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84
183
헬무트
183화
여장 대회는 의외로 치열하게 흘러갔다. 맨 처음에 나타났던 녀석만 그따위였던 모양인지, 아스카 이후에는 확실히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아졌다.
“8번은 마법 학부 4학년, 키스입니다! 본명 아니고 가명입니다!”
환호성 속에서 키스라는 이름의 참가자는 손으로 마구 키스를 날렸다.
핑크색 가발을 뒤집어쓰고 별이며 장식이 덕지덕지 달린 희한한 드레스 차림의 그는 꼭 공연 중인 여배우 같았다.
여장 대회에서 여자로 보이는 마법을 쓸 수는 없다. 그러면 마법 학부에 너무 유리하기 때문에.
단지 마법 학부가 변장 물품 제조에 더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키스는 아스카처럼, 완전히 소녀처럼 보이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보형물과 장식, 화장 덕에 그럴듯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대회를 즐기는지 적극적으로 자세를 취하면서 교태 어린 매력 발산을 해댔다.
여장 소화력이야 아스카를 따라갈 녀석이 없지만, 투표로 우승자가 결정되는 이 심사에서 그리 적극적으로 재미를 유발하니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다. 환호성이 쏟아졌다.
“와우, 멋지다! 네가 최고야!”
“키스, 사랑해!”
쭉 지켜보던 아레아는 점점 더 어이가 없어졌다.
‘이 녀석들, 여장 대회 따위에 시험보다도 더 열심히라니. 거기에 열광하는 녀석들은 또 뭐고.’
아까 인형극도 수준이 높았다. 만년 1등 아레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아레아는 저도 모르게 무대에 완전히 집중하게 되었다. 옆에서 헬무트가 대회에 빠져든 그녀를 살짝 쳐다본 것도 모르고서.
대회 참가자는 총 12명. 상대적으로 고학년의 참가율이 낮았다. 시안의 순서까지는 금방 돌아왔다.
“다음은 마법 학부 2학년, 시안!”
모두의 기대 속에서, 드디어 그가 걸어 나왔다. 아스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경쟁심이 불타는 눈빛이었다.
시안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휘파람과 함께 엄청난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
과연 자신 있어 할만했다. 귀여운 쪽으로 나올 줄 알았더니, 반대를 택했다.
머리엔 붉은 장미를 꽂고 입술을 붉게 칠한 시안은 몰라보게 다른 인상이었다.
그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도발적이고 섹시한 소녀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시안은 한 손에 채찍을 들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바닥에 채찍을 찰싹, 내리치자 관중석에선 난리가 났다.
“끝내준다!”
“날 때려 줘, 제발!”
광란 현상을 보이는 관중석을 향해 시안이 유혹적으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상의가 착 달라붙는 검은 드레스는 뭘 어떻게 했는지 볼륨감까지 완벽하게 표현해 내고 있었다.
아스카 못지않은 여장 소화력에 이쪽은 훨씬 더 적극적이다. 우승의 의지로 충만했다.
아레아는 중얼거렸다.
“상금에 영혼까지 팔았네.”
“그보다 즐기고 있는 거겠지.”
헬무트의 말에 아레아의 입이 도로 닫혔다. 아는 녀석들이 저러는 꼴을 보고 있으니 더 어이가 없었다.
뒤이어 몇 명의 참가자가 더 나왔으나, 시안만큼의 강렬한 인상을 주진 못했다. 아스카가 처음 나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오히려 후발 주자들이 너무 격하게 적극적인 탓에 그가 묻히는 감이 있었다.
모든 참가자가 나온 뒤, 투표를 앞두고 사회자가 손을 쳐들었다.
“자, 참가자 여러분! 마지막 매력 발산의 기회, 단 한 번만 드리겠습니다! 나 아직 다 못 보여 줬다! 나를 찍어달라 하시는 분! 손들어 주십시오! 마지막 기회입니다!”
몇 명이 손을 들었다. 우승의 욕구로 충만한 눈빛이었다. 그들이 각자의 개인기로 무대 위를 장식한 후, 사회자는 다시 한번 물었다.
“자, 이제 더 없으십니까? 그럼 투표를 진행…….”
“잠깐.”
아스카가 손짓했다.
