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67
166
헬무트
166화
붉은 전갈은 그리 어려운 적이 아니었다. 전에 만난 원숭이 마물 보다는 윗급의 마물. 그러나 마기는 강하되 여러 모로 미숙했다.
몸을 숨기는 것 하나는 능숙했지만, 전투력은 대수롭지 않았다.
‘핵을 물려받아 강해진 놈이지, 제가 힘을 쌓은 놈이 아니야. 게다가 신관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런 녀석이 자의지로 싸우는 마물보다 강할 수는 없다.
단지 사막이라는 지형이 놈을 도왔다. 모래를 흩날리고, 뿌연 먼지로 시야를 가려서 그 틈을 타 공격한다.
마기를 실은 놈의 움직임은 잽쌌고, 앞발은 바위처럼 단단하고 위력적이었다.
놈은 몇 번이나 헬무트가 서 있던 자리를 삽처럼 후벼 팠다. 그때마다 모래 위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가 사라져 갔다.
‘덩치가 크니 위력적이군.’
하지만 당해 주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헬무트는 문득 눈썹을 들어 올렸다.
구구궁! 바위산 안쪽에서 진동이 일었다. 두 개의 비스가 느껴졌다. 그 충돌까지도.
아마, 저 안에서도 싸움이 시작된 터. 루크 예거가 바로 일격을 맞고 죽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 서둘러 진입해야 한다.
헬무트는 힐끗 어느 한쪽을 쳐다봤다.
‘문제는 저 신관.’
대놓고 공격을 가하진 않았다. 하지만 헬무트가 전갈의 머리를 노릴라치면, 신성 마법을 툭툭 던지면서 압박을 가한다.
신성 마법의 위력을 알 수 없었기에, 헬무트는 최대한 맞받아치기보단 피해 왔다.
어둠의 싹은 저를 한 번 소멸시키려 했던 신성력에 예민했다. 신성 마법의 범주를 정확히 감지해 내 피하는 건 쉬웠다. 조금이라도 범주에 들라치면 심장이 시큰거렸기 때문에.
어둠의 싹이 이렇게 그를 지배해 오는 느낌은 처음이다. 제가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거슬려.’
차라리 제대로 얻어맞고 정화당해 어둠의 싹을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
‘대마법사 안티올이 내 생명의 근원은 어둠의 싹이라고 했으니.’
어둠의 싹이 사라지면 헬무트는 죽을 것이다. 그게 신성 마법에 함부로 맞설 수 없는 이유였다.
“재미있구나. 네 녀석, 꼭 내 신성 마법에 마물처럼 반응하고 있어.”
대신관 돌로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가 행한 신성 마법은 물리력을 발휘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직격당했대도 어리둥절해할 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으리라. 저토록 기를 쓰고 피해대지도 않았을 거고.
“네게서 느껴지는 마기가 뭔가 했더니, 어둠의 싹을 가진 녀석이로군. 간혹 신전의 눈을 피해서 살아남은 녀석이 있다고 들었건만.”
그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헬무트를 관찰했다.
“이런 곳에서 네 녀석을 만난 건 루멘의 뜻이겠지. 내가 이 사막에 오게 된 건 너를 처리하기 위함인 게야.”
하필 대신관인 그의 앞에 어둠의 싹을 지닌 자가 나타나다니! 우연이라 하기엔 공교롭지 않은가.
“내 오늘 친히 너를 루멘의 곁으로 보내 주마!”
대신관 돌로스는 거만하게 선언했다. 마기를 가진 자들에게 루멘의 대신관은 절대적인 힘을 행사한다.
강력한 검사들도 쩔쩔매는 마물도, 저 붉은 전갈조차도 그의 신성마법에 굴복당해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상성이었다.
‘쓸데없이 말이 많군.’
헬무트는 바닥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붉은 전갈은 계속 공격이 실패하자 몸을 부르르 떨며 성을 내고 있었다.
파삿! 파사사! 놈의 꼬릿짓에 모래가 사납게 휘날렸다. 이마에 박힌 구슬에 억압당하고 있는 놈이니, 성나 있을 만도 했다.
놈은 헬무트가 대신관에게 다가가는 길목만큼은 철저히 막아서고 있었다. 헬무트를 공격하는 것보다, 돌로스를 지키는 게 우선순위인 것처럼. 그것이 대신관의 지시일 터.
검사와 마법사의 진영과 유사하다. 하지만 명백히 차이가 있었다.
‘마물과 인간이 호흡을 맞추긴 어렵지. 게다가 두 녀석의 호흡은 그다지 맞지 않는군.’
