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85
184
헬무트
184화
“여어, 헬무트! 잘 봤냐. 나의 우승을!”
무대에서 내려온 아스카가 반가이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서 봐도 흠잡을 데 없이 여자 같다.
목울대를 가리기 위해서 목이 긴 드레스를 입었지만, 그의 변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일단 완벽한 청순미를 풍기는 저 얼굴이 다 했다.
“너 누구 뽑았어?”
“너.”
“그렇지? 역시 날 뽑을 줄 알았어!”
아스카가 활짝 웃었다. 헬무트는 굳이 너에게 3,000마르크가 걸려있었기에 그랬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쉽군. 한 표만 더 있었어도.’
3,000마르크가 1,500이 되었다. 아니, 반대인가? 만약 시안 쪽에 한 표가 더 있었다면 1,500마르크는 0이 되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결과였다.
헬무트는 칭찬하듯이 말했다.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네.”
“뭐, 이 정도는 나한테 당연하지!”
여장 대회건 어쨌건 우승은 우승이다. 아스카는 그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듯이 보였다.
그 덕에 그의 심기를 거슬렀던 사회자는 의식의 저 언저리로 벗어나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술 학부 2학년 한 명이 끼어들어 물었다.
“어? 근데 헬무트. 너 여자 친구는 어떻게 한 거야?”
아스카가 물었다.
“여자 친구라니?”
“그, 왜 여자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온 여자애.”
아스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이 녀석, 여자애랑 같이 왔다고? 진짜야?”
“맞아! 나도 들었어, 너 무슨 여자 친구와 같이 있었다면서! 그것도 오늘 하루 종일!”
어느새 나타난 시안이 추궁하듯 채찍을 들었다. 그는 이미 몇 명의 지원자를 신나게 채찍질한 터였다.
무기용 채찍이 아닌 데다가 그의 팔 힘이 형편없다 보니 맞아 봐야 좀 따가운 수준이겠지만. 이상한 취미가 있는지 지원자들은 맞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승으로 일었던 흥도 사그라졌다. 시안이 짤막하게 덧붙였다.
“변태 녀석들 상대하기 힘드네.”
헬무트는 짤막하게 답했다.
“지금은 없어. 갔거든.”
모두의 시선이 무대에 쏠린 사이 예의 그 ‘여자 친구’는 이만 가 봐야겠다며, 오늘 즐거웠다는 인사말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언제든 사라져 버릴 것처럼 보였기에 인사하고 간 게 더 의외일 정도였다.
아스카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여장과 어우러지니 꼭 바가지 긁는 여자 친구처럼 보였다.
“갔다고? 그럼 여자애와 같이 있었다는 거 아니야! 무슨 사이인데!”
“여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나는 전혀 몰랐는데! 대체 언제 사귄 거야? 너 혼자 시내에 다닌 적도 별로 없잖아.”
시안이 호응하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였다.
“여자 친구 맞아? 나도 전혀 몰랐는데! 에단 교관님 소개야? 아니면 아카데미 들어오기 전부터?”
헬무트는 가볍게 부인했다.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뭔데. 왜 같이 있었던 건데?”
“우연히 만나서……? 심심했거든.”
“네가 심심하다고 누구를 꼬셔서 같이 있을 녀석이 아닌데?”
아스카치고는 예리한 지적이었다. 시안이 알았다는 듯이 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저 녀석을 움직일 정도로 이뻤나 보네.”
그건 사실이었다.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지.”
“뭐야? 연락처는 받아 뒀어? 어느 아카데미의 누군데!”
“네가 예쁘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예쁜 거냐? 대체 누구야? 그 정도 여자애가!”
잔뜩 흥분한 시안과 아스카의 추궁이 쏟아졌다. 침을 튀기는 두 사람에게 둘러싸인 헬무트는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무거웠다. 억지로 입을 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아스카는 분통을 터뜨렸다.
“아, 됐다. 됐어! 대체 누구길래 입을 싹 다무는 거야? 무슨 황녀라도 만났나.”
“옷이나 갈아입고 오자고. 나 구두 때문에 발이 아파.”
시안이 투덜거렸다.
“넌 그 채찍이나 어떻게 해! 그런 걸로 우승할 생각을 하다니.”
“쉽게 날 이길 수 있는 척해 놓고서 똥줄 타서 사과 베기까지 선보인 네가 할 소린가?”
