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60
159
헬무트
159화
어차피 짐은 거의 없었다. 헬무트에겐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망토가 있으니까.
그의 짐 속에는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는 것들이 많아서, 놓고 다니질 않았다.
하지만 망토에 넣을 수 없는 말은 여관에 있었다.
사막에선 바소르의 말이나 낙타만은 못할 테지만, 적응력 좋은 준마다. 타고 오면서 길도 들었으니 함께하는 것이 낫다.
황금 잎새 여관으로 향한 헬무트는 미하엘과 마주하게 되었다.
난리 통에 일찍 돌아온 미하엘은 반갑게 헬무트를 맞았다.
마침 그에게 말은 해 둬야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숙식 제공자에 대한 예의인가?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됐어.”
미하엘은 헬무트의 간략한 설명에도 놀라지 않았다.
“예정보다 이른 시기의 마물 토벌이군요. 경기를 보고 있는데 웬 거대한 새가 날아오길래 놀랐어요. 처음에는 이벤트인 줄 알았는데, 반응을 보니 바소르에서도 범상치 않은 일 같더군요. 결승전이 망쳐져서 아쉽게 됐네요.”
‘역시 나만 이벤트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군.’
외부인들이 보기에 바소르에선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시기에 마물의 준동이라니. 참 묘하죠.”
미하엘은 중얼댔다. 무대 위에 떨어진 시체들의 끔찍한 모습을 봤을 텐데도, 그는 그리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바깥 공기 외엔 미하엘의 안색을 나쁘게 할 만한 일은 없었던 듯하다.
‘귀족 자제치고는 대범하군. 검가 출신들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하지만 미하엘에 대한 의문은 당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마물 토벌이다.
아니, 마물 토벌이 아니라 루크 예거를 노리는 팔마 기사단장의 계획. 이제는 헬무트도 긴장해야 했다.
‘팔마 기사단에 대한 서류를 다시 읽어 봐야겠군.’
얼마나 많은 팔마 기사단원들이 그 일에 동참하거나 눈을 감을지 모르겠다.
호송 임무도, 호위 임무도 해 봤다. 약해빠진 녀석들도 지켜 봤는데, 루크 예거 정도면 지키기엔 준수한 상대다.
이번엔 상대가 좀 난적이지만.
‘내가 상대할 건 팔마 기사단장만이 아닐 테니까.’
다리언은 스콜피온의 새끼를 잡으러 갔다가 당했다.
실체도 없는 놈을 잡으러 팔마 기사단장이었던 다리언이 움직이진 않았을 터. 우두머리가 될 만큼 강한 마물이 있을 거다.
‘괴조의 움직임을 보건대 놈은 아마 조종당하고 있다.’
시체를 던져두는 식으로 도발적으로 행동하는 건 마물답지 못한 움직임. 게다가 시기도 절묘했다. 인간의 수작질로 느껴졌다.
‘신전 소행인가? 아니면 마법사? 모르겠군. 검사에게 가능한 일은 아닌데.’
팔마 기사단장에게 자신이 짐작하지 못하는 특별한 힘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다가 팔마 기사단원들도 그를 따른다.
만약 팔마 기사단장이, 그들에게 루크 예거를 제거하라는 명을 내린다면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아도 따를 녀석이 있으리라.
‘마물과 팔마 기사단원까지.’
그 모두가 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전력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기꺼우면서도 묵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생각에 잠겼던 미하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승자를 그런 식으로 정하다니, 그거 좀 불공정한걸요. 팔마 기사단과 함께 가는 건데, 그들이 루크 예거를 밀어주지 않겠어요? 공적을 세울 기회가 자연히 그쪽으로 쏠릴 텐데. 당신에게 불리해요.”
“내가 그러자고 한 거야.”
“왜죠? 그래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250만 마르크를 반분할 때와 200만 마르크를 독식할 때, 상금은 75만 마르크나 차이 난다.
하지만 그 때문에 헬무트가 200만 마르크를 날려 버릴지도 모르는 기회를 굳이 자청했다고 보긴 어렵다.
