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7
16
헬무트
16화
“여자들은?”
에루고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벌써 여자만 셋이 죽었다. 멀리 간 것도 아니다. 마을 담장 근처에서 순식간에 물려갔다.
이렇게 놈들이 대담하게 움직인 적이 있었나? 마치 나호가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아는 듯이.
게다가 전보다 수가 늘었다.
‘예감이 좋지 않군.’
마물들이 이번 나호의 동면이 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하다.
농장의 안정화를 위해 요 몇 년간 얕은 잠에만 들었던 나호는 에루고에게 이번의 동면은 깊을 것이라고 경고해 뒀다.
뱀의 습성상 충분한 동면은 필수다. 이제까지 인간 농장에 신경을 쓰느라 너무 잠을 조금 잤으니 보충이 필요할 때였다.
불러낼 방법이 없진 않지만, 마기를 뿌리며 성질부리는 흉악한 뱀은 에루고 역시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웬만한 일로 불렀다간 홧김에 날 집어삼키고도 남을 놈이야.’
사소한 문제는 그의 선에서 해결해야 했다.
“여자들은 이제 괜찮습니다. 에루고 님의 마법진으로 강화된 벽을 뚫지는 못할 겁니다.”
“당분간 밖으로 얼씬도 못 하게 빗장을 걸어놔! 더 이상 여자들이 죽어선 안 된다.”
에루고가 명령했다.
“수가 더 줄어들면 쓸모없는 네놈들 입도 줄여 버릴 것이니 목숨 걸고 지켜라! 안 그래도 새끼 치는 것이 죄 사내란 말이지. 통 계집이 태어나질 않으니.”
사내가 더 인력으로 쓸 만하긴 하지만, 나호는 인간 암컷을 더 선호한다. 마물들에게 내줄 여자는 없다.
가축 이야기를 하듯이 셈하며 에루고가 혀를 찼다.
그때 문을 열고 달려 들어온 거한이 에루고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쿠궁!
쉰 목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룩스가 잡혀갔습니다! 추적대를! 에루고 님, 제게 맡겨 주십쇼!”
“마물한테 잡혀갔으면 이미 죽은 거다. 마을을 지켜라, 한스!”
잘라 말한 에루고가 냉랭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룩스는! 제 형제입니다!”
말을 더듬거리며 거한이 고개를 쳐들었다. 충혈된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룩스는 그의 형제였다. 폭행, 강간, 살해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파헤의 숲으로 쫓아내질 만큼 악당 형제였으나 두 사람 사이는 돈독했다.
에루고의 수하가 된 이후로 형제는 함께 그에게 충성해왔다. 하지만 에루고에겐 아무 의미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란 거냐?”
“구하러 가겠습니다!”
에루고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든 인간은 그의 뜻대로 용도에 맞게 쓰였다. 이것은 용납되지 않는 반항!
룩스를 잃은 건 에루고에게도 아쉬운 일이지만, 이미 죽은 놈을 찾겠다고 병력을 뺐다간 몇 놈이 더 죽을지 모른다. 그런 손실을 감수할 수는 없다.
“허락할 수 없다. 룩스도 물어가는 놈이다. 너도 따라가 죽겠다는 소리냐? 다른 놈들과 함께?”
“혼자라도 보내주십쇼.”
“한스, 네놈이 지금!”
노회한 얼굴에 분기가 서렸다. 하지만 룩스는 전사들의 우두머리. 혼자 가겠다는데도 붙잡으라고 명하면 다른 놈들이 따를까?
순간이라도 명령을 거스를 여지를 줘선 안 된다. 작은 불씨가 큰 불길이 되어 그를 집어삼킬 수 있으니.
‘좋지 않아.’
에루고는 오늘부로 그의 가장 강한 전사 두 명을 모두 잃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재수가 없다니!
‘룩스 그 쓸모없는 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지.’
보나 마나 방심해서 당했을 것이 뻔했다. 에루고는 치솟는 분노를 누르고 간신히 자비로운 표정을 지었다.
“내,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 그래, 룩스는 네 형제이니 정 그렇다면 뜻대로 하거라.”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부드럽게 말한 에루고가 등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한스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
“한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알았으니 가 봐라.”
에루고는 부하를 내보내며 미간을 구겼다. 한스와 룩스, 둘 다 죽었다고 봐야 한다. 죽을 줄 알면서도 보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기분이 잡쳤다.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군.”
반항하는 놈을 살려두는 건 다른 놈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 이 시기에!
‘빌어먹을 놈들.’
형제라고 해서 같이 죽을 건 없잖아? 곤란해졌다. 주요 전력인 룩스와 한스가 죽은 이상, 나호가 동면에 든 시기에 마을을 지켜 내는 일은 난항에 빠질 것이다.
“당장 그놈들을 대체할 만한 녀석이 없으니.”
쯧쯧 혀를 찬 에루고는 곧 처소를 나섰다. 다가오는 폭풍을 맞아 가축들을 지킬 방법을 연구해볼 참이었다. 이 마을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재산이니.
마법으로 기척을 숨긴 에루고는 연구실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에루고는 손실한 마법을 회복하거나 새로운 연구에 빠져들었다.
