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80
179
헬무트
179화
아레아는 하이케가 자신의 스승이며 대마법사라는 사실을 불쾌하도록 실감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이케의 말대로, 아레아의 실력으로는 하이케가 두 번째 팔찌에 부려 놓은 술수를 풀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술수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 하루빨리 그녀와 연을 끊기 위해서 지독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레아는 하이케의 마법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24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그건 상상한 이상으로 기분을 저조하게 했다. 하지만 지체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대신관이 오고 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게 있다면 넘어가지 않을 터.
신전 공적의 제자라는 건, 언제든 위험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이케에 대한 분기는 잠시, 아레아는 건물 뒤쪽으로 향하기 위해 바로 창가에서 뛰어내렸다.
막 모퉁이를 돌던 순간, 누군가와 부딪칠 뻔한 아레아는 균형을 잃고 주저앉았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바쁜데 어떤 자식…….’
문득 보니, 익숙한 신발이었다. 전율이 일었다.
아레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고개를 숙이고 모른 척해 버리면 그만이었을 텐데, 어쩐지 그럴 수 없었다. 강렬히도 확인하고 싶었다.
헬무트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모든 게 잊혔다.
‘왜 이 녀석이 여기에…….’
처음 아레아를 후려친 건 충격이었다. 이어서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아레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드, 들킨 건가? 그래, 몰라 볼 리가 없지. 명색이 룸메이트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헬무트는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속 모를 검은 눈동자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헬무트라면 여자애가 남자인 척 속이고 아카데미에 다니고, 룸메이트까지 했던 사실에 화를 내진 않을 것이다.
그가 무감한 성격이라 때로 어떤 일에 관대할 수 있다는 건 아레아도 알고 있었다.
입을 다물라면 다물어 줄까. 지금 모습이 그저, 저주에 걸린 것이라고 변명하면 좋을까.
아레아의 머리는 김이 날 만큼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헬무트는, 그녀를 보고 살짝 눈썹을 들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잡…… 으라고?”
문득 목소리를 낸 아레아는, 흠칫했다. 원래 하이케의 변장 마법은 목소리도 바꿔 주는 것이었다. 지금의 아레아는 원래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헬무트는 손을 뻗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잠깐 망설인 아레아는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대신관. 어서 빨리 움직여야 해.’
그 짧은 접촉에 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채질 하고 싶을 만큼.
둘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슬쩍 들리는 말소리로는, 이름 모를 대신관은 마법 학부 건물을 좀 돌아보고 갈 계획인 듯했다.
안전지대까지 벗어나고 나자, 헬무트는 멈춰 섰다. 아레아는 그제야 그들이 아직까지도 손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레아는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 사실보다 더 놀랄 만한 한 가지 사실을 아레아는 곧 깨달았다.
‘……대신관을 피하는 건가.’
너도? 라고 물을 상황은 아니었다. 은밀한 움직임도 그렇거니와, 대신관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는 경계심 어린 눈빛.
아레아가 하이케의 제자라 신전에 정체를 들켜선 안 된다는 것을 그가 알 리 없다. 그러니 이건 헬무트의 문제.
‘비밀이 많은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들의 비밀은 닮은 구석이 있을지 모르겠다. 방학 동안은…… 무엇을 하고 다녔던 걸까.
그러나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레아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듯이.
대신 아레아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왜 마법 학부 건물에 왔었던 거야?”
그리고 왜 자신을 데리고 도망친 건지. 혼자 도망쳐도 되었지 않나.
“글쎄.”
새카만 눈동자가 아레아에게 꽂혔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느닷없이 물었다.
“축제 구경할래?”
“축제? 구경…… 이라니.”
“재미있어.”
‘그래, 재미있겠지. 그런데 이 녀석, 뭔가 이상한데.’
아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이 여자인 걸 알아서 그런 건지.
아니, 그보다 변명할 수조차 없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평소에 자신을 대하던 태도가 아니었다. 미묘한 거리감.