미하엘은 헬무트가 바소르의 더위를 끔찍해 한다는 걸 안다.
그러니 헬무트가 사막까지 따라나선다면, 그게 순전히 상금 때문만은 아닐 거란 것도.
“루크 예거에 관련된 일인가요? 그가 당신의 무엇이길래.”
뉘앙스가 묘하다.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하면 이쪽이 불쾌했다.
헬무트는 루투스 키케로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던졌다.
“직업 체험.”
“네?”
“마물 사냥꾼과 팔마 기사단원. 양쪽 다 체험할 좋은 기회지.”
“……믿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죠?”
“맞는데.”
“루크 예거가 어떤 식으로 당신을 사로잡았는지, 그것만 말해 줘요.”
루크 예거에게 뭔가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눈치였다. 헬무트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표현. 마음에 안 드는군.”
그때 밖에서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아직 안 끝났어?”
미하엘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헬무트는 이곳 황금 잎새 여관까지 루크와 함께 왔다. 기사단장이 함께 채비하라고 했기에, 헬무트가 먼저 이곳에서 짐을 챙기기로 한 터였다. 그 이후 같이 루크의 처소에 들를 거다.
올라올 때 빨리 갔다 오라고 성화를 부린 루크였다. 대화가 길어지니 그새를 못 참고 올라온 모양이다.
“다 됐어요.”
헬무트는 얼른 문을 열었다. 괜스레 미하엘에게 추궁당하는 상황이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왜 이리 오래 걸려? 함께 기도라도 올리고 나오나. 어?”
루크의 시선이 미하엘에게 꽂혔다. 그의 동공이 커졌다.
“이거, 인형인가?”
루크는 무심코 손을 뻗어 미하엘의 머리를 건드렸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사람이잖아?”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로군요.”
미하엘은 엄지와 검지만으로 차근히 그의 손을 제게서 떼어 냈다. 꼭 지저분한 머리카락 같은 걸 떼어 내는 듯한 동작이었다.
헬무트는 루크를 밀며 문밖으로 나섰다. 왠지 둘이 엮여선 안 될 것 같았다.
루크가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무슨 남자 녀석들이 이렇게 곱상하게 생긴 거지. 희귀한 걸 연달아 보네.”
“무례한 것도 모자라, 생긴 것처럼 말하는군요?”
“내 생긴 게 어디가 어때서?”
루크 예거는 태연하게 제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객관적으로 잘난 면상을 가진 그는 무투회의 영향으로 바소르에서 여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미하엘은 어쩐지 싸늘한 미소로 답했다.
“모르면 됐어요.”
막말할 듯한 가벼운 인상이라는 뜻인 듯했다. 확실한 건, 미하엘이 루크 예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게 초면에 범한 무례 때문인지 헬무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곧 미소의 온도가 바뀌었다. 미하엘은 헬무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잘 다녀오세요, 하이드. 다치지 않길 빌게요.”
마치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투였다. 그럴 것 없다고 하려던 순간, 문이 닫혔다. 깔끔한 공간의 단절. 사양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기다리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 미하엘도 당장 바소르를 떠나야 할 만큼 바쁘지는 않은 듯하니.
계단을 내려가면서 루크가 헬무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네 친구, 왜 저렇게 재수가 없냐?”
“친구 아니에요.”
“친구가 아니면? 아, 너에게 이미 섬기는 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은데.”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숙식 제공자……?”
간략히 사정을 설명하자 루크는 별다른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희한한 관계로군. 뭐하는 녀석인데.”
“저도 몰라요. 묻지 않아서.”
“생긴 건 예쁘게 생겼는데, 어린 녀석이 쌀쌀맞은 게 귀여운 맛이 없어. 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별로 당신한테 귀엽게 보이고 싶진 않군요.”
“당신이라니. 공무를 수행 중이니 루크 경이라고 불러라.”
뻐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죠, 루크 경.”
“그래, 앞으로는 나를 그렇게 부르라고.”
루크는 왠지 으쓱대는 걸음걸이로 앞서갔다. 헬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루크도 고작 18세.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상이었지만, 그도 어렸다. 이제 막 성체가 된 수컷이다.
