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71
170
헬무트
170화
외전-그들의 방학
“미하엘은 연락도 없고…… 참. 대체 그 더운 나라에서 뭐하는 건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저택의 호화로운 응접실이었다. 한 여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넘실거리는 금발과 푸른 눈, 귀부인의 전형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그녀는 도무지 중년의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마주 앉은 검은 머리의 소녀가 찻잔을 기울이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미하엘은 제가 떠나면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실 거 없어요.”
“샤를로트!”
“사실이잖아요. 미하엘은, 저를 좋아하지 않는 걸요. 그러니 모처럼 볼 수 있는 방학 때 자리를 피한 거겠죠.”
“그런 소리 말 거라. 그 아이는, 바소르의 무투회에 인재를 찾으러 간 거야. 우리 가문을 위해서.”
여인은 엄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리고 미하엘은 그냥 네가 부러워서 그런 것뿐이야. 그 애는 몸이 약하잖니.”
“알고 있어요.”
“네가 이해해 주렴. 너는 건강하고, 아카데미도 다니고 있잖아. 미하엘은 아직도 종종 아프단다. 너 혼자 아카데미에 가 있으니 그동안 얼마나 쓸쓸했겠어?”
“……네, 어머니.”
흡사 탓하는 듯한 말에 씁쓸한 미소가 샤를로트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보다 너도 이제 곧 돌아가 봐야 하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니?”
그간 미하엘을 걱정하느라 방학을 맞아 돌아온 샤를로트에게 한 톨의 관심도 주지 않던 어머니였다. 샤를로트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배 속에서 미하엘과 함께 나온 순간부터 그래 왔다고 해도.
병약한 미하엘과 건강한 샤를로트. 거기서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샤를로트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검술 학부 1학년 수석인 거 아시잖아요.”
여인은 마치 처음 알았다는 것처럼 말했다.
“어머, 대단하구나. 미하엘도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었다면, 좋은 학생이 되었을 텐데.”
“……그보다 어머니, 우리 아카데미 검술 학부에 헬무트라는 선배가 있는데.”
거기까지 말한 샤를로트는 슬쩍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오로지 연락이 되지 않는 미하엘에게만 신경을 빼앗긴 기색이었다.
“평민인데, 실력이 대단히 뛰어나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지. 알다시피 우리 가문의 기사 중에서도 평민 출신이 꽤 있단다.”
그녀의 어머니는 여상하게 말을 받았다. 뭔가를 더 묻기엔, 여인은 헬무트란 이름을 듣고도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신가?’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샤를로트는 검술을 수련하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방에 홀로 남은 여인의 표정이 서서히 변화했다.
‘헬무트라고.’
그녀의 얼굴에 착잡함이 내려앉았다. 먼 과거로부터, 단숨에 기억이 끌어 올려졌다.
고개를 떨군 그녀는 성호를 내리그으며 마음을 다졌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
널찍한 수련장. 한 소년이 땀에 젖은 이마를 훔쳐 냈다. 그는 목검을 내려 두고 하늘을 쳐다봤다. 하얀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이제 곧 방학도 끝인가.”
바덴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소년, 아스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학 내내 검술에 정진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만족할 만큼 성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필 괴물 같은 녀석이 나타나 가지고.’
헬무트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른 아스카는 괜스레 바닥을 툭 찼다.
그리워할 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가 떠올랐다. 아마 헬무트도 방학 동안 놀고 있진 않았을 터.
‘그래도 2학기 때는 다를 거야!’
아스카는 결의를 다졌다.
“아스카.”
누군가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딘지 품위가 느껴지는 중년의 남자였다.
젊은 시절 얼굴을 가늠할 수 있는 미남. 누가 봐도 높은 신분의 소유자다.
그와 아스카는 인상이 달랐지만, 서로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함께 서 있으면 그들이 한 핏줄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을 만큼.
“이번 학기에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들었다. 그에 만족하지 말고 정진하거라.”
덤덤하게 말하는 남자를 마주한 아스카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아스카는 싱긋 웃었다.
“물론이죠. 아, 혹시 아카데미에서 제 별명 들어 보셨어요? 검술 학부의 미친개라고 하는데.”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아, 알고 계셨구나아.”
비꼬듯이 말꼬리를 올린 아스카가 도발적으로 웃었다. 아카데미에서 시비를 걸고 다니던 그의 표정과 똑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평민 흉내를 내고 있다고 들었다. 재미있더냐?”
“네 정말 재밌네요. 적성에 딱이에요.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고 싶을 만큼.”
저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꽂혔다.
“아스카!”
청순한 인상의 귀부인이 어느덧 가까이 와 있었다. 아스카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잖니. 이렇게 날 속상하게 할 거니?”
아스카는 슬슬 고개를 피했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에는 적응을 잘하는 듯하여 다행이다.”
“그렇죠, 뭐 전 잘 지내고 있다고요. 이젠 사고도 안 치고, 쳤나?”
“귀족들과 자꾸 시비를 붙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럼 평민과는 시비를 붙어도 좋다는 소린가요?”
“아카데미에 적응했으면, 이제는 네 위치에 어울리는 친구를 찾아보는 것이 어떠냐.”
아스카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개소릴하시네!”
그의 어머니가 혼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카! 아버지께 무슨 말버릇이니!”
“사람은 제각기 걸맞은 자리가 있는 법이다. 너도 그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아아, 어련하시겠어요. 충고 참 감사하게 받죠!”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아스카는 검을 집어 들었다.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가는 그를 말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방학 때마다 돌아와야 하는 이곳은, 그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다.
“지긋지긋하군. 빨리 떠나고 싶어.”
