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50
149
헬무트
149화
“실력은 좀 있는 모양이다만, 내가 너 같은 비리비리한 애송이에게 질 것 같으냐!”
“하이드, 승리!”
“운이 좋아서 쉬운 상대를 만났다고 이 몸을 얕보지 마라!”
“하이드, 승리!”
닷새 후, 본선 진출은 간단히 결정되었다. 그래도 단계가 오르긴 한 건지, 가장 마지막 한 명은 3격까지 받아 내고 무릎을 꿇었다.
“제법이군.”
툭 던진 헬무트는 부들거리는 상대를 내버려 두고 말끔히 돌아섰다. 다들 주절주절 말이 많다. 검은 그보다 간단한데.
“하이드, 본선 진출을 축하해요.”
어느새 다가온 미하엘이 그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첫날 본 로버트를 비롯하여 미하엘의 수행기사들은 이쪽에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다만 경계하듯 검에 손을 둘뿐.
잘 훈련받은 자들이다. 아카데미 교관들과 엇비슷한 수준. 웬만한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고서야 이만한 기사들을 거느리고 다니지 못할 터.
‘깊이 파고들 것 없지.’
미하엘은 그저 우연히 만나게 된 귀족 소년일 뿐이다. 무엇과 엮이기엔 헬무트가 짊어진 과거의 무게가 작지 않다.
“오늘은 특별한 예정이 없으면 저와 함께, 좋은 데 갈까요? 본선 진출을 축하하러.”
헬무트는 짤막하게 끊었다.
“본선을 앞뒀으니 수련에 신경 쓰고 싶다.”
어찌어찌 숙소는 같이 쓰고 있지만 미하엘을 가까이해서 좋을 건 없다. 만약 이쪽이 하려는 일 때문에 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대단한 귀족이라도 이곳은 바소르. 엄연한 타국이다. 봉변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미하엘은 미묘하게 끈덕진 태도로 말했다.
“하이드라면 상위 단계까지 어려울 것 없이 진출할 것 같은데요.”
헬무트는 눈치 챘다. 혹시 이건, 자신이 미리 점찍어 둔 상대라는 표시일까.
이렇게 만인의 시선 속에서 노골적으로 친한 척을 하는 것. 강자에게 접근하려는 바소르의 세력가들도 이미 주인이 정해진 자라 생각하여 머뭇거리게 될 거다.
‘그건 곤란하지.’
“그런 건 장담 못 해. 본선에는 이미 실력자들이 포진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함께, 상석에서 다른 이들의 경기를 관람하겠어요? 본선 진출자가 정해지는 경기니까, 나중에 상대로 만난다면 도움이 될 거예요.”
본선 진출자라고 해 봐야 어차피 실력이 빤하다. 굳이 관람할 필요는 없었지만, 남의 경기를 관람한다는 것에 흥미가 일었다.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상대가 혹할 만한 제의를 할 수 있는 것도 재주다.
상석에 올라섰을 때, 경기장에는 이미 한 명의 참가자가 올라서 있었다. 헬무트보다 머리 세 개는 클 듯한 대단한 거한. 호명이 이어졌다.
“그에 맞서는 상대는, 루크 예거!”
저편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서 경기장 쪽으로 다가왔다. 막 헬무트가 자리에 앉으려던 참이었다.
헬무트는 무심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걸음걸이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뭔가가 느껴졌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무대에 올라선 그의 얼굴을 본 순간, 헬무트는 얼어붙은 듯이 굳었다.
“하이드? 아는 사람인가요?”
“아아, 아니야.”
헬무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꿰뚫을 듯이 무대에 올라선 청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엄청난 덩치는 아니지만, 잘 빠진 근육과 날렵한 몸을 가졌다. 은회색의 차가운 빛을 띤 머리카락은 이곳 바소르의 태양과 유독 대조되었다. 눈은 짙은 녹색. 진지한 검사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 유쾌한 기가 느껴지는 준수한 얼굴은 빙긋 미소 짓고 있었다. 언뜻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다.
18세. 소년을 벗어나 청년이 되어가는 나이. 많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지만, 그의 얼굴은 앳되다기보다는 성숙한 느낌을 풍겼다. 그것은 그가 출신지를 떠나 낯선 나라에서 이미 자신의 자리를 일구고 있기 때문이리라.
‘다리언의 후손.’
