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8
17
헬무트
17화
‘운이 좋았어.’
헬무트는 생각했다.
마물의 습격은 생각보다 잦았다. 마을의 경계는 삼엄해져 있었으나, 마물이 아닌 헬무트의 잠입은 순조로웠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마기에 둘러싸여 헬무트는 기척을 숨기고 줄곧 에루고가 있는 쪽을 주시했다. 에루고가 홀로 움직이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오래 기다리지 않아, 에루고는 헬무트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에루고가 마법진으로 보호되는 처소를 벗어나 연구실에 들어서며 긴장의 끈을 놓는 단 한 순간. 그거면 충분했다.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지.’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목적한 것을 얻어 내고 나호의 영역을 빠져나가기까지는.
등 뒤에 검이 겨누어진 채, 에루고는 천천히 연구실 안쪽으로 이동했다.
순순히 서고를 뒤지는 구부정한 노인의 뒷모습을 헬무트는 예리하게 주시했다.
‘필요하면 벤다.’
살인이라는 단어, 헬무트에게 생각만으로는 저항감이 없는 일이다. 그는 이미 마물을 베어 봤다.
헬무트는 마물과 인간의 차이를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까. 그 미묘한 거북함. 인간을 베면 뭔가 느끼게 될까?
서고를 뒤지며 에루고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뭐지?”
에루고가 교활하고 수완이 좋은 자라는 걸 익히 들었다. 괜한 말에 혹할 생각은 없었다.
“알 것 없어.”
“뭐, 좋아. 하지만 충고 하나 해 두지. 나가는 방법은 이론일 뿐이야.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검증된 적 없는 이론 말이지. 헛된 짓에 젊은 목숨을 버려서야 되겠나.”
“아직 멀었어?”
들을 기색도 없이 검을 들이대는 헬무트를 곁눈질하며 에루고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시도할 능력이 있는 자들도 몇 없었지. 다리언이라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지. 네가 여기로 온걸 보면, 다리언은 어떻게 된 거지? 함께 나가기로 결심한 건가?”
처음으로 눈빛에 동요를 드러내는 헬무트를 보고 에루고가 히죽 웃었다.
“아니군. 다리언은 죽은 거로구나!”
번뜩이는 깨달음이었다. 다리언의 제자. 실력은 있어 보이지만, 아직 어리다. 다리언이 함께 잠입해서 행동하는 편이 나을 터.
그가 상대라면 에루고는 저항 없이 내줄 것을 내줬을 것이다.
나호가 눈에 불을 켜고 있을 때는 어렵겠지만, 그가 동면에 든 시기인 지금은 다리언도 이곳까지 잠입할 수 있다.
기껏 키워 낸 제자를 홀로 사지에 들여보낼 건 뭔가. 숙제라기엔 과하다.
이제까지 파헤의 숲에서 에루고가 장악할 수 없었던 유일한 인간, 다리언.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렸던 거로군.’
이곳은 나호의 영역, 최중심부. 그의 잠입을 눈치챈다면 나호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나호는 다리언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
그 과정에서 기록이 파훼 될 수도 있다. 수명이 닳아가는 다리언으로서 나호와의 전투는 감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에겐 제자를 가르칠 시간이 필요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로서는 기록을 빼내는 것은 제자의 몫으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을 터. 그때까지 기록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래, 죽을 때도 되었지. 나처럼 어둠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 한은! 천하의 검성도 어쩔 수 없구나.’
에루고는 속으로 비웃었다. 가장 큰 위협 요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에루고가 손을 내밀었다.
“자자, 그렇게 경계할 것 없다. 네게 제안을 하나 하지.”
에루고의 손에는 어느덧 얇은 책자가 쥐어져 있었다. 헬무트의 눈동자가 책자를 향해 움직였다. 손을 내뻗으려는 순간, 에루고가 다른 손으로 가로막았다.
“너 말이다. 내 후계자가 되어 이 마을에서 사는 게 어떠냐?”
“헛소리.”
헬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이없다는 기색이었다. 에루고가 양팔을 펼쳤다.
“다리언의 검술을 전수받은 네 녀석이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 여기 녀석들은 다 나약해 빠졌어. 쓸모가 없지. 나도 나이가 먹었으니 네게 이곳을 물려주마. 여기 있는 모든 여자들이 다 네 것이 될 게다. 여자뿐만 아니라 모든 게! 나호 님은 내가 설득하지. 잘 생각해라.”
그러나 헬무트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의 검 끝이 에루고의 목덜미에 선혈을 그었다.
“네가 주는 어떤 것도 내겐 필요 없어.”
에루고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무의미한 희망에 목숨을 걸겠다는 뜻이냐?”
“난 살아서 파헤를 나갈 거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헬무트가 숲을 나가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다리언이 검을 전수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 어떤 보장이 없더라도 해야만 하고,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교활한 속삭임 따위에 휘둘릴 만큼 쉬운 결심이 아니다.
“그걸 넘겨.”
싸늘한 눈빛이 에루고에게 선을 그었다. 이 이상 수작을 부렸다간 벨 것이다.
에루고는 그 선을 예민하게 감지했다.
