
헬무트는 결심했다.
‘무투회에 참가할게요.’
***
에단은 누가 다리언을 배신했는지 알지 못했다. 누가 다리언과 적대 관계였는지도 몰랐다. 어디 살고, 어떤 신분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 그가 아는 건 표면적으로 알려진 사실뿐.
물론 무투회가 열린다는 건 좋은 정보였다. 헬무트는 자신이 알고 싶은 것들을, 최대한 목적을 드러내지 않고 알아낼 방법을 찾아냈다.
그가 기숙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탈론이 준 수정 구슬을 사용한 것이다.
탈론이 준 수정 구슬은 비스로 발동한다기보다는, 비스에 반응하여 가동하는 물건이었다. 곧 은은하게 불이 들어온 수정 구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헬무트로군. 벌써부터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블랙 호크의 잔챙이나 떨거지가 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탈론이 직접 연락을 받았다. 귀족 못지않게 점잖은 말투였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느긋하게 물었다.
“그래, 알고 싶은 정보가 무엇이지?”
“바소르 왕국, 왕도에서 곧 무투회가 열린다. 무투회의 주최자 및 그 나라의 권력자들, 바소르에서 벌어진 주요 사건에 대해서 알고 싶다. 왕, 왕족, 주요 귀족들. 정보가 많을수록 좋아. 가급적 상세하게.”
헬무트는 목적지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료하게 밝혔다. 알고자 하는 것을 묻고, 들을 것은 듣는다. 어설픈 짓으로 눈을 가리려고 했다간, 숨기는 게 있다는 사실만 탄로 날 뿐이다. 진실의 공은 수많은 공이 든 주머니 속에 섞여서.
“장점, 약점, 세간의 평가, 시행한 정책, 성향, 가족 관계. 이런 것까지 말인가?”
“그래.”
헬무트가 어떤 정보를 요구하면, 블랙 호크에서는 어째서 헬무트가 그 정보를 요구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특정 정보를 통해 자신에 대한 사실을 역추적 당하지 않으려면, 포괄적으로 정보를 받으면 된다. 그게 헬무트가 생각해 낸 계책이었다. 어쨌든 이 녀석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바소르 왕국의 무투회에 참가한다고 생각하겠지.’
거기에 대해 묻더라도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참가하더라도 본명으로 참가할 생각은 아니니까.
하지만 탈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치 헬무트가 무엇을 하려는지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바로 바소르 왕국으로 향할 참인가?”
“그래.”
“그렇다면, 어디서 서류를 전해 주는 것이 좋지?”
“바소르 왕국 왕도의 용병 길드에 맡겨 둬. 알아서 찾아가겠다.”
용병 길드는 종종 이런 식으로 물건을 맡아 주기도 했다.
헬무트로서도 블랙 호크와 직접 접촉하여 변장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이왕 학장에게 좋은 아티팩트를 얻었으니 최대한 정체를 숨기고 행동해 볼 참이다.
다행히 무투회는 정체를 숨기고 참가할 수 있었다. 타국의 강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좋아. 서류가 준비되면 다시 연락하지. 암호를 잘 기억해 둬라. 독수리의 발톱은 먹이를 놓치지 않는다.”
헬무트가 직접 그들과 접촉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탈론은 눈치 빠르게 암호를 댔다. 헬무트는 그것을 머릿속에 잘 새겨 두었다.
“기억했어.”
“그러면, 이야기한 대로 해 두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도록.”
대화를 끝내며, 헬무트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블랙 호크건 호크 아이건 똑같이 언제고 박살 내야 할 적으로 생각했던 그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고 순순히 응해 주는 탈론의 깔끔한 일 처리에 호감마저 들었다.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일단 서류를 받아 봐야겠지만.’
에단 쿠드로는 모르지만, 헬무트는 누가 배신자인지 안다. 애초에 검성 다리언 디페르트를 배신하여 파헤의 숲에 던져 넣으려는 음모는 웬만한 이들은 꾸밀 수조차 없었다.
오로지 권력자들만이 가능한 일. 탈론이 주는 서류에는, 틀림없이 그들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헬무트는 그것을 통해, 선차적으로 그들을 판단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들과 접촉할 기회도 오겠지.’
만약, 그가 무투회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면 말이다. 바소르 왕국은 강한 검사를 숭앙하는 나라니까. 두각을 드러내는 것, 헬무트에겐 자신 있는 일이었다.
바소르 왕국은 강력한 검사들을 다수 보유한 군사 강국이다. 바소르 왕국의 기사단은, 제국의 기사단 못지않은 위용을 과시한다고 한다.
바소르 인들은 강한 검사를 좋아했다. 어린아이 때부터 목검을 쥐고 싸우기 일쑤인 바소르 인들에게 검은 곧 삶이었다.
그러니 이 나라에서 검성 다리언 디페르트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바소르 왕국에 대해서 숙지해 두었던 헬무트는 그 점이 가장 의문이었다.
‘그런 이 나라에서, 다리언의 뒤통수를 치다니.’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다리언이 반란을 모의했다고 해도, 공개적인 재판을 치르지 않고는 국왕조차도 그를 바소르 왕국의 상징과도 같은 그를 끌어내릴 수 없었다.
다리언 디페르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그는 실종된 걸로 밝혀져 있다.
헬무트는 블랙 호크가 다리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파헤의 숲까지 보내진 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리언이 배신당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건 서류를 받아 보면,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왕도에서 열리는 무투회는 바소르 왕국의 연례 행사. 방학 기간에 열리기에, 바덴의 아카데미에서도 고학년들이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하여 참가하곤 했다.
혹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었기에 헬무트는 변장을 철저히 했다.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헬무트는 그만큼 그레타 아카데미의 유명 인사였다. 거의 대부분 아레아와 붙어 다닌다는 이유로.
‘그보다 이 아티팩트, 쓸 만하군.’
헬무트는 팔목에 찬 두 번째 팔찌를 쳐다봤다. 대마법사 급은 아니지만, 명성 높은 마법사인 학장이 만든 물건. 지속 시간과 효과, 모두 다 탁월했다.
정체를 숨기느라 고심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마력이 꽤 많이 충전되어 있어서, 최대 석 달까지도 효과가 유지된다고 했다.
아티팩트를 사용한 직후 거울을 쳐다본 헬무트는 자신의 달라진 모습에 만족했다. 금발, 푸른 눈, 온화하게 바뀐 인상. 낯설 만큼 변했다.
지난번에 블랙 호크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변장할 때 쓴 안경도 잊지 않고 착용했다. 현재 그의 모습은 그레타 아카데미의 헬무트와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아예 딴 사람이다.
헬무트는 자신이 살짝 시안처럼 변했다고 생각했다.
‘검사답지는 않군.’
강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강함은 외견이 아닌 실력으로 입증하는 것.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헬무트는 곧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