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45
144
헬무트
144화
전 국토의 3분의 1이 사막으로 이루어진 바소르 왕국. 열풍이 일기 시작하는 6월의 초입에 헬무트는 왕도에 도착했다. 약 보름에 걸친,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덥군.’
헬무트는 더위를 탔다.
파헤의 숲은 연중 서늘한 기후를 유지했다. 때로는 몸이 시릴 만큼 추워서, 엘라가의 털에 몸을 파묻고 견뎌 내야만 했다. 그 때문에 헬무트는 추위를 거의 타지 않았다.
하지만 살이 바싹 마르는 듯한 강렬한 햇빛과 이 숨 막히는 더위. 정말 적응하기 힘들다.
‘내가 일사병에 걸릴 만큼 약한 체질이 아닌 게 다행인가.’
어둠의 싹 덕에 헬무트는 마물과 인간 그 중간쯤의 특성을 띠고 있었다. 인간보다 강인하며, 마물보다는 연약하다. 자잘한 잔병은 거의 걸리지 않았다. 뭘 먹어도 튼튼했고, 어떻게 굴려도 금방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런 헬무트는 지독한 더위 앞에서는 그의 말 화이트보다도 무력했다.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냉방 마법이 걸린 시원한 여관에서, 푹 쉬는 것, 그게 헬무트의 계획이었다.
오는 도중에 하마터면 짜증으로 인간들을 도륙할 뻔했다. 그랬다간 무투회에 오기도 전에 수배부터 내려졌을 것이다. 이 왕국 사람들은, 인내심을 시험하는데 재주가 있었다.
바소르 왕국에 들어서면서부터 헬무트는 잦은 시비에 시달렸다.
“귀족 도련님이신가 본데, 그 손으로 검이나 잡겠나?”
“계집처럼 분장해도 속아 넘어갈 상이구만.”
“아랫도리 함부로 못 놀리게 얼굴에 칼자국 좀 내줄까?”
바소르 왕국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기질이 호방했다. 사내들의 대다수가 근육질에 우락부락한 몸을 가졌다. 수시로 사막에 출몰하는 마물들과 싸우며 살아가는 거친 기질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하얗고 종일 책이나 들여 볼 듯한 사내들을 우습게 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
헬무트는 안 그래도 귀족 자제처럼 생겼는데, 변장까지 해서 더 곱상해졌다. 헬무트처럼 생긴 녀석은 그들이 가장 아니꼽게 생각하는 유형이었다.
게다가 헬무트가 이용하는 숙소는 대개 전사나 용병이 머물렀다.
그들은 혼자뿐인 헬무트에게 서슴없이 시비를 걸었다. 오로지 약해 보이는데, 잘 생겼다는 그 이유만으로!
무시하고 있으면 시비 거는 이들 못잖게 덩치 큰 여관 주인이나 종업원이 말린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간혹, 참을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날이 유독 더운 날, 이동하느라 종일 말을 달리고 새로운 여관에 들어섰을 때.
헬무트의 눈빛이 번뜩였다.
“할 테면 얼마든지 해 봐.”
“어라, 이거 봐라? 꼴에 검은 쓸 줄은 안다는 거냐?”
“저 검집 꼬라지 좀 봐라. 장식용이잖아. 어린 자식이 겉멋만 들어선!”
헬무트는 말없이 검을 뽑았다.
샥!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상대는 눈을 끔뻑였다. 귓불에서 통증이 일었다. 일자로 잘린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부스스 흩날렸다.
“어어?”
“다음은 목이야.”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물러났다. 그제야 분위기가 바뀌었다. 우호적으로.
“검을 쓸 줄 아는 놈이로군!”
“계집애처럼 생긴 것치곤 자네 제법, 실력이 쓸 만하구만.”
“외국인인 듯한 데 왕도로 향하는 길인가?”
“무투회에 참석하러 가는 건가?”
헬무트는 단칼에 잘랐다.
“귀찮게 굴지 마. 죽고 싶지 않으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협박하는 건 그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헬무트의 눈동자에 살기가 서렸다. 더위는 때로 사람도 죽인다.
“까칠한 녀석이로구만.”
상대는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헬무트는 그제야 검집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이라면, 실력을 보이면 쉽게 끝났다는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파헤의 숲 못지않게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했다.
아니, 좀 다른가. 이들은 강자를 존중했다. 강한 검사를 우러러봤다.
바소르 왕국 출신 아카데미 학생은 드물었다. 그건 이 나라에선 검사들이 사막의 마물과 싸우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굳이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경쟁을 통해 긴장감을 얻고, 가르침 속에서 검을 수련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삶 자체가 실전으로 그득하니.
