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59
158
헬무트
158화
루크 예거는 공격적이었다. 처음부터 옅은 금빛의 비스를 피워 올린 그는 곧장 헬무트에게로 짓쳐 들었다.
그의 검을 맞받으며 헬무트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건…….’
전율이 일었다. 다리언의 검술이었다. 검으로서 극의에 달한 자가 정립한 검술.
검이 움직이는 궤적이 시선에 박혔다. 그건 헬무트가 수 없는 시간을 고련하며 몸에 익힌 바로 그 검술이었다.
뻔할 만치 완벽하게 알고 있다. 공격을 맞받아치는 것도, 공격을 흘리는 것도, 최소한의 힘으로 비낀 공격을 역으로 찔러 들어오는 날카로움도.
하지만 루크 예거는 그것을 나름대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낸 상태. 수 없는 시간 고련한 흔적이 보였다.
아무리 잘 안다지만 단계로 치자면 최상급인 다리언의 검술을 어설픈 공용 검술로 상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족쇄다.
헬무트는 새삼 실감했다.
‘다리언의 후손이 맞구나.’
죽은 다리언의 젊은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토록 재능 있는 자라면 자신의 혈손이 아니었어도, 다리언이 검술을 가르쳐 줬을 거다.
하지만 다리언의 제자는 헬무트 자신이었다. 루크 예거가 아니라.
챙! 마지막 충돌과 함께 루크 예거가 물러섰다. 간 보는 시간이 끝난 것이다.
둘 다 전력으로 붙진 않았다. 루크는 그 사이 헬무트를 관찰한 모양이었다.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 헬무트는 루크 예거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루크의 눈은 흔들림 없었다. 완전히 전투에 몰입하고 있다.
‘200만 마르크.’
그건 귀족 출신에게도 엄청난 돈이리라. 그뿐만 아니라 현재 그는, 팔마 기사단의 명예를 짊어졌다.
‘내가 이기면, 안 그래도 그를 싫어하는 이들에게 이유가 하나 더 생기겠군.’
다른 팔마 기사단원들도 헬무트에게 졌지만, 트집에 그런 건 중요치 않다.
하지만 루크 예거의 사회적 입지까지 이쪽이 고려해 줄 필요는 없었다.
‘져 줄 수는 없지.’
그렇다면 이겨야 한다.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헬무트는 검 끝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이쪽에서 먼저 친다.
그러나 그 순간,
-끼약!
새 소리라기엔 날 서고 거친 소음이 공중에서 울려 퍼졌다. 소리에 담긴 파장에 고막이 얼얼했다. 마기가 담긴 부르짖음.
‘마물?’
경기 중에 방해 요소가 개입될 거란 이야기는 못 들었다.
헬무트는 검을 거두고 훌쩍 물러섰다. 루크도 그와 같은 행동을 했다.
둘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무대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커다란 새였다. 사막에 사는 거대한 마물새.
하늘을 덮을 만큼 크게 날개를 펼친 놈은, 발톱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새빨갛게 붉은 핏덩이였다.
그게 뭔지 잘 보이지 않았기에, 다들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헬무트만이 그림자를 뚫고 발톱에 들린 그 뭔가의 정체를 알아봤다. 단지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다.
‘왜 저걸 달고 날아오지?’
새는 고도를 낮추어 발에 쥔 그 뭔가를 떨어트렸다.
쿵! 허공에서 떨어진 그 뭔가가 무대 중앙을 직격한 순간, 사방에 피가 튀었다. 어디선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체다!”
“오, 맙소사, 신이시여!”
헬무트는 무대 위로 떨어진 그것을 의아한 눈으로 응시했다.
여러 사람이 뭉개져 엉망으로 뒤얽힌 시체. 사지가 잘려나가거나 상체만 남은 시체가 으깨진 채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온전한 형상을 찾아보기 힘들다. 공처럼 뭉쳐져 있다가 떨어진 충격으로 와르르 흩어진 것이다.
우욱! 끔찍한 광경에 구토와 실신이 이어졌다. 관중석이 온통 웅성거렸다.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몇몇 관중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헬무트는 의심했다.
‘뭐지, 이건 깜짝 이벤트?’
하지만 그건 축제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여긴 바소르의 왕도다. 바소르의 왕족까지 자리하고 있는 이 자리에서 저런 이벤트를 벌였다간 목이 달아날 거라는 걸 헬무트도 알았다.
