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57
156
헬무트
156화
‘괜히 도발했나.’
날이 더운 탓에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실은 팔마 기사단의 근무 조건이 탐나긴 했다. 아예 거기에 소속될 가능성이 없지도 않았다.
‘이번에 어떻게든 사태가 종결되지 않으면 팔마 기사단원이 되어서 루크 예거 주변을 맴돌아야 하려나.’
그러려면 아카데미를 포기해야 한다.
바소르처럼 더운 나라에 오래 있기도 싫었지만, 그것도 싫었다. 왠지 모르게 바덴으로의 귀소본능이 강렬했다.
‘루크 예거가 약해서 문제로군.’
헬무트는 간단히 결론지었다.
그가 루투스 키케로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 만큼 강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니 문제다.
무대 위를 내려오려던 헬무트는 문득 잊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아, 맞아, 인사.’
어색하게 손을 흔들자, 그 성의 없는 손짓 한 번에 함성이 쏟아졌다.
하이드! 하이드! 하이드!
‘아레아는 왜 이걸 싫어하지.’
귀찮게 달려들어서 그런가. 헬무트는 새삼 주목받는 짜릿함을 느꼈다. 적의나 얕잡아보는 눈빛이 아닌, 칭송의 눈빛. 강자에게 어울리는 대우였다.
“여어, 내 말은 새겨 뒀나 봐. 타이밍이 좀 늦었지만.”
헬무트에게 억울하게 비난당했던 루크 예거는 오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아예 자기 자리인 양 붙박이로.
그의 경기는 오늘도 헬무트 다음이었다. 자그마치 준결승이나 되기에 시간 간격이 좀 있었다.
헬무트는 웃음기가 섞인 그의 얼굴을 마주 봤다.
“거기가 좋은가 보군요.”
그늘이 지긴 했지만, 대기 장소에 비해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이쯤 되면 특정 자리에 대한 애호라고 봐 줄 만도 했다.
루크는 흘깃 뒤쪽, 대기 장소를 돌아봤다.
“아니, 오늘은 좀 불편한 일이 있어서.”
“당신에게도 불편한 일이 있어요?”
루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넌,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마냥 속 좋은 녀석?”
사실 그랬다. 루크 예거는 강함과는 별개로 어딘지 모르게 만만한 구석이 있었다.
나이도 스물도 안 된 데다가 대단한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거나 까칠한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는다.
‘그러니 호르텐 키케로에게 무시를 당하는 건지도.’
하지만 흔히 말하는 자존심 강한 옹고집의 검사 같지 않은 루크 예거가 마음에 든 것도 사실이다. 다리언과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에서 더더욱.
루크는 헬무트 앞에서 술술 열리는 입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투덜거렸다.
“2왕자 전하께서 대기 장소에 오실 거란 말이다. 격려차 오신다는 건데, 내가 보기엔 그건 핑계고 나를 만나러 오시는 거란 말이지. 돌아 버리겠네.”
그래서 이쪽으로 피해 있었다는 소리다. 여긴 은근히 사각지대였다.
“만나면 되잖아요.”
“우리 기사단장님은 1왕자를 지지하는데 팔마 기사단원인 내가 그분을 만나면……!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루크는 재빨리 입을 감쌌다. 입이 싸다. 역시 진실을 말해 주지 않길 잘했다. 그는 팔마 기사단장을 상대로 속내를 감추기 힘들 테니까.
헬무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그것도 알고 있었냐! 대체 모르는 게 뭔데? 그것부터 말하는 게 빠르겠다.”
“당신이 모르는 것도 알고 있죠.”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루크는 예민해져 있었고 왠지 화를 냈다.
헬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를 들어, 자신이 그의 증조부의 제자고 다리언의 검을 가지고 있고, 그의 기사단장이 다리언을 배신했다는 것.
헬무트는 말을 돌리며 권유했다.
“피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무슨 소리야?”
적의 적은 아군. 기사단장과 1왕자가 다리언의 적이니 2왕자는 아군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루크 예거에게도 그럴 테고.
헬무트는 질문으로 답했다.
“그분은 당신이 검성의 증손자라는 걸 알죠?”
“그래, 알아. 그러니까 계속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시지. 혹시 나를 통해서 팔마 기사단의 지지를 자신 쪽으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다리언의 증손자라면 그만한 영향력이 있지 않을까. 당사자는 원하지 않는 걸로 보이지만.
