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73
172
헬무트
172화
헬무트는 일순, 낯선 사람과 마주한 기분을 느꼈다.
‘아스카?’
저 흔치 않은 푸른 머리카락. 눈 밑에 박힌 점. 분명히 아스카다.
하지만 일단 키가 달랐다. 덩치 큰 놈들이 많기로 소문난 검술 학부에서 훤칠하다는 표현을 붙일 정도는 아니지만 그새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은 큰 것 같았다. 놀라운 성장 속도다.
실력 또한 성장을 이룬 듯, 그의 기운은 좀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헬무트의 처음 생각처럼 방학 동안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헬무트는 팔마 기사단장이라는 대적을 만나 싸웠으므로.
“여어, 헬무트. 넌 무슨 노동을 하고 왔냐. 그렇게 그을리게.”
그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헬무트는 의심스럽게 물었다.
“넌 마법약을 복용한 건가.”
“뭔 소리야? 아, 키? 우리 집안사람들은 원래 몰아서 훅 큰댔어. 나는 앞으로도 클걸. 다들 키가 크다고 하니까. 아마 너보다 더 커질지도?”
젖살도 줄어 좀 더 남자다운 인상이 된 아스카는 왠지 으쓱거리며 말했다. 시안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귀여운 맛이 사라졌어. 그게 네 성격을 덮어 줄 유일한 장점이었는데.”
“뭐라고?”
아스카가 눈을 부라렸다. 그러다가 그는 피식 웃었다.
“하긴 1년만 지나면 넌 완전 땅꼬마가 되어 있을 테니까. 아레아도 마찬가지고 말이지.”
“땅꼬마라니!”
시안이 투덜거렸다. 슬쩍 제 머리를 매만지는 게 신경 쓰이나 보다.
“나도 클 거야. 우리 집안도 작은 키는 아니거든!”
“누가 뭐래냐. 그렇게 불안해할 거 없다고.”
으스대는 아스카한테 시안이 눈을 흘겼다. 투닥거리는 그들을 보면서 헬무트는 새삼스레 실감했다.
‘돌아왔구나.’
바소르에서 있었던 사건도, 사막에서의 일도 어느덧 꿈처럼 아득했다.
전쟁 통에 있다가 평화 속으로 돌아온 듯이 낯설었다.
어쨌든 모처럼 수련할 시간이다. 그간 천천히 바덴으로 향하느라 검을 붙들 시간이 꽤 있었지만, 그레타 아카데미의 수련장 쪽이 훨씬 양호한 환경이다.
“난 이만.”
붙잡는 아스카와 시안을 떨치고 가려던 헬무트는, 시안의 말에 문득 멈춰 섰다.
“헬무트, 그러고 보니 너 교양과목 뭐 선택했어? 그거 기한이 오늘까지잖아.”
등골이 오싹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또 머리 아픈 과외는 사절이었다.
“안 신청했어? 참 넌 바덴에 최근에 왔지. 어제인가?”
“오늘.”
“완전 마지막 날 왔네! 빨리 신청해. 검술 학부 수석이라 최우선 선택권이 있을 건데. 또 마법의 이해 같은 거 신청해서 고생하지 말고.”
“그거 말하지 말지.”
아스카가 괜스레 투덜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 즉시 헬무트는 일정을 수정했다.
*
다행히 마감 시간 10분 전이었다. 헬무트는 가장 점수 받기 쉽다는 교양 과목을 검술 학부 수석의 권리로 선점했다.
그레타 아카데미는 모든 게 성적순이었다. 성적이 좋으면 모든 혜택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그나저나 내가 방학 동안 책을 읽긴 읽었던가.’
헬무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미하엘이 전해 준 팔마 기사단 관련 서류를 읽어본 게 책 비슷한 걸 읽어 본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너무도 무에 치우친 방학을 보냈다. 저도 모르게 편의를 추구하여.
아레아 같은 녀석이었다면 바소르 같은 나라를 가서도 도서관부터 찾았으리라.
하지만 헬무트는 자연스럽게 뇌리에서 책 같은 걸 배제했다.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닌데, 역시 적성에 안 맞아.’
적성에는 안 맞으나, 적성에 안 맞는 소양까지 갖추게 만드는 게 아카데미 교육이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란 곳은 가정교사를 따로 두기 힘든 평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배움의 터전이기도 했다. 헬무트에게도 그랬다.
헬무트가 수련은 그렇다 치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접수처를 나오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샤를로트였다. 우연히 마주친 듯 살짝 놀란 표정이다.