아무리 전사의 나라라지만, 평범한 일은 아닐 터.
하지만 마물이 이런 곳에 혼자 나타났다는 것도 이상하다.
헬무트는 혹시나 해서 루크 쪽을 쳐다봤다. 그도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당황한 기색이었다.
자연스레 경기는 중단된 상태. 심판이며 무투회 주최 측 인원도 일단 무대 위로 올라오긴 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저희들끼리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
무대의 반이 피로 얼룩졌다. 근거리에 있었으면서도 헬무트는 깨끗했다. 피가 튀는 것을 잘 피해 낸 덕이다.
헬무트는 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그는 아무도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 시체 쪽으로 다가서서 쭉 살폈다. 몇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됐군.’
잘린 몸통에 조금이나마 걸치고 있는 옷감은 평민들이 입을 만한 것이었다. 모래가 묻어 있다. 사막 쪽에서 죽은 자들이다.
‘사막 쪽에서 습격이?’
바소르에서는 흔한 일 아닌가. 마물이 그 시체를 왕도까지 실어 나른 건 흔한 일이 아니겠지만.
어느새 새는 유유히 날아 무투회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여긴 팔마 기사단이 있지만, 떨궜다가 놈이 관중을 깔아뭉개기라도 하면 대참사가 일어나니 할 수 없는 일이다.
루크 예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혹시, 선전포고인가.”
‘마물이 선전포고를……?’
지능이 있는 놈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석연찮았다.
헬무트는 무심코 시선을 관중석 어느 한구석으로 옮겼다. 팔마 기사단원을 위시한 팔마 기사단장이 있는 자리였다.
심각한 얼굴의 루투스 키게로가 종이를 받아들고 있었다. 그는 곧 부하를 불러 지시를 내렸다.
차분히 입술을 움직이는 그에게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 헬무트는 깨달았다.
무대가 만들어졌다. 완전히 새로운 무대가.
누군가가 다가와 헬무트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경기는 중지합니다. 대기 장소로 이동해 주십시오.”
그렇게 갑작스럽게 결승전은 중단되었다.
***
대기 장소에 들어선 헬무트는 루크 예거를 쳐다봤다.
“어떻게 된 일이죠?”
“저 시체들을 보면 마물이, 사막의 마을을 습격한 게 아닌가 하는 데.”
“바소르에선 마물이 원래 저런 식으로 행동해요?”
“그럴 리가 있나. 나도 놀랐다고.”
역시 평범한 상황은 아니었다. 헬무트는 아쉬운 듯 말했다.
“제대로 붙어 보지도 못하고 끝났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마물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가 중요한 거지.”
제법 기사다운 소리였다.
곧 익숙한 기척이 대기 장소에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것은 팔마 기사단장 루투스 키케로였다. 인사하려는 루크를 손을 들어 제지한 그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미스러운 사태로 인해, 결승전을 치를 수 없게 되었다. 무투회장은 정리 중이고 관중들은 모두 내보내고 있다.”
그는 강조하듯 덧붙였다.
“국가적 위기 사태로, 결승전을 치를 상황이 아니다.”
그가 내는 것도 아닌 200만 마르크가 아까워서 무투회를 망치진 않았을 터.
헬무트는 이 사태를 꾸몄다고 의심되는 주범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루투스 키케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또한 팔마 기사단원인 루크 예거는 차출되어 임무를 수행한다.”
“명을 받듭니다.”
루크 예거야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헬무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 결승전 승패는 어떻게 가리지요?”
“나중에 적당한 때에 시일을 다시 잡아 보지.”
나중에 하는 건 곤란했다. 그 나중이 언제까지 길어질지 모르는데, 헬무트는 마냥 이 바소르에 머물 수 없으니까.
‘루크 예거가 죽으면 내가 우승자가 되겠지만.’
그 상황 자체가 오게 해선 안 된다.
“그건 곤란하군요.”
루투스 키케로는 가볍게 대안을 내놓았다.
“아니면 우승 상금 200만 마르크와 준우승 상금 50만 마르크를 더하여 250만 마르크를 반씩 나눠 가진다. 이런 방법도 있지. 이 편이 자네에게도 좋을 거야. 바소르 인도 아닌 자네가 언제 치러질지 모르는 결승전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
단순히 상황을 설명하러 온 게 아니라, 상금을 나눌 권한을 가지고 조율하러 온 모양이었다.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시간이 얼마 없네.”
