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78
177
헬무트
177화
“야, 야, 진정해!”
대비하고 있었던 제임스가 발군의 순발력으로 몸을 뒤로 뺐다.
휭! 눈앞에서 살벌한 소리를 내며 주먹이 스쳤다.
정말 뼈를 부러트릴 정도로 세게 주먹을 휘두르는 아스카를 뒤에서 하나둘씩 손을 뻗어 제지했다. 다섯이 달라붙고 나서야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얻어맞을 뻔한 제임스가 소리쳤다.
“거봐, 내가 싫어할 거라고 말했잖아!”
“알면 왜 물어봐, 이 새끼야!”
아스카는 살기등등했다. 정말로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 눈빛이다.
하지만 제임스는 진지하게 반응했다.
“아니, 의외로 좋아할 수도 있잖아. 취향에 맞을지도 모르니 일단 시도는 해 보는 게…….”
“무슨 개소리야? 너나 시도하던가!”
“내 덩치를 봐라. 그런 거 했다간 우리 학부 녀석들부터가 돌을 던질걸!”
주변에서 ‘맞아, 맞아.’ 하면서 호응했다. 아스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힘이 빠졌다.
제임스가 그에게 던진 질문은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너, 여장 대회에 나가 보는 게 어때?’
여장대회는 그레타 아카데미에서는 축제 때마다 실시하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행사였다.
무대 위로 올라가 손을 흔들거나 개인기를 보이면 투표로 가장 여장이 어울리는 사람을 뽑는다.
하지만 매번 참가자를 물색하기 고달프다는 게 문제다.
제임스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가 우리 학년에서는 딱인데. 저 검술 학부 녀석들 우락부락한 몸을 봐라. 누가 여장에 어울리겠냐. 상상만으로도 시력을 상실할 것 같구만.”
“딱이라고! 너도 딱 소리 나게 처맞을래?”
아스카의 눈꼬리가 급격하게 위로 곤두섰다. 잠시 멎었던 발버둥이 거세지자, 주변 녀석들이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흔들렸다.
제임스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아니 그렇게 싫다면 안 해도 돼. 그냥 물어본 거야.”
“다시 한 번 그런 기분 더러운 질문을 지껄였다간 검술 학부 건물에 널 매달아 버릴 줄 알아!”
“그, 그래, 알았어…….”
다들 아쉬운 눈치로 아스카를 힐끗댔다. 아스카는 숨을 씩씩거리며 풀려나 주먹을 매만졌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
“아스카가 싫다면 헬무트가 하면 어떨 거 같아? 저 녀석도 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러나 헬무트가 왠지 검은 눈으로 그를 슥 쳐다보자, 상대는 왠지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헬무트는 별생각 없이 쳐다본 거였다. 사실 헬무트야말로 왜 아스카가 여장이라는 단어에 저렇게 질색하는지 알지 못했다. 약간 솔깃하기도 했다.
‘3,000마르크면 괜찮은데. 잠깐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용병 의뢰비를 생각해 봐도 엄청나게 후했다.
하지만 그가 나간다고 우승한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여장 대회를 진행하다가 대신관이 오면 중간에 무대에서 뛰어내리기도 좀 그렇다. 참석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아스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마법 학부에서 아레아가 나가면 우승자 결정된 거 아니야?”
“아레아? 하긴 그래.”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레아면 그냥 압승이지. 누가 이기겠어?”
“하지만 아레아가 안 나갈 테니 가능성이 있는 거지.”
“아스카면 우리 학부 우승은 보장되어 있는데.”
다들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스카가 눈을 부라리자 곧 입을 닫았다.
아레아가 절대 나갈 리 없다는 것을 헬무트는 다른 의미로 잘 알았다.
일단 아레아가 나간다는 것부터가 반칙이다. 본인이 원하더래도 후견인인 학장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여장이라…….’
그러고 보니 여자 모습의 아레아를 본 적이 없던가. 곰돌이 잠옷을 입고 있는 건 본 적 있었지만.
‘궁금하군.’
언젠가는 확인할 날이 올까? 그것은 알 수 없는 미래였다. 가까운 시일에 일어나지 않을.
그러나 축제가 시작되었을 때, 헬무트는 의외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
축제가 시작된 첫날이었다. 아레아는 호출을 받고 학장실에 들어섰다.
