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64
163
헬무트
163화
8시간가량 말을 달려 도착한 다음 오아시스 마을에는 남아 있는 주민들이 아예 없었다.
이제껏 들린 마을 중 가장 작은 곳이다. 탐색을 마친 그들은 한곳에 모였다.
“이곳도 아니로군요.”
“놈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데세르로 다수 인원을 회군시켜놨으면, 이 소수의 인원들을 공격해야 할 게 아닌가.
마물의 의도를 읽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지만,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저번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던 6명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지만 별 일이 없다고 전해왔다.
“다음 장소에선 시원하게 뭔가 터졌으면 좋겠어.”
“허탕만 치니, 답답하군.”
마냥 사막을 헤집기보다는 빨리 끝내고 왕도로 귀환하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기사단장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도록.”
“예.”
야간 이동은 금물이다. 그들은 하룻밤을 이 마을에서 보내기로 했다.
남은 자들 중 말단은 루크 예거였다. 식사 준비도 그의 소관이었다.
놀랍게도 팔마 기사단원의 기본 소양은 요리다. 수행인을 거느리지 않고 토벌에 참여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루크는 헬무트한테 너도 도우라고 말해 봤지만,
‘기사단장님한테 독극물을 먹이고 싶다면 얼마든지.’
따위의 대답만 얻었다.
“넌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 뭐하는 도련님이야.”
오아시스 물가에 열기를 식히러 온 그가 중얼거렸다.
헬무트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를 밟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팔마 기사단장을 조심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루크 예거에게 어이없는 기색이 떠올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기사단장님을 왜.”
그는 조금 후 깨달은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2왕자 전하께서 조심하라고 말한 게 기사단장님이라는 거냐?”
“기사단장인 건 확실해요. 몇 명이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분이 왜 날 굳이 암습해? 그냥 일대일로 붙어도 처리할 수 있을 텐데.”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주제 파악은 잘하고 있다는 점이 바람직했다.
“거기다가 팔마 기사단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어째서 나를 노린다는 거냐. 내가 뭐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길길이 날뛰지 않는 걸 보면 그간 말을 던져 둔 보람이 있었다. 어느새 그에게도 의심이 싹튼 것이다.
헬무트는 딱 잘라 말했다.
“당신이 다리언 디페르트의 증손자니까.”
“기사단장님은 증조부님을 섬기던 분이다.”
“루투스 키케로는 검성의 실종과 관련이 있어요.”
루크 예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거 확실한 거냐? 네가 어떻게 알아.”
“확실해요. 당신이 검성의 후손이라는 것만큼이나.”
헬무트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고민이 된다. 이쪽이 다리언의 제자라는 거, 당장 말해 줘도 좋을지 알 수 없다. 괜히 난리를 피우는 것 아닐까.
루크 예거의 눈에 의심의 빛이 떠올랐다.
“네가 2왕자 전하와 짜고 이러는 건 아니고?”
2왕자와 타국인인 헬무트가 인연이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루크도 그걸 알고는 있을 것이다.
헬무트는 보통 이럴 때 믿기 싫으면 말든지 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2왕자에게는 확신이 없어요. 자신이 기사단장을 의심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길 바라지도 않죠. 그래서 그를 지목하지 않은 거예요. 나는 다르죠.”
“너는 어떻게 다른데.”
“그건…….”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기척을 느꼈다. 헬무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가온 이는 기사단장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제퍼드란 기사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수다 떨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끝을 맺었다.
*
줄곧 말을 달려야 했기에 일정은 고단했으나 단조로울 만큼 평화로웠다. 내일이면 팔마 기사단 교대 인원과 합류한다.
이변은 다음 마을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났다.
멀찍이서 본 마지막 마을은 데세르를 떠나 이제까지 들렀던 곳 중 가장 컸다. 그러나 놀랍도록 고요했다.
팔마 기사단장은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어지럽게 움직이는 나침반의 바늘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여러 놈이 주변에 있다는 뜻이다.
가장 서열이 낮은 루크와 다른 기사 한 명이 정찰병으로서 앞장섰다.
“마을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먼 거리는 아니었다. 기사단장은 이곳에 있었다.