가뜩이나 귀한 인간들을 바깥에서처럼 실험체로 쓸 수는 없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마기로 가득한 파헤의 숲은 흑마법사에겐 천혜의 보고였다. 마물 하나 잡아다가 연구하는 게 더 실용적이다.
흑마법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 파헤의 숲에서 에루고는 잃어버린 마법을 약간이나마 되찾았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는 예전 수준으로 마법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봐야 이 빌어먹을 숲을 빠져나갈 순 없겠지만.’
어찌어찌 건진 명줄, 지금의 삶을 이어나가는 일은 흑마법사인 그에게도 순탄치 않았다. 그리고 오늘의 불운은 아직 끝나지 않은 터였다.
처소에서 가까운, 고작 오 분 거리의 연구실이다. 나호의 냄새가 잔뜩 묻어 있는 그를 덮치려는 간 큰 놈은 없을 테지만, 에루고는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룩스 녀석처럼 방심하다가 최후를 맞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하군.’
마물 때문에 모두가 날이 어두워지면 출입을 삼갔다. 기척에 예의 주시하며 걸음을 옮긴 그는 곧 목적한 곳에 다다랐다.
오직 그만이 들어설 수 있는 연구실 문 앞에 서서 에루고는 마법진을 가동했다. 철컥. 문의 잠금쇠가 풀렸다.
막 연구실로 들어서려는 그때, 등 뒤에서 훅 바람이 불어왔다.
‘돌풍인가.’
무심코 넘기려는 찰나, 퍽! 등 뒤에서 뭔가가 그를 덮쳐들었다.
연구실 안으로 엎어진 에루고는 눈을 부릅떴다. 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움직이지 마.”
목 아래에서 예기가 느껴진다. 에루고의 존재를 감지한 연구실의 불빛이 저절로 밝아졌다. 등 뒤에 서 있는 누군가의 존재.
마물은 아니다. 마물이라면, 흑마법사인 그에게 마기를 숨길 수 없다.
설마 농장에 속하지 않은 인간이, 이런 때에 그를 습격할 줄은.
‘이런 위협을 느낀 게 얼마만이지?’
에루고는 오랜만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노회한 흑마법사는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누구냐! 바라는 게 뭐냐.”
“파헤의 숲을 나갈 방법, 네가 안다고 들었어. 말해.”
‘대체 이제 와서 누가 그걸 찾는 거지?’
바닥이 비친 작은 그림자를 훑은 에루고의 눈이 슬쩍 뒤로 돌아갔다.
새카만 눈과 대조되는 달빛처럼 하얀 얼굴엔 반듯한 이목구비가 아로새겨져 있다. 계집이라고 해도 착각할 정도로 곱고 귀티 나는 얼굴은 무표정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의 소년. 하지만 에루고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버릇없는 놈이로군. 기껏해야 열서너 살밖에 안 되었을 녀석이 말버르장머리 하고는!”
헬무트의 모습을 확인한 탁한 푸른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교활한 눈빛. 빠르게 계산속이 들었다.
‘어린 녀석이니 잘 구슬리면 허점을 보이겠지.’
상대가 방심한 순간, 에루고는 왜 자신이 흑마법사인지 그에게 알려 줄 것이다. 헬무트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적에게 상관 있나? 대답해.”
“다리언이 제자를 키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게 바로 네놈이로구나.”
“숲을 나갈 방법이나 말해. 넌 알고 있잖아.”
“어째서 내가 네게 그걸 말해 줘야 한다는 거냐?”
슥. 파랗게 번뜩이는 검날이 지체 없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말하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내가 죽으면 나호 님이 동면을 깨고 나타나실 테고, 그럼 너도 죽는다. 인간 주제에 이 권역의 지배자 나호 님에게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호는 죽은 목숨도 살릴 수 있나? 내 걱정할 것 없이 넌 반드시 죽어. 수작 부릴 생각 마.”
에루고는 상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고압적으로 내뱉는 목소리엔 누군가의 목숨을 위협하는 데에 대한 동요를 엿볼 수 없다. 초조해한다거나 떨고 있지도 않다.
어떤 거래나 협상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한 차분한 냉정함.
‘속을 읽기 어려운 녀석이야.’
파헤의 숲에 사는 인간이면서 그의 가축이 아닌 몇 안 되는 인간. 그 인간이 지금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다리언이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을 건져냈지?’
말도 안 되는 위험 요소다. 하지만 에루고는 파헤의 숲에서 그 어떤 위험 요소도 통제해 냈었다. 그 나호조차도 회유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이 숲에서 그걸 아는 자는 나밖에 없다. 나를 죽인다면 넌 영영 밖으로 나갈 방법을 알지 못해.”
“마법사들은 기록을 좋아하는 족속들이니 네 처소를 뒤져 보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난 그 과정을 간단하게 만들고 싶은데.”
나호의 영역에서 오래 지체할 수 없다. 기록을 찾더라도 읽을 수 있을지 모르니, 헬무트는 무조건 에루고에게서 답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무조건.
헬무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난 널 살려 둘 수도 있어. 하지만 마법을 쓰지 못하는 너를 여전히 나호가 부하로 둘까?”
이미 한 번 부서진 몸이라도 이처럼 마기로 충만한 파헤의 숲에서는 에루고도 마법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혀를 뽑는다거나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면 마법사는 마법을 쓸 수 없다. 그것은 파헤의 숲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에루고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린 녀석이지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