“좋아, 좋아. 그래,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헬무트는 에루고가 내미는 책자를 잡아챘다. 에루고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책자를 펼치자 안쪽에 섬세하게 그려진 지도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듣거라. 그 기록은 내가 이곳에 정착하기 전 숲을 탐색하다가 우연히 어떤 마법사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거다. 그자는 다른 마법사가 자신의 은신처를 찾아오길 바라며 표식을 남겨 뒀지. 하지만 내가 발견했을 때 그자는 이미 해골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절실히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은신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마법사였어. 마물의 이목을 피해 파헤의 숲에 숨어 살면서 나가는 방법을 연구했지. 안타깝게도 연구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여긴가.”
헬무트는 x자로 표시된 부분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곳엔 빨간 원과 함께 물결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파헤의 끝에 있는 거대한 폭포. 그 폭포에 몸을 던지면 물살을 따라 결계를 통과할 수 있다. 마기에 오염되지 않는 것처럼 물은 결계가 가진 정화의 기운을 배제하지. 물속에선 결계의 힘도 약해진다. 어둠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네 몸을 산산조각 낼 만큼은 강력할 테지만 말이다.”
헬무트는 제 몸속에 자리한 비스를 새삼 의식했다. 몸을 강화하는 비스.
사납게 몰아치는 물살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결계를 버텨 내야 한다.
‘확실히 쉽진 않겠어.’
“과거에 나는 다리언에게 이 기록에 관해서 이야기해 두었지. 내 마을을 부수려는 그자가 파헤의 숲을 나가 버리거나, 나갈 시도를 하다가 죽길 바라면서 말이다. 어느 쪽도 내겐 손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여태까지 이 기록을 아는 자 중 유일하게 성공 가능성이 컸던 다리언은 파헤를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제자가 지금 에루고의 앞에 있었다.
‘분명히 실패할 테지만.’
에루고는 친절하게 웃었다.
“이게 내가 아는 전부다.”
“좋아, 방법을 넘겼으니 살려주지.”
헬무트는 흔쾌하게 말했다. 죽여도 무방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약속은 지키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에루고의 죽음을 다리언이 원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나눈 대화에서도 그는 말했다.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에루고란 그자. 살려 둬라.’
‘어째서죠? 그는 사악한 흑마법사인데.’
힘을 가진 자는 그만한 의무를 짊어진다. 헬무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서 배웠다. 함부로 생명을 해해선 안 된다는 것도.
하지만 에루고는 해치워야 할 악인이니 이유 없이 해하면 안 될 상대가 아니다.
‘그 때문이다. 비록 사악한 흑마법사이지만, 그가 있어서 살아남은 인간들도 있다. 가축 같은 삶이라지만 그런 삶이 허락되는 것조차도 이 파헤의 숲에선 사치일 수 있지. 그 인간들을 책임질 생각이 아니라면 에루고를 살려 두거라. 그는 필요악의 존재. 그것이 내가 그를 내버려 둔 까닭이기도 하다.’
‘그 인간들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
파헤의 숲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죽는다. 약하면 죽는 게 당연한 것이다.
다리언의 눈빛이 엄격해졌다.
‘목숨의 무게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너 또한 그 표범의 자비가 있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느냐.’
그 말은 옳았다. 헬무트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긍정했다.
‘기분 나쁜 눈빛, 자꾸 수작을 부리는 것도 거슬리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그가 죽으면 나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서서히 죽이는 방법도 있었지만, 헬무트는 그를 멀쩡히 살려두기로 했다. 에루고를 후려쳐 바닥으로 눕혔다.
“큿! 뭘 하는 거냐!”
카랑카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헬무트는 에루고의 손을 결박하여 기둥에 단단히 묶었다.
마법사를 상대로 묶어두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비스를 끌어올린 헬무트는 에루고의 몸에 손가락을 대고 몇 군데의 혈에 찔러넣었다.
“크윽!”
몇 시간, 마력이 흐르는 통로를 막은 비스가 흩어질 때까지 마법을 쓸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동면에 든 나호를 호출하려면 마법이 필요할 터.
마력을 봉쇄당한 채 묶인 그 몇 시간 동안만큼은 에루고도 평범한 노인이었다.
“네놈, 이건!”
“시간 지나면 풀릴 거야. 앞으로 착하게 살아.”
어이없는 표정의 에루고에게 충고처럼 남긴 헬무트는 바로 돌아섰다.
뭐가 분했는지 에루고가 다급히 노성을 내질렀다.
“네가 살아서 파헤의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에루고가 먼저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확신했다.
백이면 백, 죽는다. 흑마법사로서 결계를 버텨 낼 만큼의 마기를 구축하지 않는 한은.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파헤의 숲에서 가장 강력한 마물조차도 뚫지 못한 것이 저 결계였으니까.
더군다나,
‘네가 살아서 그 폭포에 뛰어들 수나 있을까?’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끝의 끝에 가서야 알게 될 테지만.
흑마법사의 두 눈이 검게 물든 악의로 번뜩였다.
그러나 냉정한 눈의 소년은 그를 힐끗 보고 등을 돌렸다.
뚜벅뚜벅.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그의 연구실을 떠나갔다.
마치 에루고가 그의 발에 걸린 작은 돌부리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