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72
171
헬무트
171화
11장 2학기의 시작
헬무트가 바덴으로 돌아온 건, 개학까지는 고작 사흘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물 토벌을 다녀오느라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지체됐다. 또 화이트의 상태를 살피다 보니 이전처럼 강행군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내 모습으로 돌아오니 낯설군.’
헬무트는 바소르의 국경을 벗어나면서부터 변장을 풀었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낯설어진 터였다.
그가 바덴에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쿠드로 저택이었다.
헬무트에게 바소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에단 쿠드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바소르도 큰일을 치렀구나.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져서 다행이다.”
“진실은 밝혀지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헬무트는 2왕자의 의견에 대해서 말했다. 입을 다물기로 했지만, 에단 쿠드로에게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에단 쿠드로는 헬무트가 하이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헬무트가 한 말이다.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다만, 다리언 님의 후손도 입을 다무는 일이니 내가 뭐랄 수는 없겠지.”
에단 쿠드로 역시도 입을 다무는 데 순순히 동의했다. 루크 예거도 그것을 바란다면, 그로서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나저나 신전이 그런 일까지 벌이다니. 루멘의 이름 아래 거침없이 무도한 짓을 하는구나. 그들은 마법사나 기사가 많은 우리 바덴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
에단 쿠드로도 신전에 대해서 더욱 안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 듯했다. 그건 헬무트에게 긍정적인 일이었다.
“무투회 우승이라니, 큰일을 해냈어.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바소르 무투회의 우승자가 나왔다고 밝히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야.”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도 아닌 걸요.”
그저 마물 토벌에서의 공로로 하이드에게 우승 상금을 내린다는 공표만 작게 났을 뿐이다.
사실상 올해의 바소르 무투회 우승자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결승전이 치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소르에서 무투회는 아주 중요한 행사지만, 바소르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신경 쓰지 못하리라.
슬슬 바소르에서는 루크 예거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검성의 후손이 나타났다며 떠들썩할 테니까.
“다리언 님의 후손이 있었다니, 그도 놀랍구나. 그는 어떻더냐.”
“다리언을 닮았어요. 뛰어난 검사죠.”
“그래, 잘 된 게지…….”
에단 쿠드로는 감회가 서린 얼굴로 꾹 눈을 눌러 감았다. 오래전, 그를 구해 준 다리언 디페르트의 모습을 기억 속에서 떠올려 보는 것처럼.
그는 곧 화제를 바꿨다.
“그보다, 빨리 새 학기 준비를 해야겠구나. 얼마 남지 않았어.”
“네, 그렇죠.”
방 배정은 모두 끝난 상태였다. 짐은 보통 늦게 돌아올 걸 대비해서 미리 빼놓곤 한다.
하지만 헬무트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늦게 돌아올 줄 몰랐다. 에단의 말에 따르면 헬무트의 방은 바뀌었으나 그의 짐은 아레아가 맡고 있다고 했다.
아레아는 그대로 그 방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법 학부 수석이라 독방인가.’
검술 학부 수석인 그도 독방에 배정될 터였다. 왠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그는 바로 방 배정을 확인했다.
“내 방은…… 바로 아레아 옆방이잖아?”
무슨 조화인지 그렇게 되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옮기는 것도 간편할 터였다.
곧 기숙사에 나타난 그를 본 학우들이 인사를 건넸다.
“여어, 헬무트. 이제야 바덴에 온 거야?”
“헬무트, 오랜만이야.”
“방학 동안 잘 지냈어?”
개중에는 좀 예리한 녀석도 있었다.
“너 살이 좀 탄 것 같은데 어디 더운 나라라도 갔다 왔냐.”
“햇볕이 강한 나라였지.”
헬무트는 건성으로 대꾸하고 바로 제 방의 열쇠를 찾아 아레아의 방으로 향했다.
아레아는 기숙사에서 머무는 것을 선호한다. 마법 학부 건물로 향하지 않았다면 기숙사에 있을 터였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이유 모를 긴장감이 스몄다. 꼭 강한 적과의 전투를 앞둔 듯한 그런 느낌.