2왕자가 뭘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검성의 증손자에게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다면, 과연 루투스 키케로와 1왕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어쨌든 루크 예거가 위험해지는 쪽이겠군.’
“권력이 탐나지 않아요?”
“안 탐나.”
“팔마 기사단장 자리에는 관심 없고요?”
“이 녀석, 무슨 소리를!”
루크가 주변을 돌아봤다. 생각보다 심장이 작다.
“아무도 없어요. 단지, 저도 2왕자 전하가 궁금하군요.”
헬무트는 슬쩍 웃었다.
“그런데, 혼자서 만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건 무슨 소리냐. 네가 궁금하니, 같이 만나자는 그런 소리인가?”
“그렇게 알아들어도 좋아요. 당신한테 불리할 거 없을 테니까.”
“불리하고 자시고, 그걸 네가 왜 판단해!”
“알게 되면, 이해하게 될 거예요.”
“난 모르잖아! 이해는 무슨!”
버럭 소리를 지른 루크 예거가 헛기침했다.
“아무튼 2왕자 전하는 혼자 만나 봐라. 나는 안 되겠으니. 입장이 곤란해진다고.”
“내가 2왕자 전하한테 무슨 소리를 할지 궁금하지 않아요?”
넌지시 건넨 질문에 루크의 눈썹이 꿈틀댔다.
“싫으면 여기 있던가. 저 혼자 만나죠.”
헬무트는 그를 휙 스쳐 지나갔다.
“괜히 너 같은 수상한 녀석이 2왕자 전하를 만나 뵙고 이상한 소리를 하면 안 되니까.”
루크는 결국 쭈뼛거리며 뒤를 따라왔다.
대기 장소는 한산했다. 이제 경기가 몇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크 예거의 상대는 헬무트와 루크가 대기 장소로 돌아오자 왠지 불쾌한 듯 인상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 그도 팔마 기사단원이다.
“저 사람하고도 사이가 안 좋아요?”
“……그래. 원래 기사단장님을 제외하고선 바소르 검가 출신들은 날 안 좋아해.”
“친한 사람이 있긴 있죠?”
“너, 나를 뭘로 보는 거냐. 나보다는 네 쪽이 친구 없을 것 같은데!”
그건 사실이었다. 루크 예거는 자신과 친한 동료의 이름을 몇 댔다.
팔마 기사단은 아마 명문 검가 출신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나뉘어 있는 듯했다.
‘아카데미와 비슷하군.’
바소르처럼 거친 나라의 무력 집단, 팔마에서 존중이 도리어 해가 되리란 건 뻔하다.
하지만 루크 예거는 자기보다 약하다고 해서 핍박하거나 무시할 성격이 못되었다.
루크처럼 실력은 좋지만 어리고 각 잡히지 않은 자는 얕보이기 쉽다.
“자, 너도 말해 봐.”
“뭘 말해요.”
“네 친구들 이름.”
사소한 데서 유치하게 구는 건지, 아니면 친구들 이름으로 헬무트의 정체를 유추하려는 건지.
다른 녀석들은 그렇다 치고, 아레아의 이름이 워낙 알려져 있으니 말하면 들킬 수 있었다.
헬무트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2왕자 전하께서 오시는 것 같군요.”
마침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온 것 같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온 것은 한 명뿐이었다.
“밖에서 다들 기다리게.”
나직한 말소리와 함께 들어선 것은 전사다운 풍채의 2왕자였다.
헬무트는 그를 보고 확신했다.
‘팔마 기사단에 들어도 될 수준이군.’
하지만 지위 때문에 무투회에 참가하지는 못 할 거다. 바소르에서 무투회에 참가한 왕자한테 누가 감히 제대로 검을 휘두르겠는가.
루크를 본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오늘은 나를 피하지 않는군, 루크 예거.”
다짜고짜 정곡을 찌른다. 루크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바로 왕자에 대한 예를 갖췄다.
“2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2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헬무트는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예의는 그 나라 사람을 따라하면 된다고 배웠다.
어쨌든 상금은 바소르에서 준다. 상금을 주는 쪽에 예를 갖춰야 했다.
“함께 있는 사람이 있군. 결승 진출자 하이드인가? 자네 때문에, 우리 바소르 기사들의 자존심이 좀 상했다고 하던데.”
