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62
161
헬무트
161화
“일단은 말을 마구간에 넣자고. 우리야 그렇다 쳐도, 말이 지쳤을 거다.”
말들이 할 일이 많았다. 이 사막을 말도 없이 돌아다니긴 힘드니 휴식은 필수다.
헬무트는 루크 예거의 제의대로 안장에서 내려섰다.
히히힝! 헬무트가 내려서자 백마가 푸르릉대며 콧김을 뿜어냈다.
저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사라지니 한결 나은 듯하다.
더운 나라에서 태어난 놈도 아닌데 제법 잘 견뎌 줬다.
헬무트는 놈의 콧잔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화이트는 손길을 거부하듯 앙칼지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루크 예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말이 덥다잖아! 거 성깔 있는 녀석이네.”
“당신은, 그새 종이 바뀐 것 같군요.”
햇볕을 받아 까무잡잡해진 그를 보고 헬무트가 낯설게 중얼거렸다. 그새 다른 사람이 됐다.
“나도 바소르에 오기 전에는 하얀 편이었다고. 너처럼 도련님 같은 느낌이었지. 이제는 완전 바소르 인이 다 되었지만.”
“모래색과 구별되어서 좋군요.”
헬무트는 지나가듯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막의 모래는 약간 노란끼를 띤 하얀색이었다. 그는 까마니 눈에 더 잘 띌 거다.
“뭐라는 거냐. 너도 숙소에서 쉬어 둬라. 마물 토벌은 만만치 않을 테니까.”
저도 처음인 주제에, 마치 아는 듯이 말한다. 하지만 헬무트는 토 달지 않았다.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다.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둬야 할 터였다.
*
팔마 기사단장은 그 시각, 데세르의 기사단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첫 습격 이후로, 더 이상 습격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인근 오아시스 주민들은 불안에 떨며 속속들이 데세르로 피난해 오고 있었다.
팔마 기사단에서 벌이는 주기적인 마물 토벌 탓에, 웬만한 마물들은 씨가 말랐다.
이만한 규모의 마물이 노골적으로 공격해 오는 건, 근 10여 년간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일.
“습격당한 오아시스 쪽에는 가보지도 못했다고?”
“오아시스 근방에 만만찮은 마물이 포진하고 있어서 탐색병이 다섯이나 죽은 이후로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막에 인접한 데세르의 병사나 기사들도 마물과 싸우는 데는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마물들은 유독 강력했다. 평소에 상대하던 잔챙이가 아니다.
다른 오아시스 주민들도 연락을 받고 알아서 피난해 오는 것이지, 데세르에서 병력을 파견해서 그들을 지켜준다거나 할 생각을 못 했다.
“괜한 희생을 늘리는 것보다는 지원을 기다리는 게 낫지.”
부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은 놈들의 땅이다.
“그 근처에 죄 몰려 있으리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집단적인 움직임. 외곽을 지키는 녀석이 있을 정도면, 지능이 있는 우두머리가 거기서 부하들을 거느리고 포진해 있을 터.
루투스 키케로는 명쾌히 결론을 내렸다.
“일거에 소탕한다.”
그의 눈빛이 일순 강렬해졌다. 그는 팔마 기사단장이었다. 지금의 눈빛만 봐선 그에게 다른 뜻이 있을 거라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리라.
그의 주변에 있는 기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예.”
*
팔마 기사단 전체에 하나의 명령이 떨어졌다.
‘자정 무렵, 습격당한 오아시스로 출발한다.’
팔마 기사단의 이동 속도는 빨랐다. 부지런히 말을 달린다면 정오 전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낮에 도착하기 위해서 밤에 출발하는 것이다.
숙소는 2인 1실이었다. 출발하기 몇 시간 전부터 긴장감이 이는지 루크가 검을 닦으며 손봤다.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어. 빨리 놈들을 해치우고 안정을 찾아야지. 너와 나도 승부를 가려야 할 테지만, 너와는 달리 나는 임무가 더 중요해.”
“당신이 팔마 기사단에 든 지는 8개월 밖에 안됐는데 벌써 바소르에 귀속감을 느끼는 듯하군요.”
“벌써라니. 나는 팔마 기사단원이다. 바소르의 사람이라고.”
“당신 정도 실력이면, 바소르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텐데요. 왜 굳이 바소르죠?”
헬무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열사의 지옥 같은 이 바소르를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으니까. 루크가 피식 웃었다.