아니, 다른가? 아레아의 방을 찾아가는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헬무트로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나야.”
문이 하도 확 열려서, 헬무트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했다.
문틈으로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보랏빛 눈동자였다. 맑고 선명한,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았다.
헤어진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몇 년의 세월이 지난 듯하다.
아레아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미묘하게 인상이 변화했다. 마법을 덮어쓰고 있어도, 헬무트는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아레아의 입술이 움직였다.
“헬무트.”
그들은 잠시 얼어붙은 듯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찌르르한 전류와 함께 왠지 모를 정적이 흘렀다. 이상한 감각.
‘또 심장이…….’
아레아의 마력에 어둠의 싹이 반응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것이 헬무트가 세운 새로운 가설이었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헬무트였다.
“짐을 찾으러 왔어.”
“아, 짐? 그래.”
무심코 헬무트를 안으로 들이려던 아레아는 곧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너, 나를 보고 할 말이 그것뿐이야?”
헬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랜만이야……?”
이 말이 맞나. 하려던 말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레아를 만난 순간 그 모든 것이 하얗게 변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됐어,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어?”
방안은 예전과 비슷했다. 헬무트의 짐은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헬무트는 제 짐을 빠르게 수습했다. 책상 아래에 놔뒀던 상자에 밀어 넣으니 그럭저럭 다 들어갔다.
아레아는 묵묵히 할 일을 하는 그를 보며 투덜거렸다.
“새카맣게 타선, 왠지 짐승 같아졌어.”
납득할 수 없는 지적이었다. 헬무트는 약간 그을린 정도이지 그렇게 타진 않았다.
“너, 근데 키가 좀 큰 것 같아.”
아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보니 헬무트의 머리는 전보다 더 높이 있었다. 눈높이가 절로 올라갔다.
“아, 네가 작아진 게 아니었군.”
헬무트는 중얼거렸다. 어쩐지 아레아가 좀 자그맣다고 생각했다. 마법 실험의 후유증이 아닌가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레아는 당연히 인상을 썼다.
“만나자마자 짐을 내놓으라더니, 이제는 시비야?”
“시비는 아니고.”
헬무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는 남자보다 키가 작다. 그러니 아레아는 이보다 별로 커지지 않을 것이다. 반면, 그는 쑥쑥 자랄 테고.
그는 잠깐 멈칫거렸다. 상자를 들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레아가 먼저 물었다.
“네 방은 어디야?”
“바로 옆 방.”
“그래? 뭐야. 그러면 짐을 옮기기 쉽겠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양쪽 다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운데, 그렇다고 딱히 할 말이 없다.
“방학 동안 뭐하고 지냈어?”
“그냥…… 마물도 잡고, 검술도 수련하고.”
뻔한 질문에 돌아오는 것은, 숨기는 것 가득한 답변뿐. 서로 터놓고 이야기할 사이가 아니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여전히 비밀을 싸안고 있다.
“그 팔찌, 잘 끼고 있지?”
“아아, 물론.”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이제는 방을 나설 시간이었다. 새로운 방을 청소할 차례였다.
마법사인 아레아가 있을 땐 방의 청결이 마법으로 완벽하게 유지되었기에 청소 같은 건 할 필요 없었지만, 홀로 방을 쓰게 된 지금은 달랐다.
‘방 상태를 봐서 심각하면 사람을 써야겠군.’
결심한 헬무트는 인사를 남겼다.
“그럼 나는 이만.”
그가 방을 나서려던 그때 불쑥 아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이번 학기에, 소원 모두 청산할 것 같은데.”
“……생각해 놓은 게 있어?”
헬무트도 아레아에게 두 개치의 소원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뭔지 불안해진다. 아레아라면 예사로운 대가를 요구하진 않으리라.
‘마물 사냥 같은 걸 요구하면 곤란한데.’
되도록 마기의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 이번 바소르에서 건진 소득은 살인을 했음에도 어둠의 싹이 자라긴커녕 오히려 줄었다는 것.
