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46
145
헬무트
145화
‘하필 이런 모습으로 바뀌어서.’
아티팩트를 신청할 때 좀 더 의견을 피력해 볼 걸 그랬다고, 헬무트는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그게 어쨌든, 학장의 잘못은 아니었다.
덥고, 다리언을 배신한 자가 있고, 사막에서 마물도 출몰하는 단점 많은 이 나라에도 하나쯤 장점이 있었다.
시비를 건 사람을 패도 무방하다는 것. 죽이는 것까진 안 되겠지만, 사지를 부러트리더라도 싸워 이기기만 하면 된다. 놀랍도록 승자에 관대한 나라였다.
헬무트는 검집째 검을 들고 손을 까딱였다.
“시비 걸고 싶으면 덤벼. 입만 나불대지 말고.”
아직 그의 망토는 개조 중이다. 그 때문에 헬무트는 더워서 짜증이 난 상태였다.
“어어, 이 녀석 봐라?”
“내 참, 같잖아서. 어린 새끼가 꼴에 자존심은 있어선.”
험상궂은 사내들이 그에게 성큼 다가섰다.
“거기, 무투회장 인근에서 개인적인 싸움은 금지합니다!”
접수원이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계집애처럼 생겨서 제법 패기가 있잖아? 난 자칼이다.”
시비를 건 사내 중 한 명이 어깨를 으쓱하고 지나갔다.
“어디 한번 예선전 때 보자고. 그때는 말려 줄 사람도 없을 테니까.”
헬무트는 그자를 포함하여 그 근처에 있는 자들의 안면을 깊이 새겨 뒀다. 예선전 때는, 제발 그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어야 할 거다. 사지 멀쩡하게 무대 밖으로 걸어 나가게 두지 않을 테니까.
헬무트의 눈동자에 싸늘한 빛이 스쳤다.
***
“3,000마르크입니다. 좋은 망토로군요. 상태가 좋아서, 살짝 기능을 추가하느라 품이 얼마 들지 않았기에 조금만 받는 겁니다.”
조금만 받는 게 3,000마르크라니. 하긴 그래 봐야 그가 잡은 여관 하루 숙박비만 할까. 아무리 좋은 방에 묵는대도 그만한 돈을 쓰는 건 아까웠다.
값을 치른 헬무트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망토에서 시원한 기운이 도니 확실히 쾌적했다. 더위에서 탈출하니 헬무트의 기분도 상승세를 탔다.
‘살 것 같군.’
여관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기 오셨군요.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남자를 마주보고 있던 종업원이 헬무트를 보고 아는 체 했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일이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 이런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다. 종업원과 말을 나누고 있던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자네가 5층 에메랄드 룸을 빌린 손님인가?”
“네.”
기사였다. 아마도. 피부색을 보니, 바소르 왕국 사람은 아니다. 말하는 투가 덤덤한 듯하면서도 은연중에 고압적인 기운이 묻어 나왔다.
“내가 모시는 분이 머물 곳이 없어 그러는데, 방을 내줬으면 하네만. 값은 넉넉히 치르지.”
“따로 묵을 데가 없어서 곤란하군요.”
또 방을 구하러 다니긴 귀찮았다. 잘못하면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더위에!
헬무트는 이미 200만 마르크가 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웬만한 돈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자넨 혼자잖나. 그 방에는 수행인들이 쓸 작은 방이 딸려 있지. 양보해 주었으면 하네.”
아마 종업원이 입을 좀 놀린 모양이다. 합의를 보랄 수는 있어도, 혼자 묵는다는 사실까지 알리다니.
이렇게 비싸면서도 호황인 여관이라면 그런 짓거리를 벌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 원래 그런 곳일수록 입을 다문다.
‘나를 만만히 본 거로군.’
제대로 교육되지 않은 종업원이다. 따끔한 대가를 치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안 되겠군요. 다른 여관에서 방을 구해 보시죠.”
사실 다른 데서 방을 구해 오고 돈을 좀 주면 양보할 용의도 있었건만, 지금 깨끗이 사라졌다.
휙 스쳐지나 방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기사의 손이 헬무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네! 대가를 주겠다지 않는가!”
그 순간, 헬무트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이 나라는 뭔가 나쁜 기운이 껴 있는 게 틀림없다. 자신과 상성이 안 맞던지. 지긋지긋하도록 사람을 건드린다. 섬뜩할 만치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손 떼지 않으면 벤다.”