“조부님이 자리를 잡긴 했어도, 타국 출신은 결국 겉돌더라. 특히 바소르 출신들은, 다른 나라에서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데 한계가 있어.”
“그렇군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루크 정도면 다듬어지긴 했지만, 아카데미 학생들과 비교하자면 거친 느낌이 있었다. 아마 그것이 바소르의 기질이리라.
“실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건, 바소르가 유일하다. 그리고 나는 이 나라가 좋아. 내 안에 흐르는 바소르의 피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바소르는 놀랄 정도로 강자를 우대했다.
팔마 기사단처럼 명성 높은 기사단에 실력이 있으면 바로 입단할 수 있는 경우는 확실히 드물다.
바소르는 루크 예거에게 있어서 삶의 새로운 장이며 기회를 뜻했다.
“……그렇군요. 그 점도 고려하지요.”
“뭘 고려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너도 준비 잘 해둬. 앞으로 며칠간 지긋지긋하게 싸우게 될 테니까.”
“그러죠.”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에서 싸우는 건 처음이다. 새로운 경험이 대단히 기대되었다.
*
또다시 강행군이 이어졌다.
자정을 넘어 출발한 팔마 기사단은 오아시스까지 부지런히 말을 달렸다.
팔마 기사단원들은 모두 비스를 다룰 수 있다. 시력을 강화할 수 있으니 밤눈도 밝았다. 습격을 당한다고 해서 대처하지 못할 이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 시야에 제약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 낮에 싸우는 쪽이 두말할 것 없이 좋았다.
“탐색병이 어디서 습격당했다는 거지?”
기사 한 명이 중얼거렸다. 오아시스를 1시간 거리에서 앞두고 숨을 고르는 시점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여기에 오기까지 앞길을 가로막는 마물은 한 놈도 발견하지 못했다.
밤사이 싸늘해졌던 사막은 어느덧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형태의 천막을 빠르게 설치하고 휴식했다.
“한 놈도 나타나질 않는데.”
“우리가 왔다는 걸 알고 물러난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 사막에서의 놈들의 이동 속도는 엄청나니까.”
두런두런 나누는 말소리를 들으며, 헬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하지만 마기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 근방에서 놈들이 돌아다닌 흔적이 수도 없이 눈에 잡힐 듯했다.
헬무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마기에 예민한 인간이었다.
잔챙이투성이. 강한 놈은 아마 몇 안 될 터였다.
매년 마물 토벌을 나가는 팔마 기사단이 헛고생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센 놈의 지배를 받으면, 약한 놈들도 강해지지.’
인간 군대로 치자면 지휘관의 유무 같은 느낌일까.
우두머리의 지배를 받는 마물은 겁이 사라지고 좀 더 광포해진다.
그렇다더라도 문제는 없다. 헬무트는 마물을 상대하는 쪽이 인간을 상대하는 쪽보다 편했다.
‘어둠의 싹에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게 문제지.’
하지만 그걸 생각해서 몸을 사릴 수만은 없다. 이번 일만 끝나면 당분간 마물을 접할 일은 없을 테니 빼지 않을 것이다.
“흐음.”
팔마 기사단장이 손에 있는 나침반을 내려다봤다. 근거리에서 마물을 감지하는 물건이었다.
오아시스를 향해 반응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저곳에 아직 마물이 남아 있다는 소리.
얼마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명령했다.
“바로 출발한다. 방심하지 마라.”
멀찍이서 보이는 오아시스는 폐허였다. 움막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모두 허물어져 내린 터다.
굶주린 마물들이 숨어있는 자들까지 골라내어 씨를 말렸으리라.
그럼에도 멀리서 보이는 오아시스의 풍경은 평화로울 만치 고요하기만 했다.
“호르텐, 케네스, 알렉! 앞서 가면서 길을 살핀다!”
“예!”
기사단장이 지목한 세 명이 먼저 진격하듯 오아시스를 향해 말을 달렸다.
어느 순간, 앞서가던 이들 중 하나가 일순 기우뚱했다. 달리던 말의 발 한쪽이 모래에 빠져 멈칫한 것이다.
“뭐지?”
기사 알렉은 바로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말은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히히힝! 바닥에 구멍이 난 것처럼 유사가 급속도로 빨려들고 있었다. 급작스레 생성된 거대한 구덩이였다.