“내가 너를 뭐라고 부르면 되지?”
아레아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헬무트를 쳐다봤다.
‘이 녀석…… 안면 인식 장애가 있나? 날 못 알아봐? 이렇게 똑같이 생겼는데?’
야아악간, 차이가 있긴 했다. 여자일 때의 아레아와 남자일 때의 아레아는 선이나 골격, 체구에서 풍기는 느낌이 다르니까. 하이케의 마법은 실로 정교했다.
하지만 눈이 달려 있다면, 룸메이트까지 했던 헬무트가 둘이 동일인이라는 걸 몰라볼 수 없다. 아레아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헬무트는 연기를 펼친다기에 너무도 태연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철저히 ‘나는 모른다’는 눈치였다.
어쩌면 단순한 녀석이니 남자에다가 은발인 아레아와 눈앞에 있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단순히도 연결 짓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헬무트는 아레아로서도 파악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특별하다 싶을 만큼 무관심한 점도 말이다.
‘아니, 못 알아봤다 치고, 그보다 왜 처음 보는 여자애한테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지.’
태도가 어딘지 자연스러운 게 수상했다. 아레아는 새초롬하게 눈꼬리를 올렸다.
“그런 건 물어서 뭐하게.”
“그럼 그냥 너라고 부르지.”
이름을 알려 주지 않자 더 이상 묻지도 않는다. 황당해진 아레아는 따져 물었다.
“아니 그보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잖아. 왜 축제를 같이 구경해.”
“모르는 사이면, 그래선 안 되는 이유가 뭐지?”
진지한 기색이었다. 아레아는 설명할 말을 골랐으나,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흐름대로.
“……그것도 그렇네. 근데 내가 좀 사정이 있어서, 얼굴을 드러내면 곤란한데.”
아레아는 혹시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눈치채지 않을까 슬쩍 눈치를 봤다.
하지만 헬무트는 전혀 알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가볍게 하나의 방법을 고안해 냈다.
“축제 때는 괴상한 옷을 입은 녀석이 많으니까. 가면을 하나 사는 게 어때.”
시안이 꿈꾸던 가면을 쓴 신비한 마법사 흉내 내기엔 딱이었다. 비록 본인은 그보다 현재 여장을 잘 해 내는 쪽에 관심이 있었지만.
아레아는 어쩐지 웃음이 나와 피식 웃었다.
“좋은 생각이네.”
갑작스레, 헬무트와 축제를 즐기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멋진 남학생과 데이트……. 하이케의 말이 일순 머릿속을 스쳤지만 아레아는 애써 지워 냈다.
‘그녀의 말 때문이 아니야. 축제…… 뭐 나쁘지 않지.’
아레아가 축제에 참가 하지 않았던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한 번 즐기기 시작하면 자신을 놓아 버릴까 봐서였다.
함께 즐길 친구가 없기도 했지만 아레아와 같이 축제를 즐기는 걸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다.
항상 긴장감을 바짝 곤두세우고 살아야 했기에. 이런 때조차도 즐기지 않기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하지만 세우고 있던 장벽이 어쩐지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헬무트 앞에서.
아레아는 자신에게 그가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마 헬무트는 아레아의 결심을 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리라. 하이케야 강제적으로 그렇게 만들 뿐이지만.
“그런데 너 왜 혼자 있어? 친구들은 어쩌고.”
“여장 대회에 참가하러 갔어.”
“……그랬구나.”
그 녀석들, 그런 대회에 참가한다는 말인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헬무트는 혼자 있다가 심심한 김에 웬 혼자 있는 여자애를 발견하고 같이 놀자고 생각한 건가 보다. 뭔가 헬무트답지 않으면서도 헬무트다운 느낌이었다.
예쁜 소녀에게 호감이 있어서 갑자기 들이댔다기엔, 헬무트는 미묘하게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였다. 말 그대로 축제를 즐기자는 것처럼.
‘……모르겠다.’