“내가 한다.”
“오, 과연! 검술 학부 2학년 냉혈 미소녀 아스카 양의 개인기는 어떨지! 기대해 보겠습니다! 자, 나와 주시죠!”
아스카가 그를 슥 지나쳐 가며 속삭였다.
“넌 어느 학부의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회 끝나고 보자.”
사회자가 하하 웃었다. 아스카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는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스카는 치맛자락을 걷고, 뭔가를 안에서 꺼냈다. 검이었다. 안쪽에 잘도 매어 놨다.
아스카를 아는 녀석들은 눈을 부릅떴다.
‘혹시 저 녀석, 여기서 살인을 저지르려고!’
‘아무리 사회자가 거슬린다지만!’
무대에 뛰쳐나가서 막아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아스카는 치맛자락에서 꺼낸 검을 쳐들었다. 그의 눈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뭐든 자를 만한 걸 가져와.”
광대처럼 춤이나 노래를 선보일 생각은 없다. 검술 학부라면 검술 학부답게 개인기를 선보인다! 그것이 아스카의 생각이었다.
어쨌든 여장 대회에 어울리는 개인기는 아니었다.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스카는 여장을 하고서도 본인의 강압성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청순한 미소녀가 살벌하게 검을 빼 든 그 모습이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사회자가 관중석으로부터 뭔가를 건네받았다.
“역시, 절단 쇼하면 이 사과지요!”
“네 머리 위에 올려놔.”
아스카가 턱짓으로 지시하자 사회자가 질겁을 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하하, 그건 좀! 공중에 던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대로 못 던지면 너도 같이 잘릴 줄 알아.”
“마, 마법으로 하지요. 마법으로.”
사회자는 마법 학부였던 모양이다. 그는 마법으로 사과를 공중에 둥둥 띄웠다.
비스를 담은 아스카의 검이 단숨에 허공을 갈랐다. 정확히 12조각으로 균일하고도 아름답게 분할된 사과 조각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오오오오! 관중들이 놀람의 소리를 냈다. 엄청나게 정교한 검 솜씨가 아니라면, 이런 묘기는 불가능하다.
사회자가 사과 조각을 집어 들어 관중석에 선보였다.
“이 균일하고 매끈한 사과 조각을 보십시오! 과연, 검술 학부 2학년 차석! 엄청난 솜씨입니다.”
“저 녀석이 검술 학부 2학년 차석이라고?”
“그럼 설마 저 녀석이 소문의 그…….”
그제야 미친개와 무대 위의 미소녀를 일치시킨 관중들이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경악은 묘하게도 표로 이어졌다.
미친개라고 불리는 녀석이 예쁜 소녀의 모습으로 무대 위에서 묘기를 펼치고 있는 것을 보자니, 그 괴리감이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검 솜씨도 놀라웠다.
위기감을 느낀 시안이 사회자에게 소곤거렸다.
“나도 하면 안 되나? 정령 쇼 보여 줄 수 있는데.”
“마법 사용은 어떤 식으로든 금지입니다!.”
“아니, 그럼 마법 학부한테 너무 불리하잖아!”
“그렇다고 마법을 허용했다간 너무 유리해져서…… 대회 방침이니 어쩔 수 없어요.”
사회자는 곧바로 관중석을 돌아보며 진행을 이어갔다.
“자, 여러분. 잘 보셨지요? 그럼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후보는 총 12명입니다. 대망의 우승자는 과연 누가 될까요!”
배포되는 투표용지를 받아든 아레아가 물었다.
“너는 누구한테 투표할 거야?”
헬무트의 답은 빨랐다.
“아스카.”
“왜?”
“아스카한테 투표하면 검술 학부에 인당 3,000마르크의 상금이 떨어지니까.”
둘 다 여장은 그럴듯했지만,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그럼 나는 시안.”
아무 생각 없이 말한 아레아는 움찔거렸다.
현재 헬무트는 아레아가 누군지 모른다. 정체 모를 연보라 머리 소녀로서는 헬무트와 같은 논리로 시안을 뽑을 이유가 없다.
아레아는 구태여 변명했다.
“아, 나, 나는 마법사라서…… 마법 학부 중에서 가장 나은 녀석을 뽑는 거야.”