원만한 성격과는 별개로 사소한 호칭에 으쓱댈 만도 했다. 특히 그가 속한 팔마는 바소르에서 제일가는 기사단이니.
물론, 15살에 팔마 기사단장에게서 직접 입단 제의를 받은 헬무트에겐 그리 대단치 않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서 깎아내릴 건 없다.
“서두르죠.”
이제부터는 루투스 키케로가 만든 무대의 시작이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약간의 불안과 많은 기대를 안고, 헬무트는 기꺼이 새로운 무대에 발을 들이기로 했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로서.
*
여관을 떠나 루크의 숙소에 들렸다 나온 참이었다. 웬 모르는 남자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루크 경.”
“누구지?”
“고귀한 분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심부름꾼 같은 느낌의 남자는 웬 쪽지 하나만을 덜렁 쥐여 주고 사라져 갔다.
“이제는 하다 하다 못해서 남자들한테까지.”
루크는 농담조로 이야기하며 쪽지를 펴들었다. 그 안에 새겨진 2왕자의 인장을 본 순간 루크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헬무트한테서 등을 돌리며 쪽지를 읽어 내렸다. 그의 표정은 차츰 심각해졌다.
“이게 대체 뭐지?”
루크는 왠지 헬무트 쪽을 힐끔 봤다. 고민하는 눈빛이었으나,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소년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 혹시……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헬무트는 그가 펼쳐 들이댄 쪽지를 읽어 봤다.
‘마물 토벌 건으로 긴급히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보는 눈이 많아, 이렇게 전언만 하나 남기네. 노파심이라고만 생각지 말고, 뒤를 조심하시게. 기사단의 누구에게도 등을 맡기지 말기를. 이 말을 꼭 명심해 두게. 자네의 목숨을 보전하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걸세.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겠네.’
갑작스러운 사태에 2왕자에게도 나름의 감이 왔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확신은 없었던 것 같다.
헬무트는 친절하게 쪽지 그대로 해석해 주었다.
“당신이 토벌 중에 뒤에서 칼을 맞을까 봐 걱정된 거로군요.”
“왜 그런 걱정을 하시는 거지? 아니, 지금 이 말은 팔마 기사단의 누군가가 내 뒤를 노린다는 거잖아?”
‘자그마치 기사단장이 당신을 노리는 데.’
루크가 알면 식겁할 일이었다. 미리 말을 해 줬다가 만방에 티를 내고 다니면, 더 위험해질 수 있다.
자신이 붙어 있는 동안, 아직은 모르고 있어도 되었다. 적당한 때가 되면 알려 줄 터.
“……난 원한을 사고 다닌 적이 없는데. 2왕자 전하가 보시기에 내 평판이 그렇게 나쁜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좀 있기는 해.”
‘그런 문제는 아니지만.’
“비 바소르인 출신으로 결승까지 진출한 기사단의 기대주니 바소르 인들에게는 눈꼴사납지 않을까요.”
“그런 이유로 동료를 배신한다는 말인가?”
“배신의 이유는 다양하지요. 사소할 수도 있고요.”
루투스 키케로가 다리언을 배신했으리라 짐작되는 이유로 유력한 것은 있었지만, 그게 정답인지는 헬무트도 확신하지 못했다.
기사단장 자리가 탐나서 다리언을 배신했다고 보기에, 루투스 키케로는 탐욕적인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자의 평판은 1왕자를 지지한다는 것만 빼놓고 꽤 괜찮았다.
그는 모범적인 기사로서 팔마 기사단장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렇기에 루크 예거도, 다른 팔마 기사단원들도 그를 따르는 것이리라.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배신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다.
헬무트가 아는 건, 루크 예거도 다리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뿐이다.
루크가 중얼거렸다.
“출정 전부터 찜찜해지는군. 결승전도 파투가 났는데, 이건 꼭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잖나.”
“글쎄, 조심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루크 예거가 제대로 경각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걸로 족했다.
“그러지.”
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고민에 잠긴 루크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