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54
153
헬무트
153화
헬무트가 막 자리를 파하려는 순간, 저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크! 루크!”
“안토니! 네가 어떻게 여길.”
“루크 경기 구경하러 왔죠!”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꼬마였다. 쏜살같이 뛰어온 그는 방싯방싯 웃으면서 루크의 다리에 매달렸다.
루크도 얼른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뒤이어 달려온 보모로 보이는 여자가 루크를 붙잡았다.
“도련님! 여기에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죄송해요, 루크 경.”
“괜찮으니 데려가게.”
그는 친근한 태도로 아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중에 보자, 안토니?”
“네, 네!”
뭐가 좋은지 안토니라는 이름의 아이는 연신 손을 흔들면서 보모에게 끌려갔다.
아이 때부터 늘 침착했던 헬무트에게 왠지 정신 사납게 느껴지는 아이였다.
그는 떠나려다 말고 물었다.
“웬 아이죠?”
옷차림을 보아하니, 범상한 신분은 아니다. 출전자들이 있는 이곳에 가까이 접근했을 정도면.
“아아, 기사단장님의 손자야. 안토니 키케로. 기사단장님 아드님이 부탁하셔서 기본기를 조금 가르쳐 줬지. 그 뒤로 나를 잘 따르더라고.”
“기사단장님의 아드님…… 그분은 기사가 아닙니까?”
“응, 검에 재능이 없어서. 대신 폐하께도 인정받을 정도로 뛰어난 관료시지. 비록 기사단장님과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떠벌거리던 루크는 입을 확 닫았다.
“너, 자꾸 캐내지 마라.”
인상을 쓴 그가 무대 쪽으로 홱 시선을 돌렸다. 자기가 말해 놓고서는 어처구니없는 태도다. 막 출전자들이 호명을 받고 올라서려던 참이었다.
헬무트도 인사만 남기고 그 자리를 떴다.
“경기 잘 치르시길.”
***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그 때문에 복잡한 관계를 낳는다.
‘팔마 기사단장은 루크를 제거하려는 듯한데, 그 아들은 제 아이를 루크에게 붙이고. 루크는 그 아이를 귀여워하고. 상황이 엉망이로군.’
탈론이 준 서류에는 팔마 기사단장의 아들이 2왕자를 지지해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20여 년 전 일과 관계가 없는 걸까. 루크가 검성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죽여도 되는 놈, 손대서 안 되는 놈 구분이 어렵군.’
상대는 직접 건드릴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자신의 실력도 만만치 않지만, 그에겐 팔마 기사단이 있었다. 기사단장이니 상시 기사단원들을 이끌고 다닌다.
가족을 건드리자니 루크가 걸렸다. 마치 복수하려는 이쪽이 악당이 된 것 같다. 응당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것뿐인데.
‘루크에게 그냥 다 밝히고 어떤 놈을 살리고 어떤 놈을 죽이면 좋을지 대놓고 물어볼까.’
하지만 만약 루크 예거가 관용적인 선택을 하면? 과거의 일이니 묻어 두자고 하면?
헬무트는 그걸 그대로 수용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문제였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할지 모르기에 그는 헬무트를 방해할 수 있다는 것. 헬무트는 그를 해칠 수 없다는 것. 루크 예거에게 해가 가서는 안 된다는 것.
‘사실 다리언이 복수를 하라고도 하지 않았지만, 자기 후손을 지키라고도 안 했는데.’
하지만 다리언은 루크의 존재를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그때도 아무 말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어쨌든 8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상금은 승리한 날마다 그에게 돌아왔다.
헬무트는 두둑해진 주머니를 가지고 여관으로 향했다. 일단 대기 장소를 나서기 앞서, 주변을 두리번거린 헬무트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사람이 없을 때 조용히 움직였다.
전에 본선 진출자를 둘러싸는 사람들을 보고, 헬무트도 깨닫게 된 게 하나 있었다. 미하엘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세력가들을 이미 자신이 선점한 자라는 식으로 쳐내고 있다는 것.
그래도 가끔 달라붙는 이는 있었지만, 잘 따돌려 냈다.
‘귀찮은데 잘 됐지.’
팔마 기사단장한테 입단 제의를 받았으니 그걸로 됐다. 정보는 미하엘에게서 얻는 쪽이 편했다.