경고는 한 번. 검 손잡이에 손이 닿았다. 3초, 그 정도 주면 충분할까. 무투회에 차질이 있지 않겠지. 있더라도…….
“그만 해요, 로버트. 나를 위한다는 이유로 다른 손님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아요.”
중성적인 미성의 목소리였다. 기이하게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헬무트는 그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미안해요, 내 기사가 마치 바소르 인처럼 굴었군요.”
고급스러운 여행복을 입은 한 소년이 그에게로 다가오며 넌지시 말했다.
열서너 살, 그 정도일까. 창백한 얼굴에 금발, 푸른 눈. 선이 가는 얼굴엔 미소가 배어 있었다. 대단히 귀족적이고 기품 있는 소년이다.
인형이라는 말은, 헬무트에게 붙일 단어가 아니었다. 바로 눈앞의 이 소년이야말로 인형 같았으니까. 이 바소르에서는 헬무트 못지않게 시비가 걸릴 상이다.
로버트라 불린 기사가 침음성을 토해 냈다.
“미하엘 님.”
남자 같지 않게 곱고 화사한 얼굴을 헬무트는 찬찬히 뜯어봤다.
‘남장한 여자?’
그 생각은 헬무트에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마법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데다가, 튀어나온 목젖을 봐선 아닌 듯하다.
아스카도 곱상하다고 표현하기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녀석이었지만, 여자는 아니었다.
‘이런 녀석들만 내 주변에 모이나.’
헬무트는 의심했다.
“내 기사의 무례를 사과하죠. 내가 몸이 병약한지라, 이런 곳이 아니면 묵을 만한 방을 찾기가 어렵거든요.”
“그래.”
헬무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냥 무시하고 가려고 했는데, 왠지 무시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나이에 비해 차분하고 속을 읽을 수 없는 눈. 일단 생긴 게 굉장히 눈에 띄었다.
“방을 구하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어요. 우리도 구하다 못해 연이 있는 이곳을 찾았으니까요. 하지만 내게 좋은 생각이 하나 있어요.”
눈을 휘며 웃는 얼굴은, 연상의 여자들이 껌뻑 넘어가 없는 방을 만들어서라도 내줄 상이었다. 물론, 헬무트에겐 먹히지 않았다. 그는 건성으로 물었다.
“뭔데.”
“이러면 어떨까요? 나는 내 사람들과 같이 묵을 방이 필요하고, 당신은 그저 묵을 곳이 필요하죠. 그러니 그쪽과 내가 함께 방을 쓰는 거예요. 대신, 숙박비는 제가 지불하는 걸로요.”
로버트가 바로 언성을 높였다.
“미하엘 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찌 저런 처음 보는 자와 함께 방을 쓴다고 하십니까!”
“로버트, 다른 방법이 있나요?”
미하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로버트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부하에 대한 장악력이 있다. 천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른 녀석인 듯하다. 싱긋 웃은 녀석이 헬무트를 설득했다.
“혹시 내가 두려운 건 아니겠죠? 나는 잠버릇이 심하지 않아요. 방은 넓으니, 침대를 하나 더 들여 놓을 수 있을 테고요.”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하는 건 헬무트에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기숙사에서 그래 봤으니까.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헬무트는 검토해 봤다.
‘새로운 유형이야.’
속을 잘 감추고,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유형. 아레아도 우아하고 귀족적인 느낌을 주었으나 정작 그는 솔직하다면 솔직하지, 이런 성격은 아니었다. 흥미로웠다.
‘몸에 별 기운이 없군. 비스를 쓸 줄 아는 녀석이 아니다.’
확실히 위협은 안 된다. 한 손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만만했다.
‘뭐하는 녀석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새롭긴 하니까.’
헬무트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제 새로운 경험이라는 틀에 끼워 넣기는 딱인 상대였다. 낯선 사람, 그것도 정체 모를 도련님과 한방이라니.
‘나쁘지는 않아.’
단지 손해될 거래가 아니더라도 순순히 응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헬무트는 거래를 걸었다.
“내가 이 여관에서의 당신 식비까지 책임질게요.”
“그건 당연한 거고. 돈 말고 뭐 특별한 건 없나?”
헬무트는 이 여유 만만한 녀석이 뭘 꺼내 놓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음, 특별한 거요? 물질 말고 감정적이거나 정신적인 것 말인가요.”
“뭐든.”
골몰하던 미하엘이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그쪽도 바소르 인이 아니고, 이곳에는 무투회에 참가하러 왔어요, 맞죠?”