기사들이 무투회를 구경하러 온 왕족과 귀족들을 대피시키고 있다. 그 과정이 끝나면 국왕을 찾아가 바로 보고를 올리고 출정을 준비한다. 팔마 기사단장에게는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헬무트는 넌지시 물었다.
“제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요.”
“내 권한 안쪽이라면 반영해 주지.”
“그럼 이렇게 하죠. 저도 팔마 기사단과 함께, 마물을 토벌하러 가는 것으로. 더 많은 공적을 세운 쪽이 우승. 어때요?”
마물 사냥은 이쪽 전문이다. 루크 예거는 팔마 기사단에 들어온 지 8개월밖에 안 되었다. 이즈음에 시작되는 마물 사냥에 참가해 본 적이 없을 터. 그보단 자신 쪽이 공적을 세우는 데 유리했다.
“……내가 일전에 자네에게 한 제의를 기억하나?”
“네.”
“팔마 기사단이 될 생각이 있는가?”
“생각은 있죠. 하지만 그 전에 임무의 난도를 미리 체험해 보려고요.”
헬무트는 적당한 핑계를 붙였다. 일종의 직업 체험 같은 거다. 아카데미에서도 이런 게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팔마 기사단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장난이 아니야. 사막의 마물은 만만치 않아. 죽을 수도 있다. 자네를 돌봐 줄 사람은 없을 거다.”
“누가 저를 돌볼 수 있죠?”
차분하지만 오만함이 깃들어 있다. 날 선 기운이 그의 몸에서 일순 일어섰다.
그것을 느낀 팔마 기사단장이 그제야 깨달은 듯이 말했다.
“그렇군, 자네는 결승 진출자. 좋은 전력이 될 테지.”
아무리 어리고 약해 보이는 소년이라도 실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는 잠시 고심하는 듯했다. 기껏 수립한 계획에 변수를 끼워 넣고 싶지는 않으리라.
“이것은 엄연히 바소르의 공무. 비 기사단 인원을 동반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자네의 말처럼, 못 다한 승부를 기릴 필요가 있지. 실력 있는 검사가 한 명이라도 아쉬운 건 사실이니, 승낙하도록 하겠다.”
헬무트는 슬쩍 웃었다. 승낙받았으니, 이제는 그쪽이 세운 계획을 마음껏 훼방 놓을 참이다. 루투스 키케로는 짐작도 못하겠지만.
“단지 예정에 없는 인원이니 임무 수행비는 2급 용병 기준에 준하여 치르도록 하겠다. 알겠나?”
“네.”
안 줄 줄 알았는데, 역시 바소르는 부자 나라라서 그런지 챙길 건 다 챙겨 준다.
그가 승낙하지 않더라도 몰래 따라붙을 셈이었다. 분명히 그곳에서 루투스 키케로는, 루크 예거를 제거하려들 것이다. 마물이 가득한 사막에서라면 자연스럽게 그럴 기회가 올 터.
‘혹시 그가 결승전에서 우승하고 다리언의 증손자라는 걸 밝혀 버릴 수 있으니 그 전에 파토를 낸 건가.’
2왕자가 루크 예거를 만나고자 한 것도, 대기 장소를 찾아왔다는 것도 알려졌을 터였다.
2왕자는 루크 예거가 검성의 증손자라는 사실을 밝히길 바란다. 그가 그렇다는 것을, 루투스 키케로도 알 만했다.
“죽건 살건, 바소르에서 책임지지 않는다. 명에는 충실히 따른다. 동의하나?”
“네.”
“루크 예거와 함께 채비를 마치고 합류한다. 이자에게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알려 주도록. 오늘 내로 출발할 것이니 서둘러라.”
루투스 키케로가 떠나자마자 루크가 물어왔다.
“너 괜찮겠냐? 마물 사냥이 쉽지 않은 건 그렇다 치고 너야 좋은 여관에서 호사를 누리니 모르겠지만, 사막은 왕도처럼 편안하지 않아. 낮에는 죽을 듯이 덥고 밤에는 얼어붙을 듯이 춥지. 지금이라도 기사단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겠다고 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추운 건 익숙하지만 더운 게 좀 싫었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자신이 돌봐야 할 사람이 있는데.
“뭐지? 그 눈빛은. 무슨 의미야?”
예민하게 반응하는 루크 예거에게, 헬무트는 한 마디 충고했다.
“몸조심해요.”
“……너나 조심하고, 아무튼 갈 거면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