정말로 세력가라면 대기 장소에 있을 때 접근할 수 있으리라. 아니면 이 황금 잎새 여관을 찾아와 만나고자 하던지.
‘바소르의 권력자라면 미하엘도 거절할 수 없을 테니까.’
그의 역할은 딱 잔챙이를 쳐내는 것까지다.
그 미하엘과는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여관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경기가 끝나면 뜨거운 햇빛을 피해서 여관으로 피신하는 건 이쪽이나 그나 마찬가지다. 비 바소르 인의 비애였다.
미하엘이 손을 모으며 말했다. 꼭 기원하는 듯한 동작이다.
“하이드,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요. 벌써 8강이에요.”
“아아, 그래.”
이제 결승전까지 몇 단계 안 남았다. 그 점이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보통 무투회라고 하면 치열한 싸움의 장을 생각하지만, 헬무트에게는 달랐다. 오늘만 조금 힘을 썼을 뿐 그는 여태까지 너무도 순탄하게 무투회를 치러 냈다. 고전할 만한 상대가 없었던 탓이다.
차라리 방에 딸린 공터에서 검을 수련하는 게 더 치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막대한 상금이 걸린 바소르의 무투회가 수준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평범한 현상은 아니다.
‘대진운이 좋은 건지, 내가 강한 건지.’
헬무트는 후자에 기울었다. 자신의 강함을 실감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미하엘이 말을 붙였다.
“이번에 당신이 이긴 상대는 팔마 기사단원이었죠. 상대가 팔마에서도 꽤 서열이 높은 기사라 파장이 만만치 않은가 봐요. 다들 더욱 당신에게 주목하고 있죠. 근 5년간 팔마 기사단원이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적은 없었거든요.”
이제 슬슬 우승 후보로서 부각되기 시작한다는 건가.
“그가 루크 예거보다는 서열이 낮겠지.”
팔마는 철저하게 실력으로 서열을 매긴다고 하니, 그럴 거다. 무심코 내뱉은 말에 미하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크 예거요? 아, 하긴 하이드가 전에 그를 찾아갔었죠. 그때 팔마 기사단장도 만난 거고요.”
무투회장 무대 아래나, 대기 장소 외에서는 루크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니 대화 내용에 대해선 미하엘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팔마 기사단장이 입단 제의를 한 걸 눈치 챈 건, 그냥 그가 대기 장소로 향하는 걸 봐서다.
헬무트는 대강 둘러댔다.
“결승전에서 루크 예거가 내 상대가 될 테지.”
“의식하는 상대라는 건가요? 확실히 그도 팔마 기사단에서 떠오르는 신성이라고 하죠. 그런 이유로 하이드가 그에게 관심을 두는 것 같진 않지만요.”
예리한 말이었다. 미하엘이 나직이 웃었다.
“캐낼 생각은 없어요. 단지 하이드의 목적이 뭘까 생각해 보고 있었어요. 내가 보기엔, 단순히 무투회에서 우승해서 상금을 타 내거나 자신을 알릴 목적인 것 같지는 않거든요.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 실력을 확인하려는 건 더더욱 아닐 테고요.”
“결론은?”
“오늘도 이겼으니 식사를 하자는 거죠. 나는 좀 나갔으면 좋겠지만, 이젠 나가면 귀찮은 사태가 벌어질 거예요. 하이드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을 테니까.”
“그렇군.”
이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건 필수였다. 변장을 풀고 다니는 방법도 괜찮을 테지만, 그랬다간 이쪽 본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킬 위험이 있다. 이 눈앞의 미하엘이라던가.
‘이 녀석한테는 더 드러내면 곤란하겠어.’
아레아야 저도 숨길 게 있으니 자신을 캐내지 않았지만 이 똑똑한 녀석은 달랐다. 분명 끝없이 파고들 것이다. 어디까지 이를지 몰랐다.
헬무트는 제의했다.
“식사나 하지.”
그들은 매번 그랬듯이 황금 잎새 여관의 에메랄드 룸에서 함께 식사했다. 이젠 거의 통과 의례처럼 되어 버린 일이었다.
***
루크 예거 역시도, 당연한 듯이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양쪽으로 갈린 대진표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경기 날, 출발하기 전 대진표를 들여다보는 그에게 미하엘이 말했다.
“8강 상대는, 당신을 제외하고 유일한 비 바소르인 진출자라고 해요. 16강에서 호르텐 키케로보다 급이 낮은 팔마 기사단원을 상대로 1시간 넘게 고전을 치르고 가까스로 승리했다죠. 하이드에게는 어렵지 않은 상대일 거예요.”