주기적으로 신관에게서 신성 마법을 받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둠의 싹을 들키면 안 되니 실행할 수는 없겠지만.
“뭐, 곧 알게 될 거야. 그래서 내가 하려는 말은,”
아레아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서비스로 청소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는 소리야.”
마법으로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라지만, 아레아에게선 드문 호의였다.
그리고 아레아의 드문 호의는 대개 헬무트를 향해서만 발휘되었다.
헬무트의 입장에서도 그쪽이 편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반대로 제의했다.
“……그럼 다음에 함께 시내에서 식사하겠어? 전에 너와 갔던 거기.”
어차피 사람을 써서 청소하려면 돈이 든다. 아레아와 식사하고 대가를 치르는 건 나쁘지 않았다. 더 빚을 만들어두면 곤란하기도 하니까.
헬무트도 주머니가 넉넉해졌다. 그는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를 만큼 엄청난 재산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제는 아레아가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꿀리지 않을…… 그건 자신이 좀 없지만.
아레아가 생긋 웃었다. 시야가 환해지는, 눈이 호강하는 미소였다.
“그래.”
헬무트를 멀리하기로 한 결심은 또 어디론가 날아간 상태였다.
*
기숙사를 정리하고 오랜만에 개인 수련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여어, 헬무트! 자식, 반갑다! 우리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지?”
헬무트는 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보지도 않고 바로 알아챘다.
“시안.”
“그래, 어? 너 좀 탔다.”
인사해오는 시안도, 키가 조금 컸다. 다들 방학 동안 조금씩 커서 오는 모양이다. 성장기니까.
단지 그는 방학 동안 잘 먹고 잘 논 모양으로, 볼때기에서 윤이 자르르 흘렀다.
“다들 그 소리 하는군.”
이전의 헬무트는 새하얀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과 눈이 두드러지는, 귀공자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살이 좀 탄 지금의 모습도 나쁘진 않았다. 색달랐다. 좀 더 강인하고 검사다워졌다고 해야 할까.
단지 무게감이 더 느껴져서 그 때문에 거리감은 들었다.
“탔으니까. 바덴에는 왜 이리 늦게 온 거야? 난 네가 자퇴하는 줄 알았잖아. 에단 교관님도 네 소식은 모르시고.”
미하엘 같은 수상한 녀석을 끼고 있다 보니 혹시나 추적당할까 봐 에단에겐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에단도 그간 속을 좀 태운 듯했다.
헬무트는 짤막하게 답했다.
“말이 아파서 쉬엄쉬엄 왔어.”
화이트는 건강을 거의 회복했다. 애초에 튼튼한 놈이었다.
“그래? 너라면 아픈 말은 그냥 버려두고 새 말로 갈아탈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더 동물을 아끼는 녀석이었군.”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뜬 시안이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이번 학기도 잘 해 보자.”
가볍게 손을 맞잡자, 시안이 양손으로 부둥켜 쥐고 호들갑을 떨었다.
“와, 손 단단한 거 봐. 꽉 쥐면 누구 손목이 부러지겠네. 역시 검술 학부 수석님! 이젠 아레아와 분리되어서 독방을 따로 쓴다지? 맨날 눈치만 보다가 떨어져 있으니 아주 천국 같겠어.”
“…….”
왜 당연히 헬무트가 아레아와 방을 함께 쓰기 싫어한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헬무트는 굳이 반박하는 대신 물었다.
“그보다 아스카는 어딨지?”
시안을 보니 그가 생각났다. 보통 둘은 철썩 붙어 있지 않던가. 아직 기숙사로 돌아와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스카였다.
“그 녀석이야 진작 바덴에 왔지. 요새 수련장에 처박혀서 살던데? 오늘도 거기 있을 거야. 이번 학기는 너도 좀 긴장해야 할 걸. 아, 그리고 아스카 보면 놀랄지도 몰라. 그 녀석 좀 많이 변했거든.”
재잘대는 시안을 뒤로 하고, 익숙한 기척을 느낀 헬무트가 몸을 돌렸다.
마침 그 아스카가 기숙사로 돌아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