아릿한 감각이 일었다. 어째서 팔마 기사단원인 그가 이곳에 있는지, 정말 그가 맞는지 확인할 것도 없었다.
찍어낸 듯이 빼다 박은 것은 아니나, 추억을 돌이키게 하는 이목구비였다.
그는 다리언을 닮았다. 그 완고하고 강인한, 헬무트에게 검을, 아니, 검을 포함한 많은 것을 가르쳐준 스승을.
그리고 헬무트가 본 인간 중에 가장 강했던 인간. 파헤의 숲에서 마물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한 인간. 언젠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야 말겠다며 이를 악물게 했던 인간!
‘저자는 어떤 검을 펼칠까.’
댕. 길게 종이 울려 퍼졌다.
종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결은 종료되었다.
“어라? 빨리 끝났네요.”
미하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헬무트는 뒤늦게 곁에 있던 미하엘의 존재를 인지했다. 일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을 만큼, 몰두하고 있었던 탓이다.
아주 짧은 시간 일어난 대련. 헬무트는 전율을 느꼈다. 단순히 강한 상대의 검술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헬무트는 그에게서 다리언의 모습을 엿봤다.
‘검술을 확인하기엔, 몇 번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그 몇 번만으로도 직감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저자는 다리언의 검술을 알았다.
‘그 아들이 허투루 배우진 않은 모양이로군.’
하긴, 다리언이다. 많고 많은 제자 중 한 명이 아니라 제 유일한 아들을 녹록히 대했을 리 없다. 헬무트에게 한 것 못지않게 가혹하게 다루었으리라.
‘못 견뎌 도망칠 만큼.’
하지만 그토록 힘겹고 아픈 기억은 몸에 고스란히 남기 마련이다. 다리언의 이름 모를 아들은 제 재능 있는 손자에게 훌륭히 다리언의 검술을 전수해 냈다. 그렇게 추측이 되었다.
‘나만한 재능을 가진 자는 처음 봤다.’
헬무트는 그 사실에 새삼 놀랐다. 오만이 아니다. 헬무트는 천재였다.
하지만 다리언의 후손은 헬무트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상대를 만나, 비슷한 시간을 소모하여 경기를 끝냈다. 18세인 그가 헬무트보다 나이가 많다지만, 재능 면으로는 절대로 뒤처지지 않는다.
헬무트는 어둠의 싹을 가졌다. 만약 동등한 출발선을 가졌다면, 헬무트는 그보다 우위에 설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으리라.
“하이드가 보기엔 어땠어요? 저 사람도 실력이 좋은 것 같은데요.”
“제대로 봤어. 우승 후보야.”
“우승 후보라는 건, 그가 하이드보다 강하다는 소린가요?”
예민한 질문을 태연스럽게도 던진다. 헬무트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나도 우승 후보지.”
이쪽이 질 거란 생각이 들진 않는다. 다리언이나 파헤의 숲 권역의 지배자들을 제외하고는, 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상대는 만나보지 못했다. 미하엘이 흥미로운 듯이 물었다.
“그건, 싸워 봐야 한다는 소린가요?”
헬무트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한 마디 말만 던지고 성큼 그곳을 벗어났다.
“가볼 데가 있어.”
***
청년, 루크 예거는 대기 장소로 돌아오며 씩 웃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본선 진출이 확정되어서일까. 하지만 그건,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조금 전의 대련 결과처럼.
‘좋은 일이 생기려는 건지도 모르지.’
“팔마 기사단원이 예선에 참가하는 건 사기 아닙니까?”
방금 그를 상대로 탈락한 예선참가자, 모건이 투덜거렸다. 상대가 귀족이라 용병인 그로서는 공대를 써야 한다. 루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본선 진출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몸이 근질근질하잖아. 이렇게라도 풀어 둬야지.”
사실 본선 출전권이 있는 자들은 이 무투회에 굳이 예선부터 참가하려는 생각을 안 했다. 의외의 강자를 만나서 예선 탈락이라도 하면 망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크는 그런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그는 강자였다. 패배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강자.
“분발하라고. 잘하면 패자 부활전에서 올라올 수도 있지 않겠어? 실력대로 다 제 자리를 찾기 마련이지.”
“본선에 진출할 실력이 있으면, 진출할 거란 소리로군요. 뭐, 맞는 말입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모건이 말을 이었다.