헬무트가 여자인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해도 곤란하니 잘 된 건지도 모른다. 아레아는 한숨과 함께 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헬무트는 자신의 일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일단 여장 대회는 고정이야. 그런데 그건 오후 5시쯤 열리고 그때까지는 계획이 없어. 너는 하고 싶은 거라도?”
지금은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오전 시간이었다. 아레아는 의심스럽게 물었다.
“언제까지 같이 있자는 소리야?”
“글쎄, 따로 바쁜 일이 있나?”
“없…… 지만.”
말에 머뭇거림이 많아졌다. 아레아는 자신이 뭘 하려고 마법 학부 건물까지 갔는지도 잊었다.
헬무트는 가뿐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참으로 명쾌하다. 명쾌해서 할 말이 없어진다.
“하고 싶은 건?”
아레아는 그 질문에 뒤늦게야 답할 수 있었다. 오가는 길에 눈에 띄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 인형극이란 걸 하던데. 본 적이 없어서.”
“나도 본 적이 없어. 가자.”
그 전에 변장용 가면을 사기로 했다. 아레아는 슬쩍 마법으로 눈색을 바꾸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평범한 파란색으로 변했다.
헬무트야 둔한 녀석이니 모른다쳐도, 혹시 누군가가 알아볼까 해서였다.
다행히 하이케의 마법과 눈색을 바꾸는 마법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헬무트는 자신을 못 알아보는 눈치니 마법을 쓴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아레아는 그레타 아카데미의 마법 학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안에 입은 옷은 그냥 평범한 셔츠와 바지라 특이점이 없었다.
‘복장으로 들킬 일은 없겠지.’
대충 적당한 가면을 하나 사서 쓴 아레아에게 헬무트가 권유했다.
“좀 더 확실하게 하는 게 어때.”
축제가 벌어지는 아카데미 앞에는 바덴의 상점가에서 원정 나온 상인들이 물건을 팔고 있었다.
거기서 아레아는 겉에 걸치는 화려한 망토를 하나 샀다. 적당히 초승달이 박힌 유치한 마법봉 하나까지 사드니 완벽한 변장이 이루어졌다.
정말로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 코스프레 한 모습이다.
‘내가 뭘 하는 건지.’
회의감을 느꼈으나 아레아는 복장까지 완벽하게 갖춘 김에 축제를 한껏 즐기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레타 아카데미의 축제는 바덴에서 유명한 행사다. 그 때문에 다시 축제 상점가로 향하는 그들은 엄청난 인파에 휩싸여야 했다. 마지막 날이라서인지 유독 사람이 많았다.
도저히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상황에 헬무트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 연극 보러 가자.”
그들은 원래 손을 잡지 않는 사이였다. 그러니 헬무트는, 자신이 아레아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왠지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아레아는 자신이 덥석 그의 손을 붙잡은 이유가 그냥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아까도 이미 한 번 잡아 봤지 않은가.
‘손이 단단하네.’
검술 학부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당연함에 이상하게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저기, 헬무트.”
아레아는 물었다.
“너, 아무나 이렇게 손잡고 이러는 거 아니지?”
“아무나? 나는 원래 손을 잡지 않아.”
“그럼 왜…….”
“사람이 많잖아.”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답한다.
“이게 편해.”
“……그래.”
굉장히 편의를 따지는 녀석이라고, 아레아는 생각했다.
상점가에는 당연히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검술 학부 2학년생들이 난리를 쳤다.
“세상에, 헬무트와 손을 잡고 다니는 저 여자애는 대체 누구지?”
“얼굴을 가렸긴 한데, 예쁜 것 같지 않냐. 왠지 예쁠 것 같아.”
“혹시 축제를 맞아 놀러 온 약혼녀 같은 거?”
“헬무트는 평민이잖아! 뭔 약혼녀야?”
“그걸 믿어? 어딜 봐서 저 녀석이 평민이야!”
“아무튼, 그냥 여자 친구일 수 있잖아!”
“헬무트 여자 친구라고?”
그들의 대화에 싸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