돌로스의 정화의 힘이 신경 쓰이는지, 붉은 전갈의 공격 방식은 단순했다.
신성 마법이 떨어지는 시점에서, 헬무트는 다소 뻔한 방향으로 그것을 피했다.
붉은 전갈이 머리를 썼다면 그 뻔한 방향을 막아서 그를 공격했을 만도 하다.
하지만 놈은 혹시나 신성 마법의 영향권에 들어갈 위험성을 감수하고 공격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대신관과 붉은 전갈은 교차 공격을 벌였다. 그것도 어설프고 틈 많은 교차 공격.
그런 것에 당해 주기엔, 이쪽도 만만치 않다.
‘저 대신관이라는 자는, 전투 경험이 별로 없어. 붉은 전갈을 활용할 줄 모른다.’
대신관이라고 해 봤자 별거 없다. 신성력은 제법 강력한 것 같지만, 그 외에는 모두 수준 미달이었다.
대신관이라면 대마법사와 동급이라 생각했건만, 돌로스는 안티올처럼 함부로 할 수 없는 느낌을 주는 상대가 아니었다.
따지자면, 비전투형 연구실 마법사. 헬무트는 돌로스에 대해서 몰랐지만, 그 사실을 정확히 간파해 냈다.
‘슬슬 결론을 내야지.’
신관과 싸워 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간을 봤을 뿐이다. 더 시간은 끌 수 없다.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건.
‘신관을 죽이면 어둠의 싹이 반응할까.’
인간을 죽였을 때도, 구역질이 일었다. 아무래도 대신관의 죽음은 평범한 인간의 죽음과 같지 않으리라. 그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대신관을 살려 보낼 수는 없다.’
그는 헬무트를 봤다. 그리고 헬무트가 어둠의 싹을 가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저자는 다리언의 원수이기도 할 테니, 반드시 여기서 죽여야 한다.
‘마침 좋은 생각이 있으니.’
약간의 저항과 피해를 감수해야겠지만, 그 방법이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다.
헬무트는 싸늘하게 눈을 빛냈다.
*
“큭!”
루크 예거는 신음을 토했다. 그의 어깨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줄곧 버텨 내다가 한 번의 공격을 허용했다. 그 대가는 뼈아팠다.
출혈이 심하다. 하지만 막아 낼 수 없는 일격이었다. 어깨를 내주지 않았다면, 목이 잘렸을 터.
‘이쪽 팔은 이제 움직일 수 없다.’
한 팔로 상대해야 한다. 팔마 기사단장을!
언제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러나 루투스 키케로는 공세를 거두었다.
강맹한 기세는 여전했으나, 관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검을 늘어뜨려 쥔 채,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놀라워. 정말로 그분의 검술을 보는 것 같구나. 젊은 시절 그분은 딱 너 같은 모습이었을 테지.”
제가 사지를 내몬 자를 존중하는 듯이 말하면서 루투스 키케로의 눈빛에 섬뜩한 감정이 서렸다.
루크 예거는 그 감정의 정체가 뭔지 깨달았다. 그는 이를 악문 뒤 물었다.
“무엇 때문에, 검성을 증오합니까.”
루투스 키케로가 루크를 당장 처치하지 않은 건, 그동안 그의 부하였던 루크 예거에 대한 동료애나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루크 예거를 처치하며 충분히 즐기고 싶은 것뿐이다. 그 기저에는 뼈저린 증오심이 깔려 있었다.
‘어째서.’
루크 예거는 새삼 의문을 품었다. 팔마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대단한 자가, 검성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 그 후손에게 마저 드러낼 만큼, 증오를 품고 있는가.
루투스 키케로가 드러낸 것은, 지저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깊고 한 서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증오였다.
과거 루투스 키케로는, 대외적으로 검성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검성의 실종에 대하여 의심받지 않고 팔마 기사단장 자리를 차지한 것도, 그 오랜 세월 명성을 유지한 것도 그 까닭이었다.
의혹이 불거지기엔 그와 다리언 디페르트의 사이가 너무도 가까웠기 때문에.
그는 검성의 가장 충실한 부하였으며, 그의 오른팔이었다.
심지어 그의 조부마저도 루투스 키케로에 대해서 호평했다. 2왕자도 최근에 와서야 의혹을 꺼내기 시작했지만, 확신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무엇 때문이냐고?”
루투스 키케로는 비소를 지었다.
검성 다리언 디페르트는 배신의 그 순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왜 자신이 그를 배신했는지.
그럴 만하다. 그자는 다른 자들은 안중에도 없이 오만하니까.