헬무트는 새삼 제 원래의 방학 계획을 상기했다.
‘샤를로트의 뒤를 밟으려고 했었지.’
바소르의 무투회란 새로운 일정이 생겨서 그 계획은 후로 미루어졌다.
하마터면 추적당할 뻔했던 샤를로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이 좀 타셨네요.”
“아아, 그렇지.”
그렇게 탔나 했다. 약간 그을린 것뿐인데, 전이 워낙 하얘서 그런지 다들 한마디씩 한다.
“더운 나라를 갔다 오셨나 봐요. 우리 가문에서 바소르의 무투회에 갔다 온 사람이 있는데, 혹시.”
헬무트는 최대한 태연하게 부인했다.
“아니야.”
생각보다 예리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샤를로트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의심하지 않고 말했다.
“그보다 선배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방학 전에 저에게 하신 질문요. 왜 그런 질문을 하셨던 건지요?”
‘그 질문이라면…… 마그리트 이레인.’
헬무트는 대수롭지 않은 척 연기했다. 그도 연기력이 늘었다.
“……그냥 예전에 우연히 본 귀부인인데 너와 닮아서.”
“아아, 그렇구나.”
대답하면서도 샤를로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그리트와 샤를로트는 별로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 때문에 샤를로트는 어머니가 미하엘을 편애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곤 했다. 자신과 닮은 자식을 더 아낀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녀는 곧 뭔가를 깨달은 듯이 말했다.
“그럼 역시 선배는 귀족이로군요.”
헬무트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말은, 그녀의 어머니가 귀족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신분의 사람이란 소리다. 귀족이라고 해도, 상당히 높은 신분.
헬무트는 태연하게 지적했다.
“아카데미 규정상 그런 걸 이야기해서는 안 될 텐데.”
“아, 아아! 그렇죠! 제가 실수했어요.”
샤를로트가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돌아봤다. 혹시 교수가 들었을까 봐 신경 쓰는 눈치였다. 고지식한 그녀답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안녕히.”
고개를 꾸벅 숙인 그녀가 재빨리 등을 돌렸다.
헬무트는 잠시 그녀의 등을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음 방학 때는 알 수 있겠지.’
이미 하나의 일을 해결했다. 헬무트는 조급해하지 않을 참이었다.
반면 샤를로트는 어느 순간 내딛던 걸음을 문득 멈추었다.
‘그런데 마그리트 이레인, 그 이름은 어머니의 처녀적 이름인데?’
어째서 헬무트는 그녀의 어머니를 처녀적 이름으로 기억하는가. 어머니가 결혼한 지는 이미 20여년 가까이 흘렀건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샤를로트는 금세 의문을 지워버렸다. 새 학기가 코앞까지 다가왔고, 그녀도 바빴다. 사소한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다음날, 기숙사에서 처음으로 맞는 새벽부터 수련장에 갔다 온 헬무트는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오늘은 할 일이 많군.’
개학하면 시내에 마음껏 나다니지도 못할 거다. 그러니 살 물건이 있다면 지금 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았다. 마침 시내에 볼일도 있으니까.
그때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문을 열자 보인 건 시안과 아스카였다.
“헬무트, 너 우리와 시내에 나가지 않겠어? 쇼핑도 하고 좀 놀러 다닐 참인데.”
헬무트는 칼같이 거절했다.
“아니. 약속이 있어.”
“뭐야, 에단 교관님인가. 그래, 알았어.”
멋대로 결론을 내린 시안이 등을 돌렸다. 아스카 역시도 그를 따라갔다. 새 학기를 맞이하고서도 쿵짝이 잘 맞는 둘이었다.
‘마주치는 건 아니겠지.’
사실 마주쳐도 상관은 없다. 거짓말 한 건 아니니까.
그는 곧 채비를 마치고 나와 아레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응, 나갈게.”
은발의 아레아가 문밖으로 걸어 나오자 눈앞에 환한 빛이 드리우는 듯했다.
어젯밤에 잡힌 약속이었다. 교재를 사러 나가는 김에 둘이 함께 식사하기로 한 것이다. 별로 대수로울 건 없는 약속이었다.
그런데 왠지 불편한 감각이 있었다. 아레아의 표정도 미묘하게 경직되어 있다.
‘체했나?’
헬무트는 제 배 쪽을 쓸어 보았다. 그의 위장은 먹는 모든 것을 소화해냈다. 아마 돌덩이를 씹어 삼켜도 별문제 없을 거다.
