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79
178
헬무트
178화
둘째 날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깐 품었던 긴장감이 무색하도록 축제 기간은 마냥 평화로웠다.
문제의 대신관은 바덴에 입성하긴 한 모양이지만, 그가 꼭 축제 기간에 그레타 아카데미를 찾으란 법은 없었다.
정확한 대신관의 방문 기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대신관이 작은 군대 수준으로 성기사며 사제들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축제를 즐긴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새벽에는 꼭 수련장을 찾았지만, 헬무트도 모처럼 처음 겪는 축제를 즐기기로 했다.
상품이 걸려 있는 상점마다 들어가 너무도 잘 상품을 쓸어 왔기에 헬무트는 어느덧 상품 도살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첫째 날 소문이 났는지 둘째 날부터는 슬슬 손님으로 받아주지도 않았다.
“손님은 안 됩니다! 우리 가게 적자예요!”
손을 대각선으로 격렬하게 교차하는 직원 학생 앞에서 헬무트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뭐든 1등 상품을 따다 보니 상품이 많이 쌓였다. 상품 총액이 2만 마르크에 이를 지경이다.
아스카한테도 하나 줬는데 따 온 상품들이 기숙사 방을 큼직하게 차지하고 있어서 중고 시장에 팔아야 하나 고민이 되던 참이었다.
축제는 떠들썩하면서도 즐거웠다. 대신관이 걸려 마음을 놓고 있지 않았지만, 헬무트에게도 그랬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아레아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
바로 옆방인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사이가 어색해진 것도 아니다. 그간 문 앞에서 꽤 자주 마주치며 안부를 묻곤 했으니까.
“그 녀석은 축제를 즐길 마음도 없나?”
아스카가 투덜거렸다. 은연중에 아레아도 함께하길 기대했나 보다. 그것이 평소에 앙숙 같은 아레아라도. 미운 정도 정이다. 시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레아는 작년에도 이랬어. 사람 많은 걸 싫어하는가 보지.”
헬무트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넌 여장 안 한다더니 왜 갑자기 하기로 한 거야?”
헬무트는 물었다. 아스카는 오늘 검술 학부 2학년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여장 대회 지원서를 내고 온 터였다.
2년 동안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있는 아스카의 검술 학부를 위한 활동이었다.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낼 때는 언제고 갑자기 마음을 싹 바꿔 먹은 아스카가 신기했다. 아스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시안 녀석이 자기가 마법 학부 2학년 대표로 나간다고 으스대던데? 우승은 따 논 거라고 자기가 제일 예쁠 거라고 하더라고.”
시안은 여장하는데 별로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시안이 옆에서 재빨리 끼어들었다.
“당연하지. 내 생김새를 봐라. 어딜 봐도 미소년 아니야?”
“미소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어디서 너한테 그런 단어를 붙여! 아무튼 그래서 내기하기로 한 거지. 알다시피 내가 이 녀석과 승부를 가릴 만한 일이 별로 없잖아? 재밌을 것 같아서.”
마법 학부와 검술 학부라 대련으로 맞붙기도 뭐하다. 그래서 이런 걸로 경쟁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단순하디 단순한 아스카를 꼬드기기엔 좋은 방법이었다.
“혼자 하긴 쪽팔리지만 둘이 하면 뭐. 나쁠 거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것도 대회겠다 내가 제패해 주겠어!”
“……그래. 우승하기를.”
헬무트는 살짝 응원해 주었다. 어쨌든 아스카가 참가해서 우승하면 헬무트에게는 3,000마르크가 떨어진다. 무조건 이득이었다.
시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뭐야, 넌 아스카 편이야? 두고 보라고. 날 알아보지도 못하고 고백하게 될 걸!”
아스카가 질색을 해 보였다.
“별 징그러운 소리를 다. 넌 그게 자랑스럽냐?”
“그럼 우락부락한 놈들은 출전도 할 수 없다고. 이건 미소년의 특권이란 거야.”
“그놈의 미소년 소리 집어치워! 주둥이 틀어막기 전에!”
결국 그날도 남는 건 아스카와 시안이 투닥거리는 소리뿐이었다.
*
불꽃놀이를 포함하여 축제의 대표 행사는 거의 셋째 날 치러졌다.
처음 이틀 동안은 가볍게 즐기다가 마지막 셋째 날 화려하게 터뜨리고 끝맺음하는 거다.
축제 마지막 날은 수업이 없었다. 원래는 있었지만, 도통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질 못하자 교관들이 아예 통 크게 빼 버린 것이다. 다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만큼 축제에 열심이었다.
그레타 아카데미는 부유한 아카데미. 각종 행사에 상품이며 돈을 내거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어쩌면 장학금을 대신하여 이런 쪽으로 돈을 푸나 싶을 정도였다.
검술 대회 비슷한, 우등생이 자연히 높은 성적을 거두는 행사들은 아예 열리지 않았다. 철저히 즐기기 위한 축제였다.
웨슬리의 상점은 상점 수입 1위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같았다. 그 경우에도 검술 학부 2학년에 혜택이 돌아오게 된다.
어쨌든 검술 학부 2학년은 여러 모로 좋은 성과를 거둘 것처럼 보였다.
현재 가장 기대되는 것은 상금이 두둑하게 걸린 여장 대회의 결과였다.
“아스카 힘내라!”
“너만 믿는다!”
“검술 학부 2학년의 자존심!”
기숙사를 나서는 아스카를 향해서 응원이 쏟아졌다. 아스카는 당연한 듯이 성질을 냈다.
“자존심 같은 소리하네! 누가 너희를 위해 나가는 줄 알아?”
아침부터 아스카와 시안은 바빴다. 복장 같은 건 다른 녀석들이 구해 올 테고 가서 치장만 하면 되지만, 둘 모두가 스스로도 나름의 준비를 했다.