“맞아.”
“그럼 이렇게 하죠. 나는 이곳 바소르의 왕도에 무투회를 구경하러 왔어요. 내가 그쪽을 응원할게요. 응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쪽도 힘이 날 거예요.”
‘응원이라고?’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면서 헬무트는 잠깐 말문을 잃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엉뚱한 소리가 끌리기도 했다. 기묘하게도 그랬다. 헬무트한테 그런 걸 제시한 건 이 녀석이 처음이었다.
‘어차피 딱히 받아 낼 것도 없나.’
돈을 달라면 줄 것 같지만, 이 여관을 공짜로 묵게 된데다가 식비까지 해결되었다. 헬무트는 적당히 넘기기로 했다.
“좋아.”
곧 종업원이 선불로 지급한 돈을 헬무트에게 되돌려 줬다. 헬무트가 혼자서 에메랄드 룸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미하엘 일행에게 알린, 바로 그 종업원이었다.
헬무트는 그의 따귀를 후려쳤다. 짝! 고개가 돌아갔지만, 코피를 쏟을 만큼 세게 치진 않았다. 갑자기 얻어맞은 종업원이 경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왜, 왜 이러십니까!”
“앞으로는 혀를 조심해서 놀려야 할 거야.”
종업원은 헬무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는지 움찔하며 물러섰다.
‘이 나라에선 강하게 나와야지, 안 되겠군.’
헬무트가 혼자인 데다가 까다롭게 굴지 않으니 만만하게 본 모양이었다. 만방에서 그를 만만히 봤다.
방에 들어서자 곧 여관의 종업원들이 눈치를 보며 침대를 들여왔다. 두 개의 침대가 거리를 두고 따로 놓였다.
에메랄드 룸에 딸려 있는, 헬무트가 관심 두지 않은 이름도 모를 작은 방들은 미하엘의 수행인들이 차지했다. 기사에 하인까지 한둘이 아닌 걸 보니 꽤 높은 귀족 집안의 자제인가 보다.
제 아랫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미하엘이 걸어와 물었다.
“같이 방을 쓸 사인데 계속 그쪽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이름이 뭐죠?”
“헤…… 하이드.”
가명을 써 본 적 없으니 헷갈렸다. 헬무트는 나름 정직한 성격이었다. 상대가 앞에 말까지 들었는지 꼬집듯이 물었다.
“헤이드?”
“아니, 하이드.”
“귀족인가요?”
“좋을 대로 생각해.”
은근히 찔렸다. 아카데미에 다닌 이후로, 저보다 어린 녀석을 보면 당연히 반말부터 했던 헬무트다.
하지만 평민이 귀족에게 그래선 안 되는 거다. 비록 헬무트가 실제는 귀족 출신이라도, 그걸 입증할 뭔가가 없는 한은.
“난 미하엘이에요. 제국 출신이지요. 귀족이고요. 음, 성은 비밀로 할 게요.”
“안 물어봤어.”
“하하! 하이드는 정말 솔직하네요. 하지만 솔직한 게 꼭 좋은 건 아니에요. 때로는 솔직함을 드러낼 상대를 가려야 하죠. 내가 만약 왕족이나 그에 준하는 신분이라면 하이드가 무척 곤란해질 수도 있어요.”
은근한 뉘앙스였다. 부드러우나 굽힘은 없다.
‘지금 내 태도가 거슬린다고 하는 건가.’
헬무트는 차갑게 대꾸했다.
“네 충고 따윈 필요 없어.”
“충고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어요. 사람이 모든 걸 다 혼자 알아서 잘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게 있다고 하죠.”
‘조잘거리는 게 때려 주고 싶은 녀석이로군.’
헬무트는 생각했다. 하지만 때려 주고 싶다고 함부로 때릴 수 없는 녀석이었다.
너무 약해 보였다. 남자인데, 어린애다. 한 대 치면 그대로 가 버릴 것 같다.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질러 버릴지 모르는 상대였다.
헬무트는 왜 아스카가 아레아를 재수 없다고 말했는지 이해했다. 정확히는, 그 재수 없다는 느낌을.
헬무트는 확인해 보기로 했다.
“너, 아카데미 학생? 학술부인가?”
“아니오, 저는 몸이 약해서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했어요. 제게 그렇게 묻는다는 건, 하이드는 아카데미 학생이란 뜻이겠군요? 보통 사람은 자신에 비추어 남을 보기 마련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