“이름이, 허턴이라고 했지.”
“꽤 유명한 1급 용병이라고 들었어요. 나이는 30대 중반이었나. 새파랗게 어린 기사들에게 지기 싫어서라도 그만한 용병은 무투회에 잘 참가 안 하는데, 안타깝게도 하이드를 만났군요.”
제가 승리감을 느끼는 듯한 목소리다.
고전을 치렀다는 소리에 미하엘은 허턴을 낮춰 보는 듯했지만, 헬무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만한 나이에 용병이면 실전 경험을 꽤 쌓았을 거다. 오히려 이전에 만난 팔마 기사단원 호르텐 키케로보다도 까다로운 상대일 수 있었다. 고전을 치르더라도, 상대를 이겨 낼 줄 아는 검사.
‘내가 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이쪽도 실력을 덜 드러내는 편이 좋으니, 처음부터 세게 나가는 것이 좋으리라.
이제 결승까지 두 계단 남았다. 헬무트는 마음을 다잡았다.
***
미하엘은 오늘도 경기장에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조망 좋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하이드의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하이드는 상대를 고평가하는 눈치던데, 어떠려나.’
미하엘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무대를 응시했다.
그가 아무리 허약한 체질이라지만, 며칠이고 바소르에 있다 보니 이 강렬한 햇빛과 더위에도 슬슬 적응이 되었다.
가까이 있는 하이드의 영향인지 잘 챙겨 먹어서 요새 부쩍 기력이 오른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무투회고 뭐고 기사들이 대련하는 걸 보는 것도 싫어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미하엘은 마음을 바꿔 먹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랐기에 괴로웠던 거다. 가질 수 없다면 바라지 않는 편이 나았다.
비록 이렇게 보잘것없이 나약한 몸을 하고 있어, 검조차 휘두를 수 없다고 해도, 미하엘은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의 능력과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것들을 이용하여 강인한 검사들을 그의 발아래에 두었다.
“미하엘 님.”
갑자기 로버트가 그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소곤거렸다. 미하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리로 데려오세요.”
곧이어 로버트와 함께 다듬어지지 않은 검은 수염이 삐죽 솟은, 괴팍한 느낌을 주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정중하게 미하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함께 경기를 관람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하엘 님.”
이 널찍한 공간이 모두 미하엘의 좌석이었다. 호위를 거느려야 하는 이들을 위한 좌석. 당연히 무투회장의 일반석과는 비할 수 없이 비쌌다.
미하엘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천만에요. 당신 덕에 내 기사들이 새로 좋은 검을 맞출 수 있었는걸요.”
등장한 남자는 바로 바소르에서 이름 높은 대장장이 캐빈이었다.
그는 팔마 기사단원들의 검을 만드는 자로, 이번에 미하엘의 주문을 받아 5개의 검을 제작했다.
캐빈은 전설적인 대장장이 레이튼에게서 직접, 대장간 일을 전수 받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바소르에서 국왕이 명예 작위를 내릴 만큼 유명한 대장장이지만, 평민 출신인 자신을 존중하는 미하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누군가에게서 호감을 얻어 내는 건 미하엘의 주특기였다.
“그런데 당신이 이런 곳에 올 줄은 몰랐네요. 요즘 주문이 많아서 바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바쁩니다. 하지만 이번 무투회에 좀 흥미로운 게 있어서 말입니다.”
“흥미로운 거라면?”
“예컨대, 어떤 무투회 참가자 말입니다. 오, 경기가 시작할 것 같군요. 보면서 이야기하지요.”
캐빈은 미하엘의 옆자리에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앉았다.
대우받는 장인이라지만 전혀 차림새에 신경 쓰지 않는지, 지저분한 수염과 머리까지. 다들 슬슬 기피할 행색이었다.
천은 고급이지만 기름때 묻은 그의 복장은 지저분하기 그지없다. 조금 전까지 열기가 끓는 대장간에서 망치를 두드리다가 온 듯한 지독한 땀 냄새가 캐빈으로부터 훅 끼쳤다.
‘검은 그럴듯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교양이라곤 없는 자로군.’
로버트가 낯을 찌푸렸다. 하지만 미하엘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다.
댕―!
종소리와 함께, 곧 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