“그쪽도, 나이도 어리신 분이 대단하긴 합니다만 당신 못잖은 녀석도 있지요. 심지어 그 녀석은 당신보다 더 어려요.”
“아아, 들어 봤어. 그, 하이드란 녀석인가? 본 적 있어?”
루크가 눈을 빛냈다. 이미 왕도에 파다한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하이드. 금발에 푸른 눈, 귀공녀들이 수집하는 인형처럼 아주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라고 들었다. 검보다는 책이 더 어울릴 만큼.
하지만 고작 16세의 어린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력은 엄청났다. 아무도 그를 상대로 3합 이상 버텨 내지 못할 만큼.
‘그 정도면 팔마 기사단에 들고도 남을 실력 아닌가.’
예선에서 만났다면, 루크 자신도 의외로 곤경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이쪽이 질 것 같지는 않지만.
“본 적은 없었는데…… 마침 지금 봤네요.”
“응?”
“그 녀석이 이리로 오고 있거든요.”
루크는 뒤를 돌아봤다. 놀랍도록 기척이 작았다. 하지만 단연 눈에 띄는 외모였다. 금발에 푸른 눈이라더니 아주 군중 속에서도 눈에 띌 만큼 반짝반짝하다.
머리색이 짙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이곳 바소르 인들과 대조적인, 하얗고 어린 소년이었다. 바소르에서 수난을 당할 만큼 약해 보이는 외모다.
하지만 루크 예거는 바소르에서 자라지 않았다.
‘걸음이 규칙적이고 자세가 안정되어 있어.’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괜히 저 어린 녀석이 소문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으로 척척 걸어오는 걸음걸이에 망설임이 엿보이지 않았다. 루크는 그가 자신을 찾아왔음을 눈치 챘다.
‘조금 전 내 경기를 봤나?’
봤다면 그의 실력을 인상 깊게 보고 찾아올 만했다. 루크는 머쓱하면서도 의기양양해졌다.
“이만 가 봅니다, 수고하시길.”
패자 부활전을 준비해야 하는 모건이 인사를 남기고 천막을 빠져나갔다. 루크는 다가온 소년을 향해 말을 걸었다.
“네가 하이드라는 녀석이구나.”
뭐하는 녀석이길래 찾아왔을까 호기심이 인 것도 잠시,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루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이 검성의 증손자?”
루크가 손을 확 뻗었다. 입을 틀어막으려는 시도는 재빠른 손에 가로막혔다.
낯선 소년은 지금 싸우려는 거냐고 묻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루크는 주변을 급히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몇 안 되는 대기자들은 시작된 경기를 보느라 천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주시하고 있었다.
루크가 안도의 한숨을 쉬기 무섭게 소년에게서 또다시 질문이 흘러나왔다.
“디페르트란 성은 왜 쓰지 않죠?”
“너, 좀 조용히 좀 말해! 어떻게…… 이미 소문났나?”
“아닐 걸요. 다 아는 수가 있어요.”
“야, 그거 비밀이란 말이다. 기사단장님이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말랬어.”
“……그런가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던 소년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소문난 건 아니니 걱정할 것 없어요. 제가 정보력이 유독 좋은 편이니까.”
탈론이 장담했듯 헬무트는 국가 기밀급의 정보도 알려면 알 수 있다. 루크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그래서 하이드 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설마 그걸 물으려고?”
“아직 대답, 안 했는데.”
자신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다면 대답이란 하란 식이었다. 어린 녀석이 은근히 고압적인 태도다. 루크가 주변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내 조부님은 검성과 연을 끊고 집을 나온 몸이야. 이제 와 디페르트란 성을 주장해 봤자 웃기는 일이지. 디페르트 방계 쪽에선 알지만, 내가 혹시 가문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까 봐 경계하는 눈치던데.”
“하지만 당신은 바소르에서 기사가 되었잖아요? 그럼 디페르트라는 성을 쓰는 쪽이 나을 텐데요.”
검성의 후계자는 사실 이쪽이지만, 그가 대외적으로 다리언의 명성을 팔아도 문제는 없다. 유용하기도 할 테고. 헬무트의 생각은 그랬다. 루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서 사는 건 뭐, 팔마 기사단은 좋은 기사단이니까. 어쨌든 디페르트와는 상관없다 이거지. 우리 조부님도 내가 그 성을 붙이고 다니는 걸 알면 좋아하시지 않을걸. 나는 예거 가문의 루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