쏴아아아- 모래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말이 단말마를 내지르며 가운데로 먹혀 들어갔다.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잇따랐다.
홍수 때의 물살과 같은 속도. 말에서 뛰어내린 알렉도 유사의 흐름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가장자리엔 착지했으나 발을 박찰 바닥이 없었다. 알렉은 유사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이대론 빨려들어 가겠어!’
“알렉! 밧줄을 잡아!”
다른 기사가 그에게 밧줄을 던졌다. 알렉은 밧줄을 손에 잡으면서 비스를 일으켜 빨려드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아래쪽에서 마기와 함께,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모래 안에 묻혀 있었던 마물의 존재가 여실히 드러났다.
“마물이다!”
바닥을 뚫고 거대한 두 개의 집게가 모습을 드러냈다. 곤충형 마물이었다.
알렉은 밧줄을 잡으며 위로 몸을 끌어 오르려고 애썼다.
말을 집어삼킨 놈은 알렉을 노리고 있었다. 이 상태론 제대로 공격을 받아 낼 수 없다.
“내가 한다!”
말에서 뛰어내린 호르텐이 놈을 향해 바로 검을 날렸다.
바로 베어 낸 뒤, 놈을 딛고 구덩이 위로 뛰어오를 생각이었다. 자신만만한 동작.
그러나 비스를 실은 그의 검은 마물의 몸뚱이가 아닌 모래에 깊숙이 박혔다. 퍽!
‘아니?’
모래 속에서 놈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빨랐다. 호르텐의 팔뚝이 검과 함께 모래 속에 파묻혔다.
빈 등을 마기를 실은 놈의 몸통이 후려쳤다. 쾅!
“크윽!”
호르텐은 피를 토하고 나뒹굴었다. 정통으로 공격을 받으면 1급 기사라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의 몸은 취약하니까.
알렉을 노리던 놈이 바로 표적을 바꿨다. 모래 위로 거대한 집게 두 개가 뻗어 나왔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지만, 하체가 모래에 묻혔다. 용케 검을 놓치진 않은 채였다.
“호르텐! 조심해!”
알렉을 지탱하던 케네스는 그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말려든다.
알렉이 그를 도우려 움직였지만, 밧줄을 쥐고서도 모래 때문에 느렸다.
호르텐은 이를 악물었다. 약간의 방심이 그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뿔처럼 끝이 날카로운 집게가 그를 향해 찔러들고 있었다!
그때 팔마 본대 쪽에서 한 사람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호르텐 경!”
그는 신속하게 제 말안장에 밧줄을 묶고, 다른 쪽 끝을 허리에 단 채 몸을 던졌다.
사막과 대조되는 선명한 은회색 머리카락. 루크 예거였다!
“죄송합니다!”
구해 주려는가 싶었더니, 뛰어내린 그는 호르텐의 어깨를 짓밟고 뛰었다. 달려들 각도를 위해서였다.
이번엔 상체를 완전히 드러낸 놈은, 루크 예거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집게 사이를 절묘하게 파고든 검 끝이 놈의 눈을 찔러 들었다.
쿠아아아! 놈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그 바람에 구덩이가 온통 요동쳤다. 그러나 유사의 흐름은 멈추었다.
루크는 검을 뽑아 들어, 놈의 머리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검을 내리찍었다. 콰직!
마물을 별로 상대해 본 적 없었던 그가 본능적으로 가장 약한 부위를 공격한 것이다.
얼마나 찔러야 죽을지 몰라서 난도질하듯이 계속 검을 찔러댔다. 콰직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알렉이 그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만해. 이미 죽었어. 힘 뺄 것 없다.”
그제야 숨을 고른 루크는 검을 거두며 물었다.
“호르텐 경, 괜찮으십니까?”
호르텐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가 입은 내상은 치명적이진 않다.
목숨을 구한 건 다행이나 하필 상대가 루크 예거라니. 발에 밟힌 탓에 굴욕감도 만만치 않게 일었다.
그가 짓씹듯이 토해 냈다.
“그래, 고맙다.”
뒤쪽에서 함성이 터졌다. 다른 마물이 나타난 모양이다.
루크의 시선이 이제는 멈춘 구덩이 밖으로 움직였다. 약간의 흥분감이 전류처럼 몸에 흐르고 있었다.
전투 앞에서 사리기엔 그는 아직 혈기왕성한 10대였다. 루크 예거는 바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