‘시야 범위 안이니.’
헬무트는 따라나서려다가 멈춰 섰다. 괜스레 붙어 다니는 듯이 보여선, 의심만 살 뿐이다. 그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얼마 후,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쳤다. 마을 쪽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쾅!
히히힝! 말들이 일제히 앞발을 들고 날뛰었다. 뿌연 흙먼지가 이는 마을 지붕 위로 어두운 형체가 드리워졌다.
“마물이다!”
“모두, 마을로!”
명령을 내린 팔마 기사단장이 먼저 말을 달렸다. 그의 군마는 차분하고 발이 빨랐다. 홀로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헬무트는 화이트의 옆구리를 차며 그를 쫓았다. 그러나 간격은 벌어졌다.
바소르의 말이 아닌 화이트는 사막에 아직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래다.’
헬무트는 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히히힝! 화이트가 모래에 뒷발을 묻으며 멈춰 섰다.
퍽! 모래를 젖히고 튀어나온 놈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거대한 뱀. 유사를 빨아들이는 놈은 아니었다.
팔마 기사단장이 지나가자마자, 매복하고 있다가 바로 그를 노리고 튀어나온 것이다.
붉은 전갈만큼은 아니지만, 놈에게선 꽤 강렬한 마기가 느껴졌다.
“놈을 처리하고, 마을로 향한다!”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헬무트에겐 이놈이 대수가 아니었다. 놈을 건너뛰어 팔마 기사단장을 쫓아야 했다.
그러나 모래를 빠져나온 뱀의 몸 어딘가에서 싸르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상한 향취가 훅 풍겼다.
화이트가 비틀거렸다.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향취, 정신을 흐리게 하는 거다. 기사들이 재빨리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헬무트한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이 문제다. 놓고 가 버릴 수는 없으니. 화이트는 그가 직접 이름을 지어 준 말이었다.
그는 놈을 건너뛰려던 마음을 접고 검을 뽑아 들었다.
‘바로 처치하고 뒤를 따른다.’
헬무트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
마을에 들어서기 전까지 루크 예거는 줄곧 찜찜한 상태였다. 그건 하이드란 정체 모를 녀석을 만난 이후로 그가 계속 느끼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어딘지 모르게 친숙하기도 한 녀석. 허언을 지껄일 타입은 아니다.
단지, 그가 말한 것이 순순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을 뿐.
“사람이 없나 둘러보지. 나는 이쪽으로 가겠다.”
“예.”
함께 온 기사 한 명이 먼저 움직였다. 루크는 짧은 대답과 함께 반대편으로 발을 옮겼다. 아직 사람 사는 자취가 남아 있는 마을은 한적하기만 했다.
머리가 복잡하다. 그러나 지금은 임무를 수행 중이니, 여기에 집중해야 했다.
‘다들 데세르로 대피한 듯하지만.’
첫 마을에서처럼 남아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몰랐다. 루크 예거는 꼼꼼히 마을을 살폈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저편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꺄악!”
그리고 느껴진 미약한 마기의 기척. 루크는 검을 뽑아 들고 달렸다.
쾅쾅! 닫힌 나무문을 두들겨 패는 사람 크기의 거대 도마뱀이 보였다.
놈은 루크가 나타나자마자 돌아보며 위협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쐐애애액!
“소리부터가 하급이로군.”
미간을 찌푸린 루크가 단숨에 검을 내리그었다.
털썩! 바로 목이 잘린 놈이 바닥에 쓰러져 누웠다. 건물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에 누가 있나? 마물은 해치웠다.”
그제야 문이 열렸다. 겁먹은 얼굴의 한 소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여덟 살은 되었을까.
루크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렸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팔마 기사단의 루크 예거다. 왜 데세르로 대피하지 않았지?”
“할, 할머니가 많이 못 걸으셔서.”
집 안에서 인기척이 하나 더 느껴졌다. 지팡이를 짚은 노파가 비척거리며 걸어 나왔다. 척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하다.
“아이의 부모는?”
“상행을, 떠나서……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노파는 기침 섞어 대답했다. 아이를 조부모에게 맡기고, 일하러 나간 모양이었다.
“남은 사람이 또 있나?”