말하고 나니 후회감이 들었다.
‘이렇게 된 김에 자연스럽게 고백할 기회였는데.’
숨기는 데 익숙하다 보니 기회를 놓쳐 버렸다. 아마 거의 마지막 기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끝까지 숨기는 수밖에.
아레아는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는 말할 수 있을 터였다.
투표 집계는 금방 끝났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거, 이거 이 대회가 시작된 이후로 처음으로 공동 1등이 나왔습니다! 검술 학부 2학년 아스카 182표! 마법 학부 2학년 시안 182표! 정확히 득표수가 같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표가 잘 분산되었다. 다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했던 모양으로 대부분이 자신이 돈을 받을 수 있는 녀석들에게 투표한 것이다.
“그럼 1등은 어떻게 되는 거지? 재투표하나?”
관중석에서 누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사회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런 경우 규칙에 따라 공동 우승자를 선출하게 됩니다. 상금은 절반씩 나눠 획득하게 될 테지요. 우승자의 각 학부에 인당 1,500마르크!”
검술 학부와 마법 학부 2학년 학생들에게서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반쪽이면 어떤가, 1,500마르크나 꽁돈이 생기는데!
“올해는 2학년들이 쓸어 가는군요. 학술부, 내년에 분발해 주십시오! 자 우승자의 수상 소감이 있겠습니다!”
아스카가 당당하게 나섰다. 그러나 환호하던 검술 학부 2학년생들은 마법 확성기를 통해 그의 말이 울려 퍼지자 금세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야, 2학년들! 양심 있으면 500마르크씩 거둬서 나한테 토해 내라! 내가 아니었으면 검술 학부에서 우승, 꿈이나 꿨겠어?”
우락부락한 녀석들 태반인 검술 학부에서 애초에 출전 못 하는 헬무트를 배제하고 아스카가 출전하지 않았다면 1학년과 같은 꼴이 났으리라. 그건 사실이었다.
사회자가 진땀을 흘리며 수습했다.
“아니, 우승 소감을 말하라니까.”
“나야 당연히 우승이지! 다들 눈이 없나? 한 명만 제대로 눈이 붙어 있었어도 단독 우승인데.”
시안과 승부를 가리지 못해 아쉬운 눈치였다. 시안이 팔짱을 끼고 못마땅하게 그를 쳐다봤다.
“이런 녀석한테 우승 소감 같은 걸 말하게 하다니. 제대로 할 리 없잖아. 빨리 내게로 돌려.”
“그, 그럼 다음 분?”
바로 시안의 입에 마법 확성기가 대졌다.
“안녕하세요? 마법 학부 공인 미소년 시안입니다! 보고 있나? 아레아!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금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우승 기념으로 특별히 원하시는 분은 채찍으로 때려드려요!”
도발적인 멘트를 날린 시안은 관중석을 향해 조신하게 손을 흔들었다.
왠지 채찍을 맞아 보고 싶었는지 무대 앞으로 꽤 많은 수의 관중이 몰려들었다. 지목당한 아레아는 내심 코웃음 쳤다.
‘아레아, 네가 얼마나 소문난 미소년이건 여장 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건 나다. 내가 너보다 우위다!’
시안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아레아가 마력을 통제하게 되면서 광적인 추종자 수도 확 줄었다. 그 때문에 시안도 저런 소리를 입에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진짜 여자인 아레아는, 아니, 자신이 여자가 아니래도 마법 학부 대표 미소년 타이틀 따윈 누가 가져도 상관없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같잖았다.
‘별 이상한 데서 다 견제를 하고 있어. 차라리 성적에 경쟁심을 불태워 볼 것이지.’
희한한 녀석들이었다. 둘이 나란히 여장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차지한 것도 우스꽝스러웠다.
‘헬무트는 왜 저런 녀석들과 어울리는 거지. 재미 때문인가.’
개성 넘치고 시끌벅적한 녀석들이니 보는 재미는 있을 것 같다.
아레아는 무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헬무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깨달았다. 이제 여장 대회는 끝났고, 함께 하는 시간도 끝났다는 것을.
제 손목 쪽을 어루만지면서 아레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이케의 마법, 깨는 법을 알 것 같다. 굳이 24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