“너야말로 우승하고 싶어서 목숨을 걸었구만! 어쨌든 다음에 두고 보자고.”
“좋아, 다음에 승부를 가릴 걸 생각해 보지.”
맹렬한 눈짓을 주고받은 둘은 헬무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해놓고 대기실로 사라졌다.
이제 사흘간 이어진 축제도 막바지를 앞두고 있었다.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불꽃놀이가 곧 이어질 것이다.
헬무트는 자기가 앉아 있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
그 시각, 아레아는 아카데미 빈 건물에서 추적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멈춰 섰다.
팔찌에 손을 가져간 아레아는 확연히 느슨해진 하이케의 마법을 살펴보았다.
24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틈이 나타났다는 건, 급조된 마법이기 때문이 아니다. 대마법사의 마법에 그런 건 없다.
‘남학생과의 데이트라는 거지.’
하이케가 괜히 그런 메시지를 보내 두진 않았을 터였다. 그 자체가 하나의 힌트다.
아레아는 조건을 충족시켰고, 그 때문에 마법이 약해진 것이다. 풀어 낼 수 있을 만큼. 불쾌할 만큼 하이케의 뜻대로 되었다.
‘앞으로 하이케가 주는 선물은, 그게 뭐든 보지도 않고 소각한다.’
굳게 결심하며 아레아는 팔찌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세밀한 조정과정을 거쳐 새로 덧씌워진 하이케의 마법은 지워졌다. 팔찌는 본연의 기능을 되찾았다.
어느덧 그 자리에는 은발의 아름다운 소년이 서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가면과 마법봉을 내다 버릴까 한 아레아는 왠지 그것을 품에 챙겨 넣었다.
‘이제는 기숙사로 돌아가야지.’
아까 하던 마법 연구를 마무리할 참이다.
*
“크, 상금도 받고 우승도 하고! 기분 째진다!”
맥주를 들이키며 아스카가 외쳤다. 분장을 지운 그는 아까와는 놀라보게 다른 인상이었다.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아카데미 식당의 3층.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데 성공한 그들이었다. 검술 학부 녀석들이 알아서 자리를 맡아 놨다.
시안이 옆에서 코를 찡그리며 맥주를 들이마셨다. 그 역시 기분 좋은 얼굴이다.
“종일 분장한답시고 처박혀 있었는데, 성과가 있어야지. 헬무트, 너는 낮에 뭐했어?”
“인형극 봤어.”
“정말? 그거 나도 보고 싶었는데. 완전 제대로 만든 공포물이라면서. 무섭다던데.”
시안이 눈을 빛냈다.
“그럴듯했는데 무섭진 않…….”
부인하려던 헬무트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흠칫했다.
“무서운가.”
눈치 빠른 시안이 넌지시 물었다.
“왜, 옆에 있는 여자애가 벌벌 떨면서 너한테 달라붙고 그랬어?”
“글쎄.”
슬쩍 던진 질문에도 헬무트는 실수로라도 말을 흘리지 않았다. 낮에 함께 있었던 예의 그 여자애에 관한 건에는 완벽하게 입을 다무는 그였다.
그때 마침, 이야기의 당사자가 나타났다.
“여기 있었네.”
그가 나타난 순간, 어둑어둑한 이곳에 조명 수십 개가 밝혀지는 듯했다. 하얀색 로브를 입은 아레아였다.
아스카와 시안은 그 모습을 보면서 절실하게 실감했다. 만약 아레아가 여장 대회에 참가했다면, 그가 무대에 오른 즉시 우승자가 정해졌을 거다.
그는 여느 때처럼 시안과 아스카를 싹 무시하며 태연하게 헬무트 쪽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축제는 재미있게 즐겼어?”
“아아, 그래.”
불꽃놀이가 생각나서 굳이 그들을 찾아 다시 여기로 온 그였다. 확인해 두고 싶은 것도 있었다.
안색은 평소와 같았지만, 아레아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스카가 불퉁하게 물었다.
“너는 오늘도 종일 처박혀 있었던 거야? 왜 인생을 그렇게 재미없게 사냐. 헬무트는 웬 정체 모를 여자애와 데이트도 했다는데.”
“데이트?”