“이 마을에서는 우리뿐이에요.”
소녀가 냉큼 답했다. 두 사람뿐이라면 데세르로 데려다주기 용이하다.
“좋아, 그럼 일단 최소한의 짐을 챙기고…….”
그 순간, 바닥에서 진동이 일었다. 쿠웅! 굉음과 함께 마을이 온통 들썩였다. 흡사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았다.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고막을 찢는 비명 쪽이 더 위력적이었다. 루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바닥 쪽에서 진동과 함께 밀려오는 뭔가가 느껴졌다. 날아드는 새처럼 빠른 속도였다.
쿠웅! 충돌음이 파장과 함께 닥쳤다.
집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집 안에 서 있던 노파가 입을 벌렸다.
어찌할 새도 없이 그녀는 순식간에 쓰러지는 집에 파묻혔다. 콰삭!
루크 예거는 아이를 끌어당겨 뒤로 몸을 던졌다. 거대한 검은 다리가 집을 뭉개며 삐죽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집을 폐허로 만들며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거대한 거미였다.
‘빌어먹을.’
루크 예거는 이를 악물었다. 아이의 할머니를 구하지 못했다. 뛰어들어 무너지는 건물을 베어 내는 편이 나았을까.
아니다, 그러다가 큰 몸집에 깔리기라도 했다면 그게 더 문제다. 하나라도 확실히 구하는 편이 바른 판단일 터.
코앞에서 조모를 잃은 소녀가 발광을 하며 울부짖었다.
“흐으으으악!”
거대한 거미가 감정 없는 8개의 눈을 번뜩이며 소녀를 쳐다봤다. 먹잇감을 보는 놈의 몸에서 은은한 독기가 품어져 나왔다.
저편에서도 마물이 출몰했는지 싸우는 듯한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 함께 마을로 온 기사는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루크는 눈치를 살폈다.
‘아이를 내려놔야 하는데.’
비스를 쓰는 검사는 면역력이 강하다. 자신이야 독기를 뿜어도 버틸 수 있지만, 아이는 아니다.
혼자 상대할 만했지만, 그러면 아이가 위험해진다.
‘일단 자리를 뜬다. 말이 있는 곳으로!’
루크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뛰었다. 거미는 주저 없이 그를 쫓아 달렸다. 콰직, 콰지직!
놈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패고 건물이 허물어져 내렸다. 거대한 거미가 여덟 다리를 움직여 쿵쿵거리며 쫓아오는 광경은 가히 공포스러웠다.
‘못 따돌리겠군. 너무 빨라.’
루크는 뒤로 돌아섰다. 아이는 거미의 모습을 보고 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궜다. 놈이 뿜는 독기가 근처에 난 풀을 죽였다. 파스스.
‘아이한테는 위험할 수 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다. 루크 예거의 검에 비스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거미의 등 뒤로 강력한 비스가 느껴졌다.
파슉! 섬광이 거미의 머리를 갈랐다. 거미가 반응할 새도 없이 2격과 3격이 연달아 놈의 뚫린 머리를 파헤쳤다.
마물의 단단한 껍질도 강력한 비스 앞에선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쿵! 거미는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놈의 몸뚱이를 가볍게 건너뛰어 한 남자가 걸어왔다.
“루크 예거, 무사한가!”
“기사단장님.”
루크는 그를 쳐다보면서, 기절한 아이의 맥을 살폈다. 놀라서 정신을 잃었을 뿐인 것 같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기사들은 어디 있습니까?”
“곧 올 것이다. 다른 놈을 처리 중이야. 그보다…….”
평소와 같은 얼굴의 루투스 키케로가 나침반을 보였다. 나침반은 어느 한 방향을 지목하고 있었다.
주변에 마물이 이렇듯 나타났는데, 나침반의 방향이 한곳으로 쏠릴 정도면 가장 마기가 강한 놈이다.
근처에 붉은 전갈이 있는 게 틀림없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 놈이니 도망치기 전에 쫓아야 했다.
“나를 따라와라. 시간이 없다.”
“예!”
기사단장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루크 예거는 몇 안 되는 멀쩡한 집에 아이를 들여놓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선뜻 그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