그건 헬무트의 삶과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었다. 엘라가의 보호 아래서 살았던 그는 마물과 싸울 필요가 별로 없었으니까.
무수한 강자가 이 바소르에서 배출되었다. 다리언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가장 독보적이고 전설적인 한 명.
바소르에서 가장 강한 자들만 모였다는 왕실 직속 기사단, 팔마 기사단장.
그가 쌓은 업적 중에 가장 대단한 하나는, 마물로 뒤덮여 있던 바소르의 사막을 인간의 땅으로 되돌려 놓은 일이다. 수많은 희생이 있었고, 십여 년에 걸리는 세월이 소모되었다.
위대한 검사 다리언 디페르트는 마침내 사막을 지배하는 거대한 전갈 마물, 스콜피온을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로 우두머리를 잃은 사막의 마물은 세력이 약해졌다.
한때 왕도까지 침범할 것 같던 마물의 기세는 확연히 죽었고, 죽음의 땅이었던 사막엔 사람이 오가기 시작했다. 바소르 왕국은 급속도로 안정을 찾았다.
다리언은 기사단을 이끌고 주기적으로 사막의 마물을 토벌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구했다.
사막을 여행하던 중, 마을 인근에서 운 나쁘게 마물에게 습격당해 죽을 뻔 한 에단 쿠드로는 다리언에게 구원받았다.
비록 그의 아내는 이미 죽은 후였지만. 그 인연을 토대로 헬무트는 이곳 바소르에 이르렀다.
‘저 동상은.’
대로를 따라 걷던 헬무트는 우뚝 멈춰 섰다. 검을 쳐들고 있는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동상이, 광장 한가운데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쩐지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헬무트는 동상 아래 써 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검성 다리언 디페르트.
묘한 기분이었다. 바소르의 왕도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이 다리언의 동상이라니. 배신자들조차도 저 동상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나 보다.
다리언을 제거하고, 그의 상징성만을 남긴다. 오로지 위대한 검사이자 바소르를 상징하는 존재로서만 길이길이 기억되도록.
참 편의적인 짓거리다. 다리언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지, 헬무트는 새삼 궁금해졌다.
그의 명예가 진창에 처박히는 것보다는 나았을까.
‘다리언의 재라도 가져올 것을.’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 또, 그때는 인간의 장례 방식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다리언의 검과 검술은 지금 헬무트에게 있다. 그것으로, 돌아온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다리언이 파헤의 숲으로 떨어진 지도 스물 몇 해가 지났다. 알아보는 자가 있으랴 마는,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검이야 새로 검집까지 해 놨으니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이 무투회, 우승해야겠군.’
다리언을 위해서라도. 헬무트는 결심을 다졌다. 하지만 무투회는 좀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바소르는 너무 더웠으니까. 어서 시원한 나라로 도피하고 싶어질 만큼.
헬무트는 얼굴 주변에서 손을 부채질했다.
‘왕도에는 마법 물품을 파는 상점이 있겠지. 도저히 못 견디겠는데. 거기서 물건 좀 사볼까.’
이런 더운 기후의 지방에서는 서늘함을 유지해 주는 옷이 있다고 들었다. 그거면 쾌적하게 지낼 수 있을 거다.
무투회 때문인지 온 거리가 복작거렸다. 무투회 참석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이며 친지들, 구경꾼으로 가득했다.
이 뜨거운 나라에서도 유독 뜨거운 여름에 열리는 무투회는 바소르 왕국의 축제였다.
저렴한 여관에 빈방이 없다 보니, 헬무트는 발품을 판 끝에 값비싼 여관에서 방을 구했다.
깨끗한 물이 수도로 공급되는 시원한 방. 고급스러운 가구와 침대. 바닥에는 카펫이 깔렸고 방도 아늑했다.
수련실 비슷하게 공터가 따로 딸려 있지만, 수련을 해도 좋을 정도로 안이 널찍하다. 대귀족이나 머물 만한 방.
헬무트는 인간은 차림새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진다는 걸 실감했다. 그가 후줄근하게 입고 있었다면 이 여관은 그를 들여보내지도 않았을 거다. 다행히 그의 망토가 고급스럽고, 말도 좋은 말이었기에 딱히 푸대접을 받진 않았다. 여관비의 반은 지불해야 했지만.
‘무투회에서 상금을 받지 못하면 곤란하겠어.’
탈론에게 거액을 받아둔 것도 도움이 되었다. 바소르 왕국은 공용 화폐를 썼다. 여관비는 자그마치 일당 2,000마르크다. 아무리 대목에 고급 여관이라도 너무 바가지였다.