순식간에 루투스 키케로의 기억이 과거로 미끄러졌다.
검성의 차갑고 엄격한 얼굴이 기억 속에서 뚜렷하게 떠오른다. 오랜 세월, 하늘처럼 두고 섬겨 왔던 얼굴이었다.
저주스러울 만치 증오에 찬 심정을 숨긴 채. 루투스 키케로는 그를 충실하게 섬겨 왔다.
그리하여 그의 인내는 결실을 봤다. 다리언 디페르트의 최후로서!
그의 증오는 타당했다. 검성은 그러한 최후를 맞이하여도 싼 자였다.
왜냐하면, 검성은 루투스 키케로의 긍지와 자존심, 검사로서의 모든 것을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짓밟았기 때문에.
루투스 키케로는 검성을 존경했고 그를 따랐다. 함께 사막의 마물에 맞서 싸워 왔다.
그보다 검성의 검술을 전수받기에 적합한 자가 또 있을까.
하지만 다리언 디페르트에게는 아들이 있었고, 루투스 키케로는 자신의 욕심을 접어야만 했다.
기회는 머지않아 찾아왔다. 다리언의 배부른 아들은 친자라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거머쥐었으면서도, 나약하게 버텨 내지 못했다.
그자가 사라졌단 소식이 들렸을 때, 루투스 키케로는 기뻐했다.
드디어 그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검성의 후계자. 그만큼 탐이 나는 단어가 없었다.
검성은 나이가 많았다. 그에겐 자신의 검술을 물려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약해져 있는 이때 적극적으로 피력한다면.
그러나 루투스 키케로의 기대는 곧 먼지만도 못한 것이 되었다.
‘제게 당신의 후계자가 될 영광을 주십시오.’
‘불가하다.’
‘어째서입니까.’
‘너는 내 제자가 되기엔 부족하다. 내 자식도 아니니 유감스럽게도, 검술을 전수할 수 없겠다.’
충격적이었다. 루투스 키케로는 바소르에서 명망 높은 검가의 자제였다.
또한 비록 검성의 것에 미치지는 못하나, 그의 재능은 발군이었다. 팔마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자리를 차지할 만큼.
면전에서 그의 한계를 결정짓는 말에,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모멸감을 느끼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재차 다리언 디페르트에게 간청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재능이 부족하다면, 노력으로 대신하겠으니, 부디.’
‘귀찮게 굴지 말거라. 너는 제법 실력 있는 녀석이지만 내 기준에 미달한다.’
‘비록 기사단장님 눈에는 미흡한 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다시 생각해 봐 주시면…….’
‘안 된다고 말했다! 네 재능이 한없이 모자라고 자질이 떨어지니 받아들일 수 없다! 두 번 말해야겠느냐?’
노성을 내지른 다리언 디페르트는 등을 돌렸다. 차가운 등이었다.
무릎 꿇은 루투스 키케로는 그 등을 보면서 절망감을 느꼈다. 다리언 디페르트는 철벽같았다.
검성은 그에게 검술을 전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정은 결코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으리라.
간절했기에 절망감은 더욱 강렬했다. 루투스 키케로를 좀 먹고 변모케 할 만큼.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하지만 그걸 느끼게 한 자는 검성. 루투스 키케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깨끗하게 바람을 접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충실하게 검성의 오른팔로서 행동했다.
그러니 무심한 다리언 디페르트는 그의 가슴 속에서 어떤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으리라.
아니, 루투스 키케로 자신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은밀히 손길을 뻗친 1왕자와 대면하기 이전에는.
‘자네 같은 재능을 가진 자가 영영 2인자로 남을 것이 안타까워서 그러네. 팔마 기사단에도 세대교체가 필요하지 않겠나. 키케로 가문에도 더없는 영광이 될 걸세.’
욕망이 넘실거리는 눈빛. 뻔하디뻔한 제안. 1왕자는 왕의 그릇이 되지 못하는 자였다.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쳐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을 받은 순간, 루투스 키케로는 깨달았다. 그의 가슴 속에 숨어 있었던 해묵은 원한의 크기를.
절망과 뭉개진 자존심, 그것이 한데 모여 그려 내는 증오를!
삭이고 묵혀 왔던 감정이었다. 이 기회가 아니면, 영영 끄집어내지 못하리라.
루투스 키케로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기로 했다. 비록 그 기회가 평생 그의 발목을 잡을지라도 상관없다.
‘당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려 주지.’
그가 겪었던 것과 같은 지옥 속으로!
루투스 키케로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