아레아가 헬무트의 빈 옆자리에 앉으며 지나가듯이 물었다. 헬무트는 단박에 부인했다.
“그런 거 아니야.”
“뭐, 상관없어. 그보다…… 시작한다.”
아레아가 하늘 쪽을 지목했다.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피요오오옹! 피용! 요란한 소음과 함께 하늘에 현란한 불꽃이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아스카와 시안도 탄성과 함께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마법 학부가 심혈을 기울인 불꽃놀이 수준은 말할 것도 없이 놀라웠다.
“와, 저거 봐라! 꽃 모양이야!”
“저건 뭐지? 미친, 저거 우리 학장님 아니야?”
“완전 자세한데? 와 저건 대련이잖아? 두 명이 검을 들고 맞서는 거!”
“동작까지 제대로인데? 와! 저건 빛의 정령이다.”
“누가 너한테서 영감을 받았나 보네.”
빛의 정령이 얄밉게 삐죽대며 포르르 날아가는 모습이 완벽하게 밤하늘에서 구현되고 있었다.
제국의 축제에서 선보여도 좋을 만큼 완성도 높고 제대로다. 역시 이번에도 쓸데없이 재능을 쏟아부은 듯했다.
모두가 불꽃놀이에 빠져든 사이, 아레아는 슬쩍 헬무트를 쳐다봤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담아서.
아까와 같은 거리. 그러나 달라진 모습으로 그들은 함께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한 헬무트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들은 눈을 마주쳤다.
“……저.”
아레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헬무트 앞에서는 하고 싶은 말도 삼키게 된다. 그것은 소녀의 모습일 때와 똑같았다.
“아까 네가 함께 있었다던 그 여자애 말이야…….”
그러나 더 어떤 말이 나오기도 전에 아레아의 말을 끊은 건 헬무트 쪽이었다.
“아아, 모르는 사이야. 그냥 잠깐……. 같이 다닌 것뿐. 무슨 문제라도?”
가벼운 말투. 새카만 눈동자에는 동요 한 점 드러나지 않는다.
‘역시, 눈치채지 못한 거로군.’
약간의 실망감과 함께,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직후 아레아는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둔해도 이렇게 둔할 수가. 얼굴을 좀 보라고, 거의 똑같잖아! 시력도 좋으면서 왜 모르는 거야?’
웬만한 이들이라면, 아카데미에 다니는 아레아의 성별을 의심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혈연관계를 의심해 볼 만하다.
하지만 헬무트에게 미적 감각이 있는지는 좀 의심이 되었다. 그는 아레아를 처음 보는 순간에도 담담했으니까.
그러니 얼굴 인식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아레아는 왠지 모를 분을 삭였다. 이런 걸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모르면 그걸로 됐다. 아레아는 애써 미소 지었다.
잠시 아레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헬무트는 다시 불꽃이 수놓아지는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아레아 역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축제의 마지막 밤이 무르익고 있었다. 헬무트는 밤하늘을 보면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여장…… 이라.’
역시 본의로 그런 모습을 했던 건 아닌 것 같으니 모른 척한 건 잘한 일 같다.
아레아가 이렇게 초조해져서 새삼 확인하러 온 것을 보면. 단 한 가지 궁금한 건.
‘그래서 아레아의 원래 머리색은 뭐지?’
그것뿐이었다. 물을 수는 없겠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헬무트는 느긋하게 의문을 미뤄 두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아레아가 놓치고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었다.
첫째, 헬무트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적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아레아가 이름을 불렀을 때 자연스럽게 넘어갔다는 것.
‘아레아도 의외로 허술하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둘째, 헬무트는 농담이라도 아무나 친구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게 여자, 친구라는 농담 같은 소리라도 말이다. 아스카조차도 힘겹게 친구의 범주로서 인정을 받았었다.
누가 둔한 건지는, 결국 파헤쳐 봐야 알 일이다.
결국 헬무트와 아레아의 관계는 축제의 날 이후로 원점 비슷하게 돌아갔다.
마주할 때마다 약간의 머뭇거림과 어색함이 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하지만 그 미묘한 분위기는 금세 자연스럽게 묻혔다. 룸메이트로 있었던 기간이 길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다음 주에 헬무트는 바로 알란 교관 때문에 미루어진 밥을 샀고, 그들은 종종 휴일을 함께 보냈다.
정체된 관계 속에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