오이를 잘라 얼굴에 붙이며 밤새 팩을 하지를 않나, 둘 모두 헬무트 눈에는 좀 쓸데없어 보이는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뭔가를 내기한 모양이다.
우등생들답게 이런 쪽에서조차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둘이 여장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기 때문에 둘의 등쌀에 휘말려 다니던 헬무트는 한가해졌다.
상품을 좀 따 보려고 해도 이젠 참가를 받아 주지도 않는다. 나가려던 그는 문득 아레아의 방문 쪽을 쳐다보았다.
‘축제 기간 동안 한 번도 본적이 없군.’
아레아에게 감춰야 할 비밀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아마 헬무트가 짐작하고 있는 이상으로 대단한 비밀.
여자가 다녀도 되는 아카데미에 굳이 남자로 변장하고 들어온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그것이 이렇게 교류를 끊고 홀로 틀어박히는 걸로 귀결되는 것일 터.
하지만 만만치 않은 비밀을 가진 것은 헬무트도 마찬가지다. 그는 누군가를 안타까워할 심장을 가지지 못했으나, 걸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헬무트는 새삼 한 가지 의심을 품었다.
‘설마 남장이 취향은 아닐 테지.’
헬무트한테는 그렇지 않았지만 하도 유난한 성격 때문인지 곱상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의심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아레아였다.
남자로 사는 게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으니 취향일지도 몰랐다.
헬무트는 무심코 아레아의 방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지만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방에 없나?’
연구차 마법 학부 건물에 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헬무트는 저도 모르게 기숙사를 벗어나 슬슬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장 대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여긴가?’
시안을 따라 몇 번 와 본 일 있는 마법 학부 2학년 건물은 한산했다.
오늘 같은 날 수업도 없는데 마법 연구에 몰두할 만한 녀석들은 마법 학부에서도 극도로 적었다.
그러나 막 그가 건물에 들어서려던 때였다. 저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동하는 듯이, 미세하게 공기가 진동한다.
헬무트는 찌릿한 통증과 함께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헬무트는 자신의 심장에 통증이 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대신관. 그레타 아카데미를 찾는 게 오늘이로군.’
저편에 희끗희끗한 뭔가가 보였다. 하얀 복장을 차려입고 선 한 남자. 멀리서도 눈에 띌 만한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성기사들. 그들의 무구가 햇살을 받아 빛을 반사했다. 그들을 향해 수군거리며 시선이 쏟아졌다.
대신관은 굳은 얼굴의 마법 학부 교수 몇 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금단의 마법에 손대거나 호기심을 보이는 학생이 없는지 추궁당하는 눈치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 어둠의 싹은 너무도 예민하게 대신관의 존재에 반응하고 있었다.
조금씩 그자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강렬하게 통증을 전달한다. 위험한 것이 다가오니 피하라고 말하는 듯이.
어둠의 싹에게 지배당하는 느낌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따르는 것이 옳았다. 대신관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마법 학부 건물을 둘러볼 참이군. 어서 자리를 피해야겠어.’
헬무트는 가슴께를 부둥켜 잡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막 건물을 지나 모퉁이를 돌려던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헬무트는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손으로 더듬었다. 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학내니까.
상대도 헬무트를 발견하고 부딪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뒷걸음질 치다가 다리가 꼬여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상대는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소녀였다. 소녀……? 체형을 보건대 틀림없다.
헬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이렇게 기척이 희미하지?’
꼭 고도의 마법을 펼쳐서 기척을 차단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
헬무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는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헬무트는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후드 안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화려한 연보라색이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헬무트는 잠시 얼어붙었다. 상대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연보라색 머리카락의 소녀, 아레아는 속으로 하이케를 향한 저주를 퍼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 머릿속을 이해하는 일은 평생 자신에게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사연이다.
아레아는 연구에 필요한 교재가 있어서, 모처럼 마법 학부 건물을 찾았다.
막 나서려고 하던 차에 이쪽으로 오고 있는 대신관의 존재를 눈치챘다.
아레아도 대신관이 언제든 그레타 아카데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던 터였다.
그는 바로 건물의 빈방으로 이동했다. 건물에 남아 있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눈에 띄지 않게 숨어들 수 있었다.
‘하이케의 팔찌를 쓸 때로군.’
혹시나 해서 점검해 보았지만, 딱히 저주라던가 이상한 점이 있지는 않은 팔찌였다.
아레아는 대수롭지 않게 팔찌를 손목에 걸었다. 두 개의 팔찌가 호환하여 발동하는 마법이다. 두 개의 팔찌가 빛을 발하며 하이케의 마법이 펼쳐졌다.
바로 그 직후, 아레아는 제게 일어난 변화를 확인하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 여자, 제 정신이야?”
조금 전까지 은발 머리 소년이 서 있던 그 자리에는, 연보라색의 화려한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가 서 있었다.
아레아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오직 머리색만이 달라진 모습이다.
얼어붙은 아레아가 재빨리 팔찌를 빼내자 상큼한 하이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티팩트 발동 후에 전달되는 메시지였다.
[안녕, 아레아? 내 선물은 잘 받았니? 모처럼 여자아이가 된 김에 축제를 즐겨 보도록 해. 멋진 남학생과 데이트를 즐기면 더욱 좋겠지. 아티팩트의 효과는 네 모습을 살짝 바꿔 주고 기척을 죽여 주는 거란다. 24시간! 혹시나 마법을 풀어 보려고 했다간 첫 번째 팔찌의 마법이 훼손될 수 있으니 24시간 동안 얌전히 마법의 효과를 누려 주기를 바란다.]아레아의 손아귀에서 효과를 다한 두 번째 팔찌가 무참히 바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