하지만 여관에서는 흥정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손님도 많으니까.
헬무트는 순순히 값을 치렀다. 무투회 때문에 한 달 가까이 이곳에 체류해야 할 테니, 이것저것 포함하면 아마 10만 마르크가량 적자를 볼 거다.
어쩔 수 없다. 호사를 누리는 것도 이럴 때 경험해 볼 만한 일이니.
헬무트는 여관을 잡자마자 즉시 위치를 물어 마법사 협회와 연계된 유명 상점으로 이동했다. 대도시에나 존재한다는 커다란 규모의 마법 상점이다.
들어서서 서늘한 온도를 유지해오는 옷을 찾자, 직원이 말을 걸었다.
“지금 입으신 망토에도 마법 기능이 있는 것 같은데요.”
헬무트는 제가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아, 공간 확장 마법.”
“그러면 마법사 협회에서 만든 제품일 테고, 거기다가 기능을 추가해 드리는 게 간편할 텐데요. 그렇게 해 드릴까요? 소모된 마력도 충전시켜 드리겠습니다.”
“기간은 얼마나 걸리죠?”
“3시간이면 됩니다. 볼일을 보고 오시면 바로 추가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3시간 후.”
과연 왕도의 상점답다. 일 처리하는 속도가 남달랐다. 헬무트는 그사이, 무투회 참가 신청을 하고 오기로 했다.
‘마감 기간이 내일까지였지.’
의뢰는 맡지 않았지만, 넉넉히 일정을 잡고 왔다. 도저히 땡볕에 말을 달릴 수 없었기 때문에.
무투회에 접수하고 나면, 예선전은 사흘 후에 치러진다. 예선전 당일 날 상대가 발표되기에, 그전에 특별히 준비할 건 없었다. 시작 시간에 맞춰 가기만 하면 된다.
토너먼트 형식의 바소르 왕국 무투회는 대단히 유명했다. 우승 상금이 자그마치 200만 마르크. 그 때문에 1급 용병급의 실력자도 종종 출전한다고 알려져 있다. 바소르의 기사단원들도 꽤 많은 수가 출전한다. 그들은 예선전이 면제되었다.
‘우승하면 부자가 되겠군.’
갑자기 돈 욕심이 났다. 헬무트는 날 때부터 욕심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뭔가를 손에 넣는 기쁨을 몰랐을 뿐.
무투회장에 도착한 헬무트는 출전 서류를 작성했다. 보증금 1,000마르크와 서류를 받아 든 접수원이 내용을 꼼꼼히 확인했다.
“성함이 하이드 님이 맞으십니까.”
“네.”
대충 지은 가명이었다. 신상 정보도 살짝 비틀었다. 어차피 수배범 정도가 아니면 확인하지 않으니까 좋을 대로 써도 좋다고 이야기를 들어 둔 터였다.
“타국의 기사단 소속이거나 1급 용병 이상은 예선전이 면제될 수 있습니다. 증명할 물건이 있으시면 제출해 주세요.”
접수원이 그 말을 꺼낸 순간, 주변에서 왁자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거 별거 다 물어보네. 그 꼬마 녀석이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어느 잘나신 집안 도련님 같구만!”
바소르의 사람들은 거칠다. 특히 이 나라는 신분 상승이 타국보다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 때문에 타국의 귀족이라고 해서 딱히 우대해 주지 않았다. 그것도 혼자에 어려 보이는 상대라면.
접수원이 살짝 당황한 눈초리로 서류의 나머지 부분을 재빨리 확인했다.
‘16세, 제국 출신, 용병, 검사.’
“접수 끝났습니다. 여기 확인증이 있습니다. 사흘 후, 오전 10시까지 이곳으로 다시 와 주세요.”
표적을 잡았는지 그가 일어나자마자 비아냥이 날아왔다.
“안 와도 된다고. 와 봤자, 첫 경기에 탈락할 테니까. 돈만 날릴 테지.”
헬무트는 그 말을 한 사내를 쳐다봤다. 접수가 끝났으니 이제 지껄이는 걸 놔둘 이유가 없다.
헬무트와 마찬가지로, 무투회에 참가 접수를 하러 온 자들이 근처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헬무트를 비웃었다.
“시발, 눈깔 파란 것 좀 봐라! 아주 툭 치면 울 것처럼 그렁그렁 하구만.”
“저거 좀 봐라. 남자 새끼가 저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은 뭐야. 계집애들 끼고 노는 인형이 걸어 다니는 줄 알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