“약하면 지는 게 당연하니, 자존심이 상할 건 없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뿐.”
“이 녀석아.”
귓속말하며 루크가 옆구리를 찔렀다. 상대는 왕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정작 2왕자는 강자를 사랑하는 바소르 인답게 미소로 받아넘겼다.
“자네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지. 그동안의 경기, 아주 인상 깊었네. 결승에서도 기대하지. 나로서는 팔마 기사단의 면을 생각해서라도 우승자가 루크 예거이길 바라네만.”
“그는 여자의 응원만 받겠다고 하더군요.”
“뭐? 하하하!”
2왕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루크의 안면이 실룩였다. 안 그래도 어색한 상대였다.
‘이 녀석, 왕자 전하 앞에서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곧 표정을 수습한 2왕자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었다.
“그런데 의외로 둘이 친한가 보군.”
“절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먼저 부인한 주제에 루크 예거가 왠지 이쪽을 노려봤다. 헬무트는 가볍게 무시하며 2왕자에게 물었다.
“검성 다리언 디페르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지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도 2왕자는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존경할 만한 분이지. 어린 시절 그분께 검을 전수받는 게 내 꿈이었다네. 아쉽게도, 거절당했지만.”
“이유는?”
“자신의 검을 전수하기에는 내 재능이 모자라다더군. 왕자라도 예외는 없다고 했지.”
“그 노인, 왕자 전하에게도 참 직설적이네요.”
루크 예거가 중얼거렸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부정적이었다. 다리언 디페르트는 구국의 영웅. 2왕자가 살짝 불쾌한 티를 냈다.
“증조부를 그런 식으로 말하나?”
귀족다운 어투도 아니었다. 루크가 헛기침한 후 말했다.
“아니, 사실 조부님이 자꾸만 그 노인, 그 노인 하셔서 입에 붙어 버렸지 뭡니까. 조부님에게 뭐라시더라. 너는 모자란 녀석이지만, 내 아들이라 검술을 전수받는 것이니 하늘이 내린 영광인 줄 알라고 하던가. 그렇게 자주 말씀하셨다고 하시더군요.”
2왕자가 웃음기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 성격이 좀 대차긴 하시지.”
후한 평가를 내린 그는 돌연 예리하게 헬무트를 쳐다봤다.
“이 소년도 이미 알고 있었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군.”
루크 예거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헬무트는 냉큼 대답했다.
“알고 있었어요.”
“제가 말한 거 아닙니다. 원래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누설했다고 해도 상관없네. 나는 검성의 후손임을 숨기고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자네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뿐이지 그 사실을 밝히길 바라는 바니까.”
‘그게 아닌데.’
졸지에 2왕자에게 입 싼 놈이라는 인상을 준 루크는 죽상을 지었다. 하지만 폭로한 건 2왕자 쪽이었다.
“그래, 무투회가 끝나고 밝히는 정도면 적당하다 싶네만. 자네 생각은 어떤가.”
“결승전에서 이기면 밝힐 겁니다.”
‘내년까지 기다려야겠군.’
헬무트는 느긋하게 생각했다. 내년엔 참가 안 할 생각이다. 200만 마르크는 탐났지만, 바소르는 너무 더웠다.
“그렇군. 그보다 내가 이렇듯 자네를 찾아온 것은, 자네가 들어 둬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서라네. 무투회가 끝난 후에 나를 한 번 찾아오게나. 여긴 자리가 적당하지 않으니.”
2왕자의 시선이 헬무트에게 잠시 머물렀다. 자리를 비킬 생각도 없어 보이는 상대. 게다가 루크 예거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어디까지 말해도 좋을지 가늠한 그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이것은, 자네의 안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네.”
헬무트의 시선이 2왕자에게 꽂혔다. 바로 알아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저를 안 찾아오시는 게, 제 안전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팔마 기사단원입니다. 기사단장님의 뜻을 거역할 수는…….”
루크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팔마 기사단장이 1왕자를 지지하는 이상, 2왕자와 가까운 듯이 보이는 건 곤란했다. 2왕자가 고개를 저었다.
“남몰래 찾아오란 뜻이네. 내가 사람을 보내지.”
그는 신중한 말투로 덧붙였다.
“아주 중요한 문제일세. 자네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