아스카는 중얼거렸다. 아마 그 전에, 남자의 눈치를 보며 눈물짓고 있을 마음 약한 어머니를 달래야겠지만 말이다.
*
책이 가득 꽂힌 서재였다. 아레아는 여느 때처럼 독서에 몰두하고 있었다.
방학을 맞이한 이후로도 그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빨리 힘을 쌓아서, 벗어나야 한다. 그 생각이 지칭하는 대상이 마침 모습을 보였다.
“아레아.”
“용건이 뭐예요?”
두꺼운 마법서를 읽던 아레아는 비딱한 얼굴로 저를 부른 여인을 쳐다보았다. 아레아의 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한 줌의 호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여인은 태연하게 웃었다.
“네, 그 룸메이트 말이다. 엄청나게 잘생겼다던데?”
아레아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그래서, 관심이라도 있으세요?”
나이 차를 생각하시지. 딱 그런 눈빛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을 부도덕한 인물이기도 했다. 대마법사 하이케. 신전의 공적.
그녀가 신전의 공적으로 지명 당한 이유는, 범죄를 저질러서나 흑마법에 손대서가 아니라지만, 그 이유조차도 경멸스러웠다.
아레아가 그녀를 좋아하게 될 날은,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아무리 그녀가 아레아의 스승이라도.
“아니, 관심은 무슨.”
후후 웃으며 대답한 여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길게 늘어뜨린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
심지어 그녀의 얼굴은 아레아와 매우 유사했다. 하지만 좀 더 요염하고 성숙해 보인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몸매조차도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육감적이었다.
“방 배정이 잘 된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혹시 당신이 장난친 거예요?”
아레아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떠올렸다. 어쩐지 학장이 공정성이 뭐니 별 핑계를 다 갖다 붙였다고 했다.
꼿꼿한 학장을 제 손안에 놓고 굴리는 건, 이 여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남자애와 함께 방을 쓴 기분이 어때? 색다르지 않니?”
“내가 당신처럼 되길 바라나 본데, 꿈도 꾸지 마세요.”
차갑게 내쏜 아레아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룸메이트와 친하게 지낸다던데?”
“전혀.”
서재를 빠져나가는 아레아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서렸다.
‘그 녀석, 모습을 변하게 해 주는 아티팩트를 요구했다지?’
학장이 미심쩍게 여기고 전해 준 사실이었다. 그 소년의 아티팩트는 아레아의 것처럼 성별을 바꿔 주는 물건은 아니지만 속성이 유사했다. 그게 우연일 것 같지는 않다.
하이케의 감은 제법 좋았다. 알고도 모른 척해 준다면 둘의 사이가 제법 좋다는 것이리라.
아레아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룸메이트를 내쫓을 만했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 역시 그 사실을 방증했다.
‘아레아는 나를 닮았어. 본인은 부인하지만.’
그 타고난 마력도, 지능도 미모도 쏙 빼닮았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만큼. 그녀가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제 어린 시절을 보듯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재미있는 일이야. 좀, 움직여 볼까.’
묘한 꿍꿍이를 안고 하이케는 미소 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자라는 걸 숨겨야 하는 아레아의 사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의 재미만이 중요할 뿐.
몇 권이나 되는 책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아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마녀 찝찝한데.’
괜히 헬무트에게 수작을 부리진 않을지 걱정이다. 하이케가 저 젊고 아름다운 몸뚱이로 얼마나 많은 남자를 파멸로 몰아넣었던가. 그녀가 대마법사라는 것은 가히 재앙이었다.
‘돌아가면…… 녀석을 멀리해야겠어. 소원이 남아 있지만, 당분간만이라도.’
아레아는 1학기 내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결심을 재차 떠올렸다.
1학기 때는 룸메이트라서 어쩔 수 없었지만, 학기가 지나 방이 갈릴 테니 가능한 일이리라.
곧 입에서 어쩐지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이 녀석, 위험할 때 연락하랬다고 정말 방학 동안 연락 한 번을 안 하네.”
헬무트라면, 단순하게도 위험에 빠지지 않았기에 연락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것을 아레아도 알았다.
서운?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아레아는 왠지 저조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다시 만나게 될 터였다. 바덴의 아카데미에서.
*
풍성한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 앞에 앉은 시안은 포크를 들었다. 모든 음식이 그의 입맛에 꼭 맞았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단란한 식사자리였다. 온화한 인상의 어머니가 물었다.
“시안, 어느새 방학도 끝이지? 곧 아카데미로 돌아가겠구나.”
그의 아버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작년만 해도 아카데미가 지루하다면서 내내 투덜거리더니. 이번엔 그렇지 않구먼.”
“요샌 좀 재밌어요. 작년에 비해서?”
시안이 씨익 웃었다. 어린 동생이 꺼억 트림을 했다. 어머니가 재빨리 아이의 입가를 훔쳐 주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학부모답게 닦달했다.
“그럼 수석 자리를 좀 차지해 봐. 3학기 연속 차석이라니, 아깝지 않니? 고작 1순위 차이잖아”
“그건 무리예요. 제 위에는 엄청난 천재 녀석이 한 명 있다고요.”
“너도 천재잖니.”
“음……. 다른 급의 천재?”
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곧 포크를 탁 내려놓으며 투정을 부렸다.
“아니, 차석인 아들이 있으면 자랑스러워 하시라고요! 수재만 모였다는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차석 자리를 차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수석을 못한다고 너무 하시네요!”
시안의 아버지가 헛기침했다.
“아니, 누가 안 자랑스럽대? 아쉬우니까 그렇지.”
“그래, 그래. 우리 우등생 아들.”
시안의 어머니가 그의 등을 시원하게 토닥였다. 4인 중 유일하게 화목한 환경 속에서 방학다운 방학을 보내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