“하이케가 너에게 선물을 보냈다. 이번 축제 때 재미있게 즐기라고 하더군.”
학장은 무뚝뚝한 얼굴로 아레아에게 상자를 건넸다.
나름 괴짜며 인정받는 마법사인 그이지만, 대마법사 하이케에게는 그저 굴리기 쉽고 만만한 부하 비슷한 것에 불과했다. 이런 심부름꾼 노릇이나 하는 걸 보면. 무슨 약점을 잡혔는지 거절하지를 못한다.
‘아니면 하이케와 옛날에 무슨 사이라도 되었던 걸까.’
아레아는 의문을 접었다. 알고 싶지도 않거니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안에 뭐 이상한 거 들은 건 아니죠?”
아레아는 의심스럽게 상자를 쳐다봤다.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상대였다. 아무리 자신의 스승이라고 해도, 믿음 따윈 없는 게 당연하다.
“내용물은 직접 확인해 봐. 일단 상자 자체에 저주 같은 건 걸려 있지 않다.”
학장은 피곤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가봐.”
아레아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상자를 들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이 아카데미에서 축제라는 단어를 가장 감흥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아레아였다.
이번 축제 때도 아레아는 마법 연구에 몰두할 예정이었다. 바깥이 좀 시끄럽겠지만.
‘대신관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하필 바덴에 대신관이 방문하다니. 신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도 이 바덴의 그레타 아카데미를 선택한 아레아였다.
헬무트만큼이나 아레아에게도 대신관과 마주하면 안 될 이유가 있었다.
대신관이라면 아레아에게 걸린 대마법사의 마법을 꿰뚫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꿰뚫어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혹시 아레아의 모습을 보고 하이케를 떠올리기라도 하면 아주 큰 문제였다.
빌어먹을 일이지만 둘은 혈연관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끔 닮아 있었으니까.
아레아는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몇 가지 마법을 써서 상자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천천히 상자를 열어봤다.
“이 여자가 도대체 뭘 보낸 거지?”
내부에 있는 어떤 물체를 목격한 아레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작은 팔찌였다. 그리고 옆에는 쪽지가 한 장 접혀 있었다. 아레아는 쪽지 내용을 읽어 봤다.
‘아레아, 아카데미 생활은 잘하고 있니? 이번 학기에도 어김없이 수석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믿는다. 내 제자라면 당연한 일이지. 그래도 모처럼 축제잖니. 즐길 때는 즐기렴. 그리고 이번에 대신관 한 명이 바덴을 방문한다지? 필요할 것 같아서 만들었단다. 네게 걸린 마법을 임시로 강화해 주는 물건이야. 잠깐 착용했다가 벗기만 하면 된다. 효능은 하루 동안 지속될 거야. 대신관도 눈치챌 수 없을 테지만, 되도록 가까이에는 가지 말고. 잘 지내렴.’
아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이케는 마법사 중에서도 아티팩트를 만드는데 독보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대일 전투에 강한 편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각종 아티팩트들이 가득한 그녀의 거처는 신전에서 모든 병력을 끌고 쳐들어온다고 해도 점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하이케가 만든 아티팩트라면 그녀의 장담대로 대신관조차도 아레아에게 걸린 마법을 꿰뚫어 보지 못하리라.
하이케는 세심할 때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 세심함이 종종 엉뚱한 데 쓰이긴 하지만, 적어도 하이케는 아레아가 정체를 감추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애초에 아레아가 정체를 감춰야 하는 원인이 그녀에게 있었기에.
‘다른 꿍꿍이는 없는 거겠지?’
의심스레 팔찌를 보던 아레아는 일단 그것을 갈무리해 두기로 했다. 아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착용할 생각으로.
그러나 아레아가 팔찌를 착용했을 때 경험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
그레타 아카데미의 축제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자 학부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축제를 즐기기에 바빴다.
다른 아카데미에서도 슬쩍 놀러 오는 모양으로 타 아카데미의 교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입장 제한이 없기에 아예 관광 온 이들도 보였다.
웨슬리의 팥빙수 가게는 인기 폭발이었고, 축제 상점가 인근에서는 전단지를 나눠 주는 호객 행위도 잇따랐다.