아레아만 만나면 그는 생전 처음 겪는 증상에 시달렸다. 꼭 허약체질이 된 것처럼.
‘역시 아레아가 문젠가. 멀리해야 하는지도.’
헬무트는 새삼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아레아를 쳐다봤다.
사람이 이렇게 빛이 깃든 것처럼 반짝반짝한 것도 좀 이상했다. 미하엘도 금발에 화려한 녀석이긴 했지만, 아레아 만은 못했다.
“뭐해? 가지 않고.”
픽 웃으며 올라가는 입꼬리가 예뻤다. 헬무트는 예쁘다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실감했다.
머리로만 알던 단어를 알아 가는 것. 앎이라면 앎이니 좋은 일이겠지만, 그보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거기서 빠져나가는 건 강물을 거스르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어차피 청산해야 할 빚이 있다.’
그 이후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도망치는 것도 우스운 일.
“그래, 가자.”
헬무트는 의지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나란히 기숙사를 나섰다.
음식값이며 물건 하나하나가 비싼 바덴의 고급 상점가에 이르자 아레아가 권했다.
“오늘은 저번에 갔던 곳 말고 다른 데 가 볼래? 저기도 유명하거든.”
“좋을 대로.”
어차피 헬무트는 아는 게 없었다. 가서 돈만 내면 그만이다.
아레아를 따라 레스토랑에 발을 들인 그들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법 음향 시설까지 갖추어 놓은 고급 식당이다. 하얀 테이블보 위에는 자리마다 푸른 비단천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은식기가 차려져 있었다. 의자는 푹신하게 엉덩이에 감겼다.
‘좋군.’
사람의 몸은 간사했다. 어느덧 호사에 익숙해진 헬무트다. 이 정도쯤은 되어야 눈에 찼다. 점점 귀족화되어가는 기분이었다. 태생을 따라가는 듯이.
헬무트는 자리에 앉자마자 편하게 아레아에게 주문을 떠넘겼다.
“네가 고르고 싶은 대로 골라.”
해산물이든 버섯이든 매운 거든 헬무트는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다. 취향이랄 게 없다.
한가해진 헬무트가 문득 옆을 돌아본 순간, 뭔가가 보였다.
‘응?’
별로 멀지 않은 자리. 한 쌍의 남녀가 앉아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
이런 곳에서 데이트하는 한 쌍을 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남녀가 누군지가 문제다.
어쩐지 홍조를 떠올리며 꺄르르 웃고 있는 페트리샤 교관과 놀랍도록 부드러운 표정의 알란 교관.
수업에서의 그들을 생각하면 색다른 광경이었다. 시안이나 아스카가 봤다면 온갖 호들갑은 다 떨었을 거다.
하지만 다행히 목격자는 헬무트였다. 그는 교관끼리 연애하나 보다, 하고 별생각 없이 넘겼다.
음식을 다 골랐는지 아레아가 그의 시선이 향했던 방향을 눈치채고 뒤늦게 물었다.
“누가 있나?”
교관 둘을 알아본 아레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알란 교관과 페트리샤 교관이잖아? 알란 교관은…… 내가 알기로는 약혼녀가 있는데? 그것도 바덴의 유력 귀족가의 여식.”
아레아의 기억력은 의심할 길이 없다. 갑자기 상황이 파격적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교관의 바람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물론, 둘 다 그 사실에 대해선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알지?”
도리어 헬무트는 남한테 관심 없는 아레아가 소문에 밝은 것이 신기했다.
“알란 교관도 바덴에서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거든. 페트리샤 교관은 외부인이고. 교수진에 대한 정보를 알아 두는 건 유리…….”
“주문하시겠습니까?”
종업원이 다가와 친절한 얼굴로 물었다. 아레아는 메뉴판에서 몇 가지 집어서 주문했다.
‘어떻게 유리한 거지?’
약점을 잡아 협박한다거나. 별로 좋은 유리한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상관없다. 알란 교관이 페트리샤 교관과 바람이 났든 알란 교관에게 약혼녀가 있든, 아카데미에서나 떠들썩한 화젯거리지 헬무트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슬슬 허기가 졌다.
“맛있을 거야.”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마침 종업원을 부르려던 참인지, 페트리샤 교관이 이쪽을 보며 손을 들었다. 그녀는 손을 듦과 동시에, 헬무트와 아레아를 발견했다.
“너, 너희들!”
그토록 눈이 커다래진 그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동시에 알란 교관의 얼굴도 뻣뻣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