귀족들로 그득한 콧대 높은 그레타 아카데미 학생들도 축제 때만큼은 의외로 품격을 따지지 않았다.
어떤 마법 학부 학생들은 준비된 무대 위에 섬세한 환상 마법 쇼를 펼쳐서 모자에 돈을 받고 있었다. 흡사 길거리 공연처럼.
‘생각보다 다채롭군.’
헬무트는 상점가를 둘러보았다. 그도 오랜만에 겪는 평화로운 한때였다.
바소르까지 가서는 구경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내내 무투회만 치르고 오지 않았던가.
임시로 열리는 그레타 아카데미 축제 상점가는 바덴의 상점가와는 또 다른 활발하고 어설픈 맛이 있었다.
“야, 헬무트, 이거 너도 먹을래?”
왠지 들떠 있는 아스카가 버터에 구운 옥수수를 그에게 쥐여 줬다. 설탕을 살짝 뿌린 버터 옥수수는 고소한 맛이 났다.
신이 났는지 부쩍 씀씀이가 커진 아스카였다. 그는 시안과 함께 쉴 새 없이 뭔가를 사 먹거나 돌아다니면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어린애 같군.’
음식만 파는 것이 아니라 사행성 게임을 진행하는 곳도 있었다.
“검술 학부 2학년 수석 헬무트 님! 훌륭한 솜씨를 한 번 보여 주시지요!”
누군가가 아부를 하며 스쳐 지나가는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손에 다트를 쥐여 줬다. 원형판 중심에 가까이 맞출수록 좋은 상품을 준다는 거다.
별로 상품을 주기가 싫은지 거리도 멀고 원형판 중심부의 원도 작았다.
누가 봐도 장삿속이 드러났지만, 축제 기간에는 호구들이 가득이었다.
“좋아, 나도 한다!”
괜히 옆에 있던 아스카가 손을 들었다. 200마르크에 3번의 기회. 헬무트도 흔쾌히 참가비 200마르크를 냈다.
확실히 축제 물가가 비싸긴 하다. 200마르크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니까.
“좋았어!”
세 번째 다트에서 중심부로부터 3번째 원을 맞춘 아스카가 주먹을 쳐들었다.
그가 받은 상품은 아카데미 식권 다섯 장이었다. 식권은 10마르크 정도 하니까 절대 이득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스카는 그걸로 무척 만족한 듯했다.
“너도 해 봐. 넌 활도 잘 쏘잖아. 1등 한번 노려보라고.”
다트는 활쏘기와는 원리가 전혀 다르다. 하지만 헬무트는 3번의 시도 끝에 원형판 중앙에 다트를 맞추는데 성공했다.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역시 검술 학부 수석!”
“잘생겼어!”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일제히 박수를 친 다트 가게의 직원 학생들이 그에게 상품을 안겨 줬다.
“축하드립니다, 손님! 1,000마르크 상당의 곰돌이 인형입니다!”
졸지에 제 상체만 한 곰돌이 인형을 받아든 헬무트는 의심스러운 기색을 떠올렸다.
“이게 1,000마르크나 한다고?”
털도 옷도 고급스럽긴 한데, 1,000마르크나 되다니. 무슨 특별한 기능이 있는가? 직원 학생이 설명했다.
“마법 알람 기능도 있거든요.”
뒤에 시계가 하나 달려 있었다. 시침과 분침을 조작하여 버튼을 누르면 시간에 맞춰서 울리는 식이다.
상품을 내 준 학생이 직접 알람을 울려 주었다. 눈을 깜빡거리는 곰돌이 인형으로부터 발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녕 친구? 이제 시간이 됐어! 게으름 피지 말고 어서어서 움직이라고!”
“…….”
이게 1,000마르크나 한다니 부자가 된 헬무트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었다. 먹을 수도 없는 물건 아닌가.
그때 그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을 가진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야, 이거 진짜 신기하다. 나 주면 안 돼? 내가 다음에 밥 살게.”
“그래, 가져.”
헬무트는 시안한테 순순히 곰돌이 인형을 넘겼다. 옆에서 아스카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도 달라고 할 걸.”
“이미 늦었어!”
시안이 곰돌이 인형을 들고